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아름다운 순간들
[젊은시인과 노스님] 아름다운 순간들
  • 이홍섭
  • 승인 2006.07.18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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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다 빛과 함께 있었다. 그 환하고, 아름답고, 애틋하던 빛의 향연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리.

그러나 문제는 그 빛 속의 아름다움이 그때 그 순간보다 늘 늦게 인식된다는 데 있다. 어쩌면 삶의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빛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 순간의 빛을 죽을 때까지 이어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이 슬픔과 비애를 낳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삶에서 세 개의 빛, 아니 세 개의 빛이 만들어 낸 세상을 늘 간직하고 있다. 하나의 빛은 바다와 함께 있고, 다른 두 개의 빛은 깊은 산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 중 바다와 함께 한 빛은 내 청춘의 빛이다. 고향 강릉에서 사춘기와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있어 바다는 빛의 바다였다. 해가 뜨기 전 어슴프레한 박명薄明의 강둑 위를 자전거로 달려가면 거기에 동해바다가 있었다. 경포, 강문, 송정, 안목, 사천 등 제각기 다른 풍경을 간직한 바다가 해를 기다리며 거기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아침해는 늘 숨막힌 기다림 끝에 불쑥 솟아올랐다. 해가 뜨기 전,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서성이며 해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해가 뜨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굴러가지 않을 것만 같은 조바심과 조급함으로 모래밭 위를 이리저리 쏘다니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교묘한 정적이 좋았다. 나는 정적 속에서 그 어떤 설렘, 그 어떤 삶의 비의秘意를 느끼곤 했다. 박명도 빛의 세계였다. 단지 그 박명을 흩뿌리는 해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설렘, 비의, 정적이 만들어 내는 묘한 공간 속으로 천천히 자전거를 밀고 가면서 나의 사춘기는 시작되었다.

해가 불쑥 솟아오르면 바닷가는 갑자기 분주해진다. 해가 뜨기 전에는 사람들과 함께 모래밭 위를 서성이던 갈매기들도 힘차게 날아오르고, 숨죽이던 섬들도 어깨를 펴고 제자리를 잡는다. 해변에 인접한 여인숙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은, 창을 열고 찾아오는 아침 햇살의 등쌀에 못 이겨 눈을 비비며 바닷가로 나선다.

얼마 전 느닷없이 아침해가 보고 싶어 고향바다를 찾았다. 밤새 뒤척이다 맞이한 아침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바다를 떠나고 나자 가장 먼저 그리워지는 것이 아침해였다. 아니 아침해가 불쑥 떠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한 상징이었다. 그 차오르는 긴장과 이글거리는 절정, 그리고 세상을 단순에 지배하는 환함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바다와 함께 이십대 청춘의 대학 시절을 보냈다. 학교보다 바다를 먼저 찾았던 그 시절, 나의 노트에는 지금도 빛과 파도와 소금이 간직되어 있다. 투명한 광기로 헤매던 정오의 바닷가와 오징어배 불빛을 쫓아 어두운 바다로 뛰어들던 기억은 차마 쓰지 않기로 한다. 그 기억조차도 빛 속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두 개의 빛이 간직된 곳은 내설악 깊은 산중이다. 나는 그 곳의 한 산사山寺에서 삼십대 초반을 보냈다. 비승비속의 삶이었다. 산속의 빛은 빨리도 찾아와서 빨리도 졌다. 맑고 투명한 빛 속에서 나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잠자리 날개 같은 덧없음으로 산속을 헤매곤 했다.

내설악의 자연은 온전했다. 수면과 나뭇잎에 찰랑대던 빛의 물결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빛 속에서 무엇인가를 치유받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빛들은 내 몸 속에 들어와 마음속에 쌓여 있던 미움과 독기를 녹여 버렸다. 나는 그때 빛이 인간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빛이 자연의 빛을 닮아 갈 때, 자연의 빛에 가까이 갈 때 많은 병이 치유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처럼 점심공양을 마치고 산사의 뒤편 오솔길을 걷다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원禪院에 닿았다. 개원을 앞두고 있는 그 선원은 대팻자국과 나무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곳은 얼마 뒤면 전국에서 모여드는 운수납자들이 방문을 닫아걸고 긴 침묵과 대결할 곳이었다.

그날, 그 선원 앞마당에는 눈부신 빛이 가득 내려와 있었다. 거짓없고, 맑은 빛이었다. 나는 순간, 그 빛에 도취되었다. 그 따뜻함, 그 안온함, 그 나름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끌리듯 그 선원의 마루에 올라가 길게 누워 버렸다. 그리고 이내 수술을 끝낸 환자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던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달콤하고 나른한 잠을 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떴을 때 산속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자연과 하나된 듯한 충일에 싸여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다. 발 아래 풀들은 마치 보송보송한 솜털과 같았고, 물소리는 생음악으로 들려왔다. 거짓없고, 맑은 빛이 준 선물이었다.

산사를 떠난 이후, 도시 속에 살며 이따금 맑은 햇살을 만날 때면 그때 그 순간이 환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막 벗겨 놓은 나무의 속살과 향긋하던 냄새, 그리고 그 위를 비추던 맑은 햇살이 금새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면 이내 쓸씀함이 밀려온다. 앞으로의 생에서 그처럼 맛있고, 그처럼 나른한 잠을 다시 자 볼 수 있을까.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또 다른 빛의 세계도 그 깊은 산중에서 만났다. 그 빛의 세계는 반딧불이 뿜어내던 향연이었다. 지금 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유년 시절을 강원도 산골에서 보냈던 나에게 반딧불은 유년 시절을 환하게 비춘 빛으로 남아 있다. 나는 반딧불을 잡아 눈썹에 붙이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커다란 벚나무 위에 숨어 친구들을 놀래키곤 했다. 어두운 운동장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반딧불의 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춤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반딧불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반딧불은 도시의 오염, 인간의 오염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반딧불이야말로 환경오염의 정도를 가장 극명하게 재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오염된 공기, 오염된 물 속에서 빛은 그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빛의 세계, 빛의 춤을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그 깊은 산중에서 실로 오랜만에 반딧불을 만난 것이다. 반딧불은 두 마리였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두 마리 반딧불은 강을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산중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만난 반딧불 두 마리는 나를 순식간에 유년 시절로 데려갔다. 마치 내가 두 눈 위에 반딧불을 붙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절을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 서로 간격을 유지하며 너울너울 날아다녔다. 그 춤을 몰래 즐기고 있으니 유년 시절처럼 행복하고 풍요로워졌다. 반딧불은 행복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돌이켜 보면, 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다 빛과 함께 있었다. 어느 순간 그 빛과 마주칠 때면 행복해지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빛은 순간이지만 또한 영원이기도 하다. 그 빛의 숙명이 우리네 삶의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빛의 명멸明滅은 곧 삶의 명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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