전두환 씨 백담사 들어갔던 그 날 사망

백담사로 품어준 불교계에 끝까지 '10.27법난' 모르쇠

2021-11-23     조현성 기자
전두환

 

군부독재와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전두환 씨가 23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88년 11월 23일 재임 중 실책과 잘못을 사죄한다면서 아내 이순자 씨와 인제 백담사로 들어간 지 만 33년 만이다. 군부에 학살당한 민간인을 향한 참회는 끝내 없었다. 회고록을 통해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을 받은 전씨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 받았다. 오는 29일은 항소심 결심공판일이었다. 전 씨는 여론을 의식한 듯 국립묘지가 아닌 전방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하나회' 조직 군부 쿠테타, 민간인 학살 주도

전 씨는 합천 율곡면에서 태어나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제1보병사단 사단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79년 국군 보안사령관이 됐다. 노태우 등 육사 11기 동기들과 ‘하나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한 때 정승화 총장 등을 연행하고 군을 장악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시국 수습을 명목으로 확대한 비상계엄에 맞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했다.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이었다.(5·18민주유공자유족회 2005년 집계)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을 통해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이후 민주정의당 입당 후 간접선거 방식으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전두환은 육사 동기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 뒤에도 민주정의당 총재로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노태우는 권력을 넘겨 받았지만 ‘여소야대’ 국회에서 거세지는 5공화국 비리와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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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내설악 백담사로 들어갔다.

전 씨는 백담사 은둔 769일 만에 연희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은닉재산이 발각돼 1995년 구속됐다. 내란과 살인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전두환 씨는 2017년 펴낸 <전두환 회고록> '백담사에서의 769일'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70일 가량 지나자 우리 내외를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랜 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고 했다"고 적었다.

전 씨는 백담사는 손삼수 비서관이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서의현 스님에게서 추천 받은 곳이라고 했다.

전 씨는 백담사에서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묵었다. 이 방은 두 사람이 눕고 나면 윗목에 책상 하나를 겨우 놓을 수 있었다. 방을 덥히려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매운 연기가 방을 채웠다. 수도도 전기도 없었다. 

전 씨에 따르면, 당시 백담사 주지 도후 스님은 그런 방을 내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심경을 "필설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백담사에 머무는 동안 전 씨는 예불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광주특위가 최규하 전 대통령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했다는 소식 등으로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전두환

 

어느 날, 이것도 인연이라며 전 씨 내외는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일해'라는 아호를 준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국태민안과 영가천도' 기도를 했다.

전 씨는 "백일 기도 동안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모두 내 잘못이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자고 다짐했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억울함이 엄습했다"고 했다. 자신이 어렵게 평화적 정부 이양을 했고, GNP 600억 달라에 빚이 200억 달라인 나라를 4000억 달라 부자 나라로 만들어 넘겨줬는데 수모를 겪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이 들었다가도 분해서 벌떡 일어나 잠을 설칠 때가 많았지만, 전 씨는 닥치는 대로 경전을 읽는 것으로 극복했다. 사경도 하고 목청 높여 고성염불도 했다. 다라니들을 외우기도 했다.

100일 기도 입재 후 7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전 씨 내외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인과가 옳은 말씀 임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전두환 회고록>은 전 씨의 이같은 신행담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의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전 씨는 불교계를 군홧발로 짓밟은 10.27법난도 자신은 몰랐다고 했다.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을 학살한데 이어 같은해 10월 27일 조계사 등 전국 사찰을 급습해 당시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 등 2000여 명을 연행하고 사찰 서류와 재산 등을 압류했다.

한편, 지난 10월 27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10·27법난 41주년 추념법회에서 "(은사인)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일 때 신군부 압제 아래서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을 위해 성금을 쾌척하고 희생자 천도재를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월주 스님은) 전두환 정권 지지 성명도 거부하면서 신군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10·27법난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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