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부킹스님
[젊은시인과 노스님] 부킹스님
  • 이홍섭
  • 승인 2007.01.03 14: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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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킹스님이 입적했다.

여러 날 다른 사찰을 돌아다니다 낙산사에 돌아와 보니 뭔가 허전했다. 오후 두 시경, 늘 빨래를 하던 시간에도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부킹'을 나갔나 해서 경내를 둘러보아도 스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걸음이 온전하지 않은 스님은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고 늘 요사채 가까운 곳에서 한 건을 노리곤 했다.

내가 부킹스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내 방은 스님 방과 등을 돌린 채 자리잡고 있어서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스님을 만날 때는 공양 때이거나, 세면장에서 빨래를 할 때뿐이었다. 이따금 종무소에서 뵙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스님은 종무소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드시곤 했다. 하루는 냉장고에서 노란 참외를 꺼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쓸쓸한 여운을 남겼다.

스님은 전국 각지의 사찰을 떠돌다 입적을 얼마 앞두고 이곳 낙산사에 오셨다. 언젠가 젊은 날을 설악산 일대에서 보낸 인연으로 늘그막에 이곳에 다시 찾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스님은 육신은 이미 노쇠해 버렸으나, 마음은 늘 어떤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스님에게 '부킹스님'이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은 요사채 끝방의 젊은 스님이었다. 장난기 많은 스님은 부킹스님이 경내를 거닐 때마다 "또 한 건 올리려나벼……"라며 놀리곤 했다.

부킹스님은 늘 빨래를 마친 오후 세 시경 경내에 나가 관광객들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마땅한 부킹 상대를 고르지 못하는 날에는 시골집 노인네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만약 이런 날 반바지를 입고 경내를 거닐거나,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스님 앞을 어정대는 청춘남녀가 있으면 영락없이 스님에게 일장 훈계를 들어야 했다.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업 상대는 아이가 둘 정도 딸린 젊은 부부였다. 스님은 이들을 방으로 초대하여 녹차를 대접하며 한담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어쩌다 스님 방 앞을 지나갈 때면 스님 방 댓돌 위에는 스님의 하얀 고무신 한 켤레와 한 쌍의 부부 신발, 그리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꼬마 신발 두어 켤레가 눈에 뜨이곤 했다. 만약 어느 화가가 이 댓돌 위의 신발들을 그림으로 그려 낸다면, 이를 본 사람들은 필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한 젊은 부부의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가정 풍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스님은 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부킹으로 소일하다 가셨다. 제를 지내 준 옆방 스님에 따르면 스님이 입적하고 난 뒤 마땅히 연락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 뒤에도 스님이 살아온 내력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절집에서는 그것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도 했다. 다만 홀로 노란 참외를 들고 나가시던 뒷모습과 날마다 한 건 올리기 위해 경내를 서성이던 스님의 뒷모습이 오래오래 남아 있을 뿐이었다.

스님은 극락에 가서도 부킹을 즐기실까. 지금도 휑 비어 있는 스님 방 앞의 댓돌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리곤 그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를 소소히 놓고 싶은 마음에 괜스리 설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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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 2007-04-28 13:54:06
편안히 적어내린 글귀가 맘을 편하게 하네요.
노스님의 생애도 상막한 우리들에게 귀감이 될만한데..
홍섭님의 책도 구해서 더 봐야겠어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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