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의 ‘마지막 수업’
손석희의 ‘마지막 수업’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09.11.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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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1. 오늘 MBC ‘100분 토론’은 손석희 선생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납니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땅으로 정리된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독일어로는 엘자스로트링겐[Elsass-Lothringen]) 지방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그땐 물론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저 슬펐습니다.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슬픔이 아팠습니다.

“프란츠는 그날도 아침 늦게까지 학교를 가지 않고 있었다. 아멜 선생님께서 프랑스 문법을 질문하신다고 했는데 준비를 하지 못해 혼날 일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빼먹고 들판으로 놀러 나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학교로 발길을 돌리었다. …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용한 교실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멜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서 네 자리로 가거라. 프란츠. 하마터면 너를 빼놓고 시작할 뻔 했구나.’ …
‘여러분 이 시간이 내가 여러분을 가르칠 수 있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이제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왔습니다.’ …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문법시간과 쓰기 시간, 역사시간이 지나갔다. 성당의 큰 시계가 12시를 알리고 그와 동시에 훈련에서 돌아오는 독일 병사들의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아멜 선생님은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려 탁자를 붙잡으며, ‘여러분, 여러분 나는…나는….’ 하고 할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칠판으로 돌아서서 분필로 아주 커다랗게 ‘프랑스 만세!’ 하고 썼다.“

2. 생각이 말이 됩니다. 말이 민주주의입니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 아닙니다. 말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폭력이 사라집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가 돼서는 안 됩니다. 말이 모여서 토론이 됩니다. 너와 내가 다르듯, 서로 다른 생각들이 모여 토론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 공론을 형성합니다. 주어진 질문에다 객관식으로 답하는 단순화된 여론과는 천양지차입니다. 공론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어갑니다. 공동체는 공동의 문제를 풀어가는 공화정을 구축합니다. 공화정체가 곧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되는 겁니다. 1948년 처음 헌법을 만든 이래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헌법이고,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이며, 이것이야말로 시민들의 역사적 이상입니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과 글이 중국과 달라서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어여삐’ 여겼습니다.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기득권의 저항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개혁’군주입니다.

구어체와 문어체가 따로 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생각과 글과 말이 엇갈리던 시대입니다. 선각자들은 언문일치 운동을 폈습니다. 물론 저항은 여전했습니다. ‘정치는 쿠데타 세력이 알아서 할테니 시민여러분들은 생업에나 종사하라’는 혁명구호와 유사한 맥락이었을 겁니다. 역사가 그래왔듯 공화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은 말과 펜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시민은 주권자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은 4년마다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것 말고, 끊임없이 나라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데 참여해야 합니다.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가마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명예로운 지위가 되는 것입니다.

시민의 생각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살면 말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죽은 문자가 아닌 살아있는 말로, 당신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토론하고, 공동체를 위한 공론의 장을 펼쳐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공화주의의 핵심입니다. 공화정의 중심에 늘 살아있는 언어로 삶의 문제를 얘기하던 MBC 100분토론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조정자’이자, ‘커뮤니케이터’이자, ‘모국어의 스승’인 손석희 선생이 있습니다.

3. 지난 여름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창간 100호를 맞아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가장 신뢰도 있는 언론인 1등을 뽑았습니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도 지난 여름 전문가 1000명을 대상으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수많은 언론인 가운데에서 19.7%의 지지를 얻어 영향력 있는 언론계 인사 1위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캠퍼스 라이프와 한국대학신문이 공동으로 지난 9월 1~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707명을 대상으로 ‘2009 전국대학생 의식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언론인 1위가 나왔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신뢰성,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갖는 영향력, 여기에다 미래를 꿈꾸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이상이자 모델로서의 손석희 선생입니다. 어느 언론인이 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을까요.

‘대구 경북 지역’에 거주하는 대학(원)생 50명과 방송 종사자 50명, 회사원 50명, 그리고 공무원 50명 씩 모두 200명을 설문 대상으로 삼아, 결과를 정리한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속성에 대한 평가와 수용자 만족도와의 관계에 관한 연구(최현정, 계명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4년)”가 있습니다.
‘토론 진행자의 속성에 대한 평가’에서나,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수용자들의 만족도’에서, MBC 100분 토론이나 손석희 선생에 대한 평가는 남달랐습니다.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속성에 대한 평가’와 ‘프로그램에 대한 수용자의 만족도’와의 관계도 분석해보았습니다. 다른 토론 프로그램보다 손석희 선생의 경우 훨씬 높은 정(+)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00분토론이 곧 손석희 선생이고, 손석희 선생이 곧 100분 토론이라는 증거입니다. 손석희 선생이 곧 대한민국의 TV토론 문화를 이끌어 왔다는 학문적 논증입니다. 그런 손석희 선생이 이제 100분 토론을 떠나갑니다.

4. 지난해 여름 미국 NBC의 대표적 시사 대담 프로인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을 맡고 있던 팀 루서트 앵커가 세상을 떴습니다. 경쟁 언론사는 물론 정파를 초월한 모든 정치인, 그리고 당시 오바마와 매케인 대통령 후보도 장례미사에 참석했습니다. 루서트는 ’루서트 스타일‘을 남겼습니다. 미국의 수많은 앵커와 블로거들이 ’루서트 스타일‘을 분석했습니다. 하나의 모델이 됐습니다. 루서트는 워싱턴에서 ’힘‘ 그 자체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정받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스튜디오에서는 사냥견 같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곰돌이 인형(테디베어)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손석희 스타일’이 있습니다. 여느 진행자도 ‘손석희 스타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손석희 스타일’은 분명 모델입니다. 때로는 넘어야할 산이 되고 맙니다.
"지금도 솔직히 제일 괴로운 것이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쭈그리고 앉아 양말을 신을 때다. 또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요즘 같은 겨울날 시동걸고 차 안에 앉아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 해 12월 브론즈 마우스 수상식장에서 했던 말입니다.

5. 민주공화국의 말은 살아있습니다. 죽은 언어가 아닙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그리하여 비석에나 새겨진 사어(死語)가 아닙니다. 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초요, 공화정의 기초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고대국가이거나 혹은 유신독재시대일 겁니다. 다시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던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미셸 푸코의 말입니다. 살아 숨 쉬는 모국어가 아닌, 죽어 잠드는 문어체의 시대로 되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말과 표현의 자유에는 어떠한 규제도 자리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시민의 양식에만 맡겨두어야 합니다. 말이 곧 생각이고, 말로 표현하고 공적으로 토론하는 일이야말로 공동체의 기초요, 민주공화정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손석희 선생의 MBC 100분 토론은 공화주의의 한마당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였습니다. 공적 시민들의 운동장이었습니다. 줄여서 흔히들 ‘백토’라고 불리우던 100분 토론은 민주공화국의 훈련소였습니다. 이런 MBC 100분 토론이 ‘주어’를 잃었습니다. 100분 토론이 ‘주어’가 아니라 손석희 선생이 ‘주어’고, 100분 토론은 ‘수식어’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라고 노래했던가요. 손석희 선생의 오늘 방송은 ‘마지막 수업’입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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