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댓잎소리 듣고 홀연 대오
[한국의 선지식] 댓잎소리 듣고 홀연 대오
  • 이기창
  • 승인 2006.12.0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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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던가(畵來畵去幾多年ㆍ화래화거기다년)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筆頭落處活猫兒ㆍ필두낙처활묘아) 하루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盡日窓前滿面睡ㆍ진일창전만면수)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夜來依舊捉老鼠ㆍ야래의구착노서)

가슴 깊이 드리워져 있던 미혹(迷惑)의 장막을 거둬낸 순간을 동산은 이렇게 노래했다. 동산은 금어선원 주위의 대나무숲을 거닐다가 바람이 희롱하는 댓잎소리를 듣고 홀연 대오했다. 의식은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꺼진다. 체험이 순간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깨달음 역시 찰나에 이뤄진다. ‘홀연(문득) 깨달았다’는 선가의 표현은 그런 체험의 반영이다.

동산의 진여(眞如ㆍ절대진리) 체험은 아주 독특하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뗏목을 타고 반야의 언덕에 다 달았다. 댓잎소리에서 반야의 설법을 들은 것이다. 이렇게 자연이 절대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무정설법이라고 한다. 동산의 댓잎처럼 돌멩이 구르는 소리나 풍경소리도 훌륭한 깨달음의 도구가 된다.

사람들은 여기서 의문을 품을 것이다. 어떻게 바람에 스치는 댓잎소리에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그런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 애당초 언설과 문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경지니까.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유식(唯識)에서 인식은 오류라고 가르친다. 분별은 예외 없이 진리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분별이 끊어진 상황이 무심이다. 댓잎소리는 동산의 분별심을 앗아가는 매개로 작용했다. 무심이 되는 순간 댓잎소리는 동산에게 절대진리로 다가선 것이다.

중국 당시대의 선사 영운(靈雲)은 복사꽃을 보고 대오의 인연을 맺는다. 영운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사찰에도 심검당(尋劍堂)의 이름으로 살아 있다. 심검당은 무명을 단 칼에 베어낼 지혜의 검을 찾아 그토록 오랜 세월을 방황한 그의 수행과정을 상징한다.

깨달음은 시공과 공간의 초월을 동반한다.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사람이 시공을 뛰어넘는 순간 삼라만상의 현상도 달라진다. 그 때에는 꽃을 본다든지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맞이하는 깨달음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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