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일등 불가능하다고 아예 공부 않겠다?”

[기고] 현응 교육원장의 깨달음론은 하향평준화

2015-09-14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지난 4일 현응 조계종 교육원장은 자신의 저서 "깨달음의 역사" 출판 25주년 기념강연을 통해서 '깨달음은 이해의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처럼 깨달음이 이해의 차원이라면, 총명하고 현학적인 그가 못 깨달았을 리 없다. 책을 낸지 벌써 사반세기나 흐르지 않았는가? 이미 깨달았다면, 현응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인 행위인 보살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과 넉 달 전에 <법보신문> 기고문을 통해서 승려들은 불교재산관리만 하기에도 힘에 부치니 보살행은 신도들이나 하라고 일갈(一喝)했다.

손쉬운 '이해의 깨달음'은 스님들이 하고, 어려운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 등 자비로운 보살행은 신도들이나 하라는 소리다. 즉, 이행(易行)은 스님들 몫이고 난행(難行)은 신도들 몫이라는 소리다.

또, 스님들은 머리나 굴릴 터이니 신도들은 몸이나 굴리라는 소리다. 머리 따로 몸 따로 놀자는 소리다. 이스라엘 장교들의 "나를 따르라"가 아니고, 이슬람 장교들처럼 뒤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꼴이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전투 시 선두에 서는 관계로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한 4차례 중동전쟁에서 세계전쟁역사상 최고의 장교전사율을 기록했다.)

현응은 중국불교가 몹시 사변화(思辨化) 되었다고 비판하지만 현응의 불교 역시 사변화의 극치이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 쉬운 일이라 하면서도, 동시에 '역사로 표현되는 실제적인 현실참여'를 거부하며 '머리로만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사변적인 현실참여론자이다.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위인전 영웅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지언정, 바로 옆에서 사고를 당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가엾은 사람을 보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사람이다.

현응은 죽어가는 불교와 조계종을 위해 도대체 뭔 일을 하고 있는가?

도박, 폭력, 사기, 절도, 음주, 결혼, 축재, 술집 딸린 모텔경영 등 온갖 범계가 만연하고 판을 치는 조계종 총무원에 빌붙어 살며 지금까지 6년간 무슨 보살행을 하고 있는가?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면, 현응이 깨닫지 못한 걸로 볼 수밖에 없다. 본인 주장처럼 그리 쉬운 게 깨달음이라면, 또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면, 깨달음에 대해서 저서까지 낸 현응은 무슨 연유로 깨닫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깨달아 놓고 일신의 영달과 편안함을 위해 일부러 현실참여와 보살행을 방기(放棄)하고 있는가? 그래서 조계국(曹溪國) 예조판서(禮曹判書) 현응은 조정(朝廷)인 총무원을 저 모양 저 꼴로, 즉 예(禮 계율과 수행)가 실종된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혼군(昏君)에게 "그러면 아니 된다"고 섬돌에 머리를 찧어가며 간(諫)한 적이 있는가? 그 결과 유배를 당하거나 사약을 받은 적이 있는가?

깨달음을 격하하여 조계종 권승(權僧)들을 높이자는 속셈인가? 아니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산인가? 수년 전부터 총무원에서 들려오던 "깨달은 이 하나도 본 적 없다"는 자정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의 주장과 어찌 그리 닮았는가? 오랫동안 총무원이라는 같은 소굴(巢窟)에 같이 살다보니 사상도 같아지셨는가? 두 분 대신(大臣)의 주장에 흡족히 미소 지으실 분이 떠오른다. 용상에 높이 앉아 목을 높여 격양가를 부르신다. "깨달음이 해오(解悟)라니, 그래서 부처와 중생 사이 거리가 좁혀지니 이 아니 좋을소냐!"

현응은 '깨달음의 역사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행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게 바로 조계종의 현실이다. 현응을 보면, 왜 조계종에 끔찍하고 파렴치한 문제가 생기고 치성하는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머리로만 불교를 해서 그렇다. 현응의 몸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머리만 남겨두고 도주했는가? 깨달은 머리가 시킬 궂은 보살행이 싫어 도망갔는가?

