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내 마음속의 스승, 경허스님
[젊은시인과 노스님] 내 마음속의 스승, 경허스님
  • 이기창
  • 승인 2006.05.2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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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충청남도의 서산, 홍성 일대를 돌며 천장사, 수덕사, 개심사를 다녀왔다. 경허 스님의 행적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달에는 스님이 확철대오한 계룡산 동학사를, 그리고 그 전달에는 아홉 살의 나이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입산한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를 다녀왔다. 나는 그때마다 스님의 체취를 느껴 보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고, 심지어 공기 냄새까지도 맡으려고 킁킁거렸다. 이 모든 노력은, 어느덧 내 마음속의 스승으로 자리잡은 경허 스님의 인간적 모습을 온전히 복원해 보고 싶은 무모한 열망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내가 경허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어쩌다 인연이 닿아 비승비속으로 절집 생활을 할 때였다. 절집과 인연을 맺게 해 준 노스님을 시봉하며, 강원도 일대의 사찰 소식을 담은 조그만 책자를 만들던 나는 당시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허감에 빠져 있었다. 그 공허는 도저한 허무와 같은 것이어서 설명할 수도,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치 커다란 늪과 같아서 허우적대는 나를 끌고 자꾸만 어디론가 깊이 빠져들어갔다.

사실 그 공허감의 뿌리는 사춘기와 닿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가족 중 한 분의 갑작스런 자살 시도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만난 최초의 죽음이었다. 다행히 그분은 살아나셨지만, 그 분의 자살 시도는 나를 허공 위에 붕 띄워 놓았다. 나는 한동안 땅 위를 걷지 못했다. 땅에 닿으려 했지만, 발이 지상에 닿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였다. 나는 그 공황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했다. 만약 똑같은 상황을 나이 들어 겪었다면 아마 지금쯤 운수납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다를 따라 무작정 걷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지상에 발이 닿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때 겪은 공허감은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면 삶이 그렇게 모순되어 보일 수 없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일상이 한순간에 붕괴되곤 했다. 나는 그 공허감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세속에서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것이라곤 시를 쓰거나,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강백으로 이름을 날리던 경허 스님이 동학사 조실방의 문을 닫아 걸고 처절한 수행에 들어간 것도 이 같은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하고 난 뒤였다. 환속한 옛 스승을 뵈러 한양으로 향하던 중 콜레라가 창궐한 마을에서 만난 숱한 주검들 앞에서, 경허 스님은 그동안 문자로 배웠던 알음알이들이 모두 쓸모없음을 경험했다. 팔만대장경도 그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경허 스님이 송곳을 턱 밑에 대고 각고의 수행에 들어간 것은 이처럼 생사에 대한 처절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때 보아도 마음을 쓸어내리는 스님의 참선곡參禪曲은 이때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모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나는 스님의 시들과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각종 자료들을 구해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그 위안은 삶의 온갖 풍파를 겪은 어른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위안을 받으며 점점 스님께 빠져들었다.

스님은 선불교의 중흥조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스님의 행적은 한 인간이 태어나 겪을 수 있는 최대치의 삶을 보여 주었고, 스님의 글은 굴곡 많은 우리네 삶의 한 극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님의 시는 때로는 천하를 호령할 듯 호방하지만, 때로는 나그네처럼 외롭기 짝이 없다. 천하를 호령할 때는 부처가 와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외로움으로 가득 찰 때는 떨어지는 나뭇잎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를 정도이다.

바람이 서리 묻은 잎을 떨어뜨리네
떨어지는 잎 다시 바람에 날아가네
어쩔거나 이 마음 맡길 데 없어
잎비 속에 길을 잃고 헤매이나니

스님들이 들으면 죽비를 들고 쫓아올 일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스님을 흠모하는 것은 대선사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처럼 삶의 모순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인간 경허'의 모습이다. 그것을 일러 불가에서는 '무애행'이라 부르지만, 나는 '도저한 허무'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허 스님이 제가 한암 스님에게 준 전별송의 맨 앞머리는 스님 스스로 '인간 경허'의 모습을 가장 잘 축약해 놓은 명문장이다.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여태껏 이 구절처럼 한 인간이 삶의 바닥을 치는 자신의 모습을 진솔하고도 절절하게 그려 낸 것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산중 생활을 접고 도시 속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에도 경허 스님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스님의 가르침과 몸소 보여 준 삶의 행적은 그만큼 경계가 없었다. 스님은 성聖과 속俗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는 그 둘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글과 행적을 좇아가다 보면 스님이 이 인간 삶의 모순을 온몸으로 껴안고 가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이 터질 듯 팽창할 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술과 드라마틱한 기행奇行이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경허 스님의 말년은 무엇인가 채워나가기보다, 끊임없이 소진해간 삶, 하나라도 더 비워 나간 삶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남쪽의 사찰을 두루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며 제자를 만나고, 한때 거처했던 절들을 다시 둘러보는 스님의 발걸음은 마치 날개를 펴고 땅 밑을 굽어보며 유유히 날아가는 큰 새와 같다.

경허 스님은 마침내 큰스님으로서의 명예와 권위를 모두 떨쳐버리고 이름 없는 시골 훈장으로 입적했다. 훗날 제자들이 다비를 위해 스님의 무덤을 열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스님의 법제자 만공 스님이 선물한 담뱃대와 쌈지뿐이었다. 참으로 스님다운 적멸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입산한 청계사로 갔을 때의 일이다. 때마치 청계사는 관세음보살상 뺨 위에 삼천 년 만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가 피어났다고 법석이었다. 여러 언론사에서 온 차량들도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경내에는 경허 스님이 이곳에서 입산해 일평생 어떠어떠한 가르침을 남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참 쓸쓸한 일이었다.

나는 설혹 그 '우담바라'가 삼천 년 만에 한번씩 핀다는 그 '우담바라'라 하여도, '바람 속의 등불'과 같은 삶을 온몸으로 헤쳐 나간 경허 스님이 장작 패고, 물을 길었던 곳이 어디인가를 먼저 찾아가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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