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비치코머의 화두
[젊은시인과 노스님] 비치코머의 화두
  • 이홍섭
  • 승인 2006.10.17 17:43
  • 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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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코머beachcomber라는 직업이 있다. 모래톱을 샅샅이 뒤져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사람, 말뜻 그대로 모래톱을 빗질하는 사람이다.

요즘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우리 나라에도 비치코머들이 있었다. 여름 성수기가 끝난 뒤 바닷가에 가면, 지뢰탐지기 같은 것을 들고 해변을 뒤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그 탐지기로 모래 속에 숨어 있는 동전들을 찾아냈다. 철이 지나면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비치코머들은 다른 모양이다. 그들은 사시사처 바닷가에서 살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들의 직장에서는 하루종일 바다 냄새가 나고,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하루종일 바닷가를 거닐며 느끼고, 생각한다.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고 공존한다. 이따금 누군가 흘린 돈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매양 다른 모습들인 조개, 불가사리, 소라 등 자연물이다. 따라서 비치코머의 일상은 발견의 일상이라 할 수 있다. 발견 없이는 창조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치코머로서의 삶은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에게 비치코머의 삶을 소개해 준 사람은 리처드 보드라는 미국인이다. 그는 <<넓고 넓은 바닷가에>>(석필, 1996)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통해 그 자신의 직업인 비치코머의 삶을 들려주었다. 그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뉴욕의 홍보 대행사 간부직과 신문기자직을 그만두고, 미국 서부의 한 어촌에 정착해 비치코머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으나, 이혼을 하면서 전 부인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넘겨 주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돈 쓸 데가 많았던 여자는 생활의 안정을 얻었고, 돈 쓸 데가 없었던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는 에세이집에서 비치코머로 살아가며 얻은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과, 매일 천천히 걸으며 자연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얻어 나가는 발견의 즐거움을 들려주었다.

이 책을 처음 펼쳐 본 곳은 고향의 한 작은 서점에서였다. 그 때 나는 모 지방일간지의 잘나가던 정치부 기자를 그만두고, 숨어들듯 고향을 찾았다. 몇 년만 더 지냈더라면, 어쩌면 신문사 내에서 가장 빨리 편집국장이 되고 논설위원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방일간지 기자는 그 자신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왕도 될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많은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문사를 떠났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다시 펼쳐 보니, 책 갈피갈피마다 진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 시절 내 선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다. 신문사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고, 부모님은 말씀은 안 하셨지만 다시 복귀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정동진으로 가는 7번국도 입구, 등명燈明이라는 마을의 바닷가 언덕에 차를 세워 놓고,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멀리서 새로운 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도 등명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 지금 나의 은사스님이 된 한 노스님과 인연이 닿아 강원도의 절로 들어갔다. 나의 직업은 절에서 나오는 작은 책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산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여러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스님들의 일과 절의 행사를 소개하고, 노스님을 시봉하며 잔신부름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삶이 당시 내 생활이었다.

산중 생활을 하며 나는 비로소 혼자인 삶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혼자 있다는 것이 꼭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오히려 그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너무 많이 가지려 했던 것이 혼자인 시간을 다 빼앗아 갔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내 방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책 몇 권만이 뎅그라니 놓여 있었으나, 나는 너무나 풍족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아껴 먹는 훈련을 했다. 아끼면 아낄수록 자연은 더 가까이 다가와 품에 안겼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이따금 읽고 싶은 책을 한보따리씩 싸들고 비싼 호텔로 찾아간다고 한다. 그는 거기에서 두 발을 쭉 뻗고 천천히, 야금야금 책을 먹고 온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그 포식으로 한동안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작가의 행동을 호사취미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비록 금전적으로 비싼 대가를 치르지만, 그는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을 구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모두가 비치코머가 될 수는 없다. 또한 모두가 산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노스님은 '버린다', '비운다'라는 말을 싫어하셨다. 스님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대번에 '미친놈'이라고 일갈하셨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존재라고 설파하셨다. 이따금 우스갯소리로 "난 '동물의 왕국' 삼 년 보고 해탈했어. 거기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스님은 또한 대부분의 인간 행동은 자신의 목숨을 도모하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이 제 입으로 '비웠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그물에 걸린 미망迷妄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계하시곤 했다.

스님은 대신에 만물을 소중히 하라고 가르치셨다. 수박 한 조각을 먹을 때도, 그 수박 한 조각이 내 몸에 들어오기까지 거쳐 온 수많은 자연과 인간의 공력을 떠올리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햇빛과 바람과 거름이 있고, 그것을 피땀 흘려 기른 농부와 그것을 인내한 농부의 가족, 그리고 그것을 나른 인부들의 공력과 산중의 외딴 절로 선물한 분들의 정성이 알알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을 헛되이 쓰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우려고 애쓰기보다, 소중히 하려고 애쓰면 쓸데없는 욕망은 저저로 비워진다는 것이 스님이 전하려고 하는 가르침이었다.

젊은 시절의 스님을 뵌 적이 있었던 한 스님에 따르면, 노스님은 당시 아무도 입지 않는 삼베팬티를 계속 입고 다녔다고 한다. 삼베팬티는 아무리 비벼 빨아도 쉽게 헤어지지 않지만, 피부에 닿으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아무도 입고 다니지 않았으나, 스님은 줄곧 삼베팬티를 고집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스님을 생각하면 삼베팬티부터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라는 스님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젊은 놈이 머리도 깎지 않고 산중에 오래 있으면 뒷날 세속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하산을 명하셨다. 지금의 내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멀리 잠실운동장이 보이고, 사방으로 높이 솟아 있는 빌딩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송보송하던 풀도, 포도송이 같던 별들도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늘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려고 애쓴다.

이 세상에 똑같은 날들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한강 저쪽에서 석양이 넘어가고 있다. 키가 큰 한 빌딩이 그 석양을 정면으로 받아 붉게 빛나고 있다. 나는 그 빌딩이 임신을 했다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다른 나라에 있는 어느 한적한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한 비치코머도 지금 저 석양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을 이어가 본다. 그러면 어느새 내가 비치코머리처드가 되어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고 만다. 발견과 상상의 즐거움이 이 세상의 덧없는 욕망들을 잠재우고, 비우게 한다.

리처드 보드는 모래 위에 떨어진 것을 찾으며 명상하는 숱한 나날을 보낸 끝에 '우리는 어느 것을 볼 태세를 갖추었을 때, 볼 준비를 갖춘 그것만을 보고 사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치코머가 되기까지 그가 버리고, 비운 많은 것들은 결국 그가 원하는 발견과 상상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빌딩숲 속에서 발견과 상상의 즐거움으로 충만한 비치코머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노스님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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