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제2법칙과 깨달음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0.

2015-12-28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고마움은, 즉 고맙다는 감정은 자연적으로만 또는 직관적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삶이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성과 지혜의 도움을 받아 ‘왜 고마운지’를 밝히고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정치란 옳건 그르건 이런 시도이다. 문제는, 반대편이 국민에게 준 것이라면, 고마움까지도 섭섭함으로 둔갑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설사 고마움을 알고 느끼더라도 한순간일 뿐이고, 다음 순간부터는 고마움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그래서 불행해 진다.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당신은 고마워해야 할 일이 있다"고 알려주면, 그때서야 비로소 고마움을 다시 회복한다. 그리고 행복해 진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지금 비록 불가촉천민일지라도,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일지라도, 혹은 최저임금노동자일지라도 “동물로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복이냐” 하고 알려준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나서 행복해진다. 그 결과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서, 내생에는 불가촉천민을 벗어나고 이생에서는 정규직을 얻고 최저임금노동을 탈출한다. 물론 가장 잘된 경우이다.)

인간은 전두엽을 지닌 존재이므로, 게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전두엽을 지닌 존재이므로, 두뇌를 이용해서 '삶의 낙'을 창조한다. (인간의 낙 중 많은 부분이 무형의 정신적인 비물질적인 낙이다. 이 무형의 낙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커진다.) 어떤 즐거운 일을 하기로 되어있는 경우, 인간은 그 일이 일어나기로 되어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즐거워한다. 많은 경우에, 막상 그 일이 일어났을 때보다, ‘일어나기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생각과 상상’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현재와 미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현재에만 사는 나머지 다른 동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자그마치 한 달 동안이나 크리스마스가 온다고 들떠 즐거워하지만, 막상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어느 누구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울해 보인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대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기대가 주는 낙은 파생낙이다. 크리스마스 날은 그간의 기대를 청산하는 '청산일'이다. 청산일은 통상 활기가 없고 어둡다.

혹시 깨달음의 세계도 그런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깨달음을 얻어 대열반(para nirvana)에 들기 전에, 즐거움을 맘껏 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중생을 교화하는 즐거움은 무여열반에 들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의 대열반을 맞아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이유가 없다. 물론 ‘무여열반에 들지 말고 끝없이 다시 오자’는 대승불교의 이론은 이와는 다르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막상 어른이 되면 온갖 괴로움이 생기고 엄습한다. 순수한 어린시절의 즐거움은 어른이 되서는 즐길 수 없다. 그러므로 어른이 되기 전에 어린시절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다시 올 수 없는 축복받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계에 대한 꿈이 투영된 것이 극락이고 용화세계이다.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수백억 년 전에 당신에게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당신은 과연 어느 쪽을 택할까? 하나는 처음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마음껏 살다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1998년에 IMF사태 즉 외환위기를 당한 원인 중 하나는 빨리 어른나라가 되고 싶어 서둘러 WTO에 가입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가 어린나라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어른나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무역규범을 지키다보니, 수출에 문제가 생겨 외환보유고가 부실해졌다는 설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세속 즐거움(여기에는 깨달음에 대한 기대도 포함된다)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세속 즐거움을 누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속과 깨달음 사이의 길은 일방통행이다. 세속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만 가능하지, 그 반대 방향인 깨달음에서 세속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즉 "깨달은 사람이 다시 미(迷)해질 수 있는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것이 불경에 등장하며, 불경의 단호한 답은 “불가능하다”이다. 즉, "일단 한번 깨달으면 다시 미(迷)해지는 일은 없다."

미(迷)해지는 것은, 즉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무질서의 증가이므로) 일종의 '영적 열역학 제2의 법칙'에 해당하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나, 역으로 깨달음은 엔트로피 감소 현상이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이다.

