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과 노스님] 노스님이 만든 꽃밭
[젊은 시인과 노스님] 노스님이 만든 꽃밭
  • 이홍섭
  • 승인 2006.03.28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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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시간 있냐?"

노스님이 전화를 하실 때에는 두 가지 톤과 음색이 있다. 공적인 일일때는 호랭이와 같고, 사적인 일일 때는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이다. '시간 있냐?'라고 시작하면 분명 사적인 일, 조금 외로우실 때이다. 나는 이럴 때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잘만 하면 스님이 손수 만드시는 박작장(막장을 오래 끓여 졸인 장)에 밥을 비벼 먹을 수도 있고, 스님과 세상사 얘기로 긴긴밤을 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머무시는 숙소에 도착했을 때 스님은 통화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통화 내용이 조금 특이했다. 그냥 사람 이름과 직위를 줄줄 얘기하시는 것이었다. 대통령만 빼고는 당신과 인연이 닿았던 이른바 고관대작들의 이름을 잇달아 부르신 뒤 상대방에게 재차 확인을 하셨다. 전화를 끊기 직전 스님은 마지막으로 저쪽 상대방에게 말씀하셨다. "돈은 내가 다 보낼 터이니, 그분들에게는 알리지 마라. 알았제. 니가 고생이 많다. 어쩌겠냐, 니가 집안의 장손인데. 알았제."

스님은 주섬주섬 가사장삼을 챙기더니 "오늘은 좀 먼 길이다. 괜찮제. 택시 불러 놨다.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스님과 택시에 올랐다. 택시기사는 뭐가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이다. "시님, 먼 길인데 편안하게 쉬십시오. 출발하겠습니다." 아마도 이번 길로 하루벌이를 다하는 모양이었다.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스님의 고향 마을이었다. 스님을 모신 십여 년 동안 나는 스님에게서 고향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출가자에게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자신이 머리를 처음 깎은 출가절이라는 게 불가의 오랜 전통이다. 스님들은 서로에게 고향을 묻지 않는다. 출가절을 묻거나, 은사를 묻는 게 고작이다. 태를 묻은 고향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으랴만, 출가(出家)라는 한자 속에 이미 집을, 고향을 떠난다는 비정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스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아흔을 넘기신 스님의 모친은 장수를 하셨다. 속가라면 호상이라고 해야겠지만, 집을 떠난 출가자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언젠가 노스님의 모친 얘기를 젊은 스님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모친이 물어물어 아들을 찾아왔으나, 그 아들은 상좌에게 어머니를 잘 대접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는 슬픈 얘기였다. 언젠가 스님께 여쭈어 보리라 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한 터였다.

스님은 고향 변두리의 한 작은 여관을 잡았다. 그리고 짐을 풀었다. 다음 날이 발인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장조카에게 시켰제.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꽃으로 덮으라고. 장례식장이 꽃밭이었을 거라. 내가 어머니 속을 참 많이 썩여드렸다. 너는 효도해라" 나는 비로소 길 떠나기 전 하시던 통화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덧붙이셨다. "시골에서는 화환이 많은 게 제일이라. 아마도 어머니가 모셔진 병원에서는 자식이 대단한 고관대작쯤이라도 되는지 알았을 끼다. 세상사란 것이 그런 거다. 저 세상 가시는 날까지 화환 하나없이 쓸쓸해서야 되겠냐. 알겠제......"

발인날 아침 나는 서둘러 스님 방을 찾았다. 스님은 가사장삼을 갖춰 입으셨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으셨다. "가서 친척들과 울고불고 하면 뭐하겠노. 니가 가서 보고 와라." 나는 스님께서 몰래 연락한 친척 두 분과 함께 장지가 있는 고향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사과밭이 유난히 많은 골짜기 마을이었다. 발인장에는 장지로 함께 떠날 두 개의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스님과 인연이 깊은 총리 출신 인사와 총무원장 스님 명의의 화환이었다. 그 두개의 화환을 보자 장례식장을 덮었을 꽃밭이 상상이 갔다.

장지까지 따라가 마무리까지 보고 여관으로 돌아와 스님께 말씀드렸다. "마을 입구 훤한 자리에 묻히셨습니다. 참 좋은 자리던데요." 나는 묘소의 위치를 상세히 말씀드렸다. "그래. 해가 잘 들어야 할 텐데. 맞은편에 사과밭이 많지? 예전부터 사과가 많이 나던 마을이었지. 참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스님은 이틀 동안 음식에 입을 대지 않은 채였다. 스님은 끝내 고향 마을에 들르지 않고 발길을 돌리셨다.

얼마 뒤 나는 할머니 상을 당했다. 어릴 때부터 나와 형제들을 키워 주신 할머니였다. 서른 무렵에 할아버지를 먼저 보낸 뒤 평생 수절하며 외롭게 사신 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평생을 시골 학교만 전전하며 교사 생활을 하신 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하나 둘 강릉 시내에서 홀로 사시던 할머니 밑으로 보내졌다. 외로웠던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으셨다. 형제들은 그만큼 말이 적어졌다. 그런 할머니를 이해한 건 나이들어서였다.

할머니가 모셔진 병원의 장례식장에는 화환이 적었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꽃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여러 개의 화환을 주문했다. 물론 화환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나는 꽃밭 앞에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가 이 세상 마지막 머무시는 곳으 꽃밭으로 꾸미신 노스님의 마음이 더욱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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