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성선 시인은 시인이면서 선사가 되고자 했다. 선생의 부음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생전에 베낭을 메고 설악산을 오르던 선생의 뒷모습과, 홀로 인도의 산야를 헤매고 난 뒤 불현듯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던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선생은 무엇을 보고자 했던 것일까. 이 질문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 '파도' 전문
선생은 한 마리 자벌레를 통해 우주의 율동을 보고 있다. '구부렸다 폈다' 하는 자벌레의 움직임 속에서 우주 안의 작은 파도를 보고 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보잘것없는 자벌레의 움직임 속에서 우주의 율동을 읽어 내고, 우주와 하나 되는 생명의 움직임을 마치 근육이 수축, 이완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는 데 있다. 더하고 뺄 게 없는 이 간명한 시는 선생이 보려 했고, 또한 가고자 했던 삶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성선 시인이 벌레의 움직임 속에서 우주를 보고, 느끼고자 했다면, 조오현 스님은 벌레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삶을 보고자 했다.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가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 '내가 나를 바라보니' 전문
무금선원無今禪院은 조오현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백담사의 선원으로 선불교의 맥을 잇기 위해 스님이 직접 개원한 바 있다. 스님은 지금 그 선원에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좌들과 달리 승려이자 시인인 스님이 지금 들고 있는 화두는 '나'이다. 그런데 그 화두는 벌레로 바뀌고 있다. 이때 벌레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를 가장 단순, 간결하게 대변하는 한 상징이다. 스님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복잡다단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종국에는 폈다 오그렸다 하는 단순한 생명의 움직임 속에 수렴된다. 이때 인간은 벌레와 동격이 된다. 마지막 연은 그 인간적, 아니 '벌레적' 삶의 한 생애를 함축해 놓은 비유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도 결국 목숨을 도모하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고, 싸고, 낳는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성선 시인이 벌레 한 마리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율동을 읽어낸다면, 조오현 스님은 벌레 한 마리의 움직임을 통해 삶의 율동을 읽어낸다. 이성선 시인의 눈은 먼 곳을 향하고, 조오현 스님의 눈은 자기의 내부로 향한다. 한 사람은 초월하려고 하고, 한 사람은 비루한 삶을 껴안으려 한다.
내설악의 자연을 품에 안고 살았던 두 시인은 한 마리 벌레의 움직임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노래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과연 다른 세계일까. 두 작품을 반복해 읽다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묘하게도 벌레와 인간, 그리고 우주가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망함, 덧없음, 비루함, 그리고 아름다움까지도 하나가 되어 춤춘다. 그게 벌레의 춤일까, 인간의 춤일까, 아니면 우주의 춤일까. 벌레는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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