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십찰 고성 옥천사

[연재]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162

2019-10-08     김규순

의상대사가 당나라 시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에 유학을 갔다. 그는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지 2년이 지난 670에 귀국한다.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김인문에게서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신라 문무왕에게 전하였고 미리 대비하여 당나라를 격퇴시켰다.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개창하였다. 화엄종은 신라왕실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위로하여 신라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했다. 의상은 화엄십찰을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신라9주에 골고루 건립한다. 의상대사는 676년에 부석사(상주)와 옥천사(강주) 그리고 국신사(전주)를 동시에 창건했다. 그에게 10명의 제자가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현존하는 화엄십찰 중에 유일하게 고성 옥천사와 청도용천사가 경쟁 중이다. “비슬산 옥천사”라고 법장화상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비슬산은 대구와 청도사이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옥천사에서는 연화산이 옛날에 비슬산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증거가 될 문헌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도 용천사는 원래 절이름이 옥천사였는데 용천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사찰의 공통점은 샘이름에 의해 절이름이 정해진 경우이다. 용천사에는 용천이 있고 옥천사에는 옥천이 있다.

일반적으로 지명은 권력자에 의해 변경되지만 지역의 샘물 이름은 지역민들이 전승하므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절 이름이 바뀌는데 샘 이름까지 바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혹 바뀌더라도 두 가지 아름을 동시에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수상하다. 특히 옥천과 용천은 사뭇 다르다. 옥천은 옥처럼 맑은 물을 의미하면서 서방정토를 내포하고 있지만 용천은 힘차게 솟아나는 물이란 의미 밖에 없다.

또 한가지 화엄십찰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다. 아미타불은 동향을 하는 부처님이므로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전도 동향으로 짓지만 사찰의 지형이 아예 동향인 경우가 많다. 용천사에서는 동향의 건물이 없으며 지형도 동향이 아니다. 그리고 의상대사 생전에 이미 양주에 범어사와 미리사를 창건하였으므로, 또 양주에 소속된 청도에 또 다른 화엄사찰을 둘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화엄십찰은 통일신라가 필요에 의해 외곽지에 전략적으로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이유로 고성 옥천사가 화엄십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전국에 옥천은 여러 군데 있다. 특히 고성 옥천사의 옥천은 영험하다. 옛날에는 피부병 환자들이 몰래 들어와서 씻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속이 불편한 사람이 많이 찾는 물이다. 옥천으로 몸의 질병과 함께 마음의 병도 치유할 수 있다. 옥천은 부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