전 통일교도 이영선은 수십 년간 노점상 가정부 등 온갖 궂은일을 해 번 돈을 교주 문선명에게 바쳤지만, 그 돈이 문선명 가족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쓰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문선명을 떠났다. 문선명은 생전에 19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대저택에서 살았다. 문선명은 가르침과 행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은 자신을 구세주, 죄 없는 참사람이라 하고 자기부부는 죄 없는 참부모 자기 가족은 죄 없는 참가족이라 했지만, 친딸과 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증언은 YouTube를 보시기 바란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보다도 문제가 많은 가족이었다.  

조계종 권승들은 말과 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 흡사(恰似)하다. '참나'라는 권력승들이 도박 폭력 절도 매수 사기 거짓말 금권선거 음주운전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왔다.

권승의 일원인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은 차라리 정직하다. 그는 대놓고 진실을 말한다. 자기들 승려들은 절집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들일 뿐이라고. 그러니 ‘무리하게 자기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볼멘소리다.

한국 선불교는 '행이 따르지 않는, 머리로만 이해한 해오(解悟)'를 지해종도(知解宗徒)로 규정하며 극렬하게 배척한다. 해오는 모양만 꽃이지 향도 없고 씨도 맺지 못하는 종이꽃이다. 행이 따라야 향을 풍기고 씨를 맺는다. 종이꽃은 앉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진짜 꽃은 수만리 멀리 향과 씨를 퍼뜨린다. 그래서 꽃에 향과 씨를 갖춘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수행이란 꽃에 향과 씨를 갖추기 위한 노력에 다름이 아니다. 그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꽃에 향과 꿀을 갖추어야 벌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현응의 주장처럼, 불교재산관리인들이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다. 이 점에서 '깨달음을 해오라고 주장하는' 현응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감이 안 가는 것은 아니나, 부처님 제자가 되려고 산문(山門)에 들 때 재산관리인이나 되려고 들어온 자가 누가 있는가? 현응은 그런 마음으로 중이 되었는가? (왜 자신의 비루한 처지로 다른 이들까지 강제로 끌어들이는 폭거를 자행하는가?)

부처님 당시에 불교재산관리인이 되려고 부처님제자가 된 일이 있는가? 죽림정사나 기원정사나 급고독원 재산관리인을 목표로 비구·비구니가 된 사람이 있는가?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소유의 불교승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재산관리인이건 수행자이건 그건 당신의 선택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당신더러 불교재산관리인이 되라고 강요했단 말인가? 사실 불교재산관리는 재가신도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덕망 높은 장로신도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그게 부처님 당시의 절집제도였다. 이와 반대로 가는 저간의 조계종의 행태는, 불교재산을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아귀다툼과 아수라싸움을 벌이는 추악한 모습은, '2,500년 만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꼴'이다.

썩은 고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명심하시라. 악취를 풍기는 썩은 고기에 달라붙은 것도 당신 의지이고, 악취를 풍기며 썩은 고기를 떠나지 않는 것도 당신 의지이다.

깨달음이 신화에 지나지 않고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되는 것이 왜 신화이고 불가능한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세우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석가모니 부처라는 역사적인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이상, 그분의 고귀한 삶을 배우라. 형이상학적인 놀음은 그만두고 그분의 언행을 닮으라. 조금만이라도 닮으라. 다 닮기는 불가능하므로 아예 닮지 않겠노라는 궤변은 삼가라. 이 말은 '전교 일등이 불가능하므로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성인이 되는 게 불가능하므로 악인이 되겠다'는 말과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배움은 닮음으로부터 온다. 닮음이 없이는 창조도 없다.
닮으려는 노력은 닮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깨달음을 낳고 더 큰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잊지 마시라. 불교 하향평준화를 부르짖는 현응 스님은 조계종 교육원장(교육부장관)이시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dasan258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