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오대산의 학 한암중원
[한국의 선지식] 오대산의 학 한암중원
  • 이기창
  • 승인 2006.05.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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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기세가 내리막길을 걷던 1942년, 경무국장 이케다(池田 淸)가 총독부와 업무협의 차 현해탄을 건너온 길에 오대산의 한암을 찾았다. 한암을 설득, 불교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속셈이었다. 이케다는 절을 올리기가 무섭게 한암의 속내를 떠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한암 곁의 시자들 얼굴은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덫을 놓은 이케다의 표정도 심각했다. 일제가 이긴다고 하면 아첨의 말이 될 것이고, 진다고 하면 앞으로 닥칠 핍박과 수난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안을 꽉 채웠다. 한암은 그러나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결코 임기응변의 답이 아니었다. 이케다는 말문이 막혔다. 이 한 마디에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산문을 나왔다. 백척간두(百尺竿頭), 한암의 상황이 그랬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한걸음 더 나아가 벼랑아래로 몸을 던질 줄이야. 한암의 힘이었다. 고려의 나옹(懶翁)은 수행의 한 극점을 현애살수(懸崖撒手)로 표현했다.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손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한암의 힘은 바로 그런 수행에서 나온 것이리라.

한암이 말한 덕은 정의까지 포함한다. 덕은 한암의 오도적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덕은 불교적 언어로 무위심(無爲心)이다. 한암을 연구해온 김호성(金浩星) 동국대교수는 “삶의 괴로운 현실은 부덕에서 비롯되며 덕을 베풀 때 세상은 바로 선다. 사람들이 자비를 실천할 줄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위심(有爲心ㆍ차별 또는 인연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비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무위심을 닦으면 자비심의 발로는 저절로 이뤄진다는 게 불교적 사유다”고 말한다. 한암선의 특징을 무위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암중원(漢岩重遠ㆍ1876~1951), 그를 사문의 길로 이끈 단초는 ‘반고씨(盤古氏)’였다. 부친은 한학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9세 때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읽던 중 ‘태고에 반고씨가 있었다’는 구절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의문을 간직한 채 성장한 그는 21세 때 금강산 유람에 나선다. 그리고 삭발을 결심한다.

금강산 장안사 행름(行凜)에게 출가한 그는 3번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을 밟는다. 출가하던 해 신계사에서 보조(普照)의 수심결을 읽다가 초견성(初見性)의 법열을 맛본다. 한암은 이후 경허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경허는 바람이었다. 숨바꼭질 하듯 경허를 찾아 전국을 떠돈지 2년 만에 경북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극적인 첫 대면을 한다. 한암은 어느날 경허의 금강경 설법을 듣게 된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비상(非相)이라고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이 구절을 듣고 “안광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훤히 들여다보였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나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고 한암은 두 번째 깨달음의 순간을 적었다. 경허는 “한암이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인가한다.

‘남 만공(南 滿空) 북 한암(北 漢岩).’ 경허의 소멸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간 둘의 위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만공은 충남 수덕사, 한암은 강원 상원사를 중심으로 일방의 종주가 됐다. 경허선의 세계에서 둘의 위치는 각별하다. 무엇보다 한암은 스승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지성과 안목이 탁월했다.

수제자 만공이 1930년 스승의 생애를 정리하는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의 집필을 한암에게 맡긴 이유도 다 그런데 있다. 경허는 1900년 겨울 해인사에서 한암과 해후, 한철을 함께 보낸 뒤 전별송을 짓는다. 경허는 이 무렵부터 잠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허는 전별송에서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고 적고 시 한수를 덧붙인다. 성행이 질박하고 학문이 고명한 후학을 만난 스승으로서의 기쁨과 애정의 표시였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의 날개 같은 포부(捲將窮髮垂天翼ㆍ권장궁발수천익)

변변찮은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謾向槍楡且幾時ㆍ만향창유차기시)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 게 없지만(分離尙矣非難事ㆍ분리상의비난사)

뜬 세상 흩어지면 또 다시 언제 보랴(所慮浮生杳後期ㆍ소려부생묘후기)

스승의 심정을 헤아린 한암도 답시를 쓴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霜菊雪梅纔過了ㆍ상국설매재과료)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如何承侍不多時ㆍ여하승시부다시)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萬古光明心月在ㆍ만고광명심월재)

뜬 세상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更何浮世謾留期ㆍ갱하부세만유기)

한암은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보림을 하다 계오(契悟ㆍ깊은 깨달음)를 이룬다. 서른 넷의 나이였다.

“스님은 오도송에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이로 좇아 옛길이 인연 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 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글 끝의 ‘岩下泉鳴不濕聲(암하천명불습성)’이 어떻게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네 뜻이 아닌 고로 조사의 뜻이니라.”

“스님께서 속서에 능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수행인이라고 잘못 부를 뻔했구나.”

한암이 상원사에서 수좌 운봉(雲峰)과 나눈 법담이다. 비수를 품은 듯한 험구의 교환이다. 운봉이 조실 한암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자 한암은 “이 밥도적아”하는 투로 맞받아친다. 한암은 제자들의 파격적인 도전도 마다 않고 수용, 저마다 근기에 맞게 지도했다. 그의 문하에서 효봉(曉峰) 탄허(呑虛) 동산(東山) 보문(普門) 등 숱한 거목들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경봉(鏡峯)과 는 서로 호형 호제하며 깊이 사귀었다.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 한암이 봉은사 조실 자리를 털고 상원사로 들어가면서 시자 용명(龍溟)에게 들려준 말이다. 한암은 다시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간 것이다. 한암은 1941년 조계종의 첫 종정에 추대된다. 31본산 주지들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총본산을 두기로 결정한다.

종명(宗名)은 권상로 등 당대 석학들에 의뢰, 조계종으로 정했다. 한암은 “중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 하였거늘 나 같은 늙은 중에게 감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명리에 초연한 수행자였다.

● 연보

▲ 1876.3.27 강원 화천출생, 속성은 온양 방(方)씨,
법호 한암, 속명 중암
▲ 1897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 수심결 읽다 1차 개오
▲ 1899 성주 수도암에서 경허의 설법 듣고 2차 개오
▲ 1910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3차 개오
▲ 1926 오대산 상원사 주석
▲ 1931 경허의 행장 편찬
▲ 1941.6.4 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받아 광복 때까지 역임
▲ 1951.3.22 세수 75, 법랍 54세로 좌탈입망
▲ 1990 한암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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