진화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역행(逆行)이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구가 따라서 지구 상의 생명계가 '닫힌계(closed system)'가 아니라 '열린계(open system)'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는 닫힌계가 아니라 열린계이다. 태양은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에너지는 생물체의 뇌를 발달시키고, 발달한 뇌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지식은 지혜를 증진시키고, 마침내, 지혜는 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진제 종정스님처럼 아무리 진화론에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지구상에 동물만 존재하고 인간이 없다면 깨달음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개나 소나 개미나 당나귀나 보노보나 에이즈 균을 초조 가섭존자로부터의 제80대 조사(祖師)로 모시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이들은 오도송을 한시(漢詩)로 짓고 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존재하게 만든 (생물학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진화는 깨달음으로 가는 필수 조건이다. 이런 진화가 일어난 것은 태양에너지(solar energy) 덕분이다. 참나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생명체는, 메르스균이건 아메바이건 지렁이건 개미이건 참치이건, 모두 참나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단지 참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자기 안에 숨어있는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참나를 못 찾으면 참치처럼 회가 되어 참나를 찾는 인간에게 먹히는 수가 있다. 인간은 참나를 지닌 참치를 회를 떠 잡아먹는다. 이럴 양이면 ‘일체 중생이 참나를 지녔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허튼 소리가 되고 만다. 참나를 주장하려면 일단 육식부터 금하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거나 종(種)쇼비니스트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참나가 있다면, 참나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으며(무뇌아에게도 없다. 설사 참나가 있더라도 뇌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 진화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진제 종정이나 송담 스님 같은, 참나론자들이 진화론을 반대할 이유는 하등(何等)에도 없다.)

하지만 지구에 제공되는 에너지가 사라지면(예를 들어 태양이 식으면), 혹은 지구가 식어 생명계에 에너지를 제공하지 못하면, 영적·정신적·물질적 고등문명은 물론이거니와 생명계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정신과 마음과 문화)에 에너지가 즉 새로운 정보지식이 제공되지 못하면, 또 잊지 않도록 옛 정보를 상기시켜 주지 않으면, 인간은 다시 암흑 속으로 후진할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에 대한 가르침도 사라질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에서 가장 근면한 존재이다. 저승사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 저승사자이다. ‘끝없이 질서를 찾는 뇌’를 지닌 존재에게 무질서는 곧 죽음이다.

출가수행자들이 대중을 이루고 살면 대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그리고 재가자들은 출가수행자들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올바른 '사유와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마움도, 고마움에 대한 ‘내적인 사유와 외적인 가르침’이라는 에너지의 섭취를 반복함으로써 유지할 수 있다.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법문을 듣고, 이들을 바탕으로 사유와 명상을 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이유이다.

깨달음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다고 하기에 무의식의 영역이다. 평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물론 의식의 영역이다. 깨달음은 세수하다가 오고, 똥을 누다가 오고, 밥을 먹는 중에 돌을 씹다가 오고,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오고, 책(經)을 읽다가도 오고, 법문을 듣다가도 오고, 하늘을 날아가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다가도 오고, 뒤뜰에 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가도 오고, 새벽하늘의 별을 보다가도 온다. 이걸 불가에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한다. 무의식의 활동은 우리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고, 사실상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깨닫고자 하는 의식적인 마음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무르익은 수행자는 다만 기다릴 뿐이다.

물론 인간이 비약적으로 발달을 하면 육체를 버리고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세계가  무색계이다.) 심지어 뇌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에너지는 허공에너지를 쓰고, 디랙(Paul Dirac 1902~1984, 1933년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새로운 형식의 원자이론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음)의 바다에서 공간상 한 점에서의 전자의 유무(有無)를 비트로 삼아 의식을 만들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는 촘촘히 연결되어있으므로 구태여 공간이동을 할 필요도 없이 우주에 대한 모든 지식을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수학과 같이 실재 물질세계와는 무관한’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물질세계에 기반을 둔 세계에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일 수도 있다. 아직 의식이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미개한 인간의 망상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은 우리 뇌가 외계의 자극을 받아들여 전기·화학적으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물자체(物自體 ding-an-sich)를 (설사 물자체가 있다 해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 뇌 혹은 마음의 구축물이다. 이는 모든 생물에게 해당하지만, 개별 생물체에 따라 '이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라 천지현격(天地懸隔)의 차이이다.)

물론 이런 세계는, 즉 육체도 심지어 뇌도 필요 없는 세계는, 지금의 인간 의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고 경험도 할 수 없는 세계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 인간이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세계일 수 있다. 마치 지렁이들에게는 인간의 의식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한 생명체가 의식할 수 없는 것은, 그 생명체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생명체의 정체성은 사실상 이어지지 않는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35억 년 전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인 단세포생물과 ‘지금 100조 개 다세포 생물’인 인간 사이에 사실상의, 불변의 단일한 정체성의, 이어짐이 없듯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의식 자체가 진화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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