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천진불 혜월
[한국의 선지식] 천진불 혜월
  • 이기창
  • 승인 2006.02.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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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나눔의 법륜 굴리며 '무애의 자유'를

“큰스님, 제발 그 논을 파시지요.”
“절 식구들이 먹을 양식이 나오는 논인데 내 마음대로 팔 수 있는가.”

혜월의 욕심 없는 마음을 눈치챈 사하촌 주민들은 틈만 나면 졸라댔다.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혜월은 앞장서서 절 소유의 묵정밭을 개간해 옥답으로 바꿔놓았다. 비록 서 마지기에 불과했지만 그 논은 절 살림에 아주 요긴했다. 그러나 혜월은 주민들의 거듭된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논을 팔았다.

그들의 곤궁한 삶을 헤아려 거저 주다시피 헐값에 넘겼다. 논 판 돈을 건네 받은 제자는 사기를 당했다고 분해했다. 그러자 혜월은 “무슨 사기를 당했다는 게냐. 논 서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논 판 돈이 있으니 오히려 논이 여섯 마지기로 늘어나지 않았느냐”고 태연히 말했다.

속세의 개념으로 볼 때 논의 법적 소유권은 바뀌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논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논이 그 자리에 있는데다 논 판 돈마저 생겼으니 여섯 마지기가 되었다고 짐짓 제자에게 말한 것이다.

“자네는 주막에서 주모와 한철을 지냈다더니 어땠나.”

“큰스님, 그 맛이란 한 철 내내 해보았지만 첫날밤 그 맛이던데요.”

스승 경허의 짓궂은 물음에 혜월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혜월은 서산 천장암에서 수행할 당시 해미의 한 주막에서 주모와 동거하며 한철을 보냈다. 자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혜월은 주모와 헤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상처도 주지 않았다.

그 이후 여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욕망과 집착의 쇠사슬을 끊은 혜월의 진면목을 말해주는 일화들이다. 사형인 수월처럼 혜월에 대한 기록도 지극히 단편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첨삭과 과장 등 윤색의 과정을 거쳤을 지라도 이런 이야기들은 혜월의 행장을 더듬어보는데 도움을 준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혜월혜명(慧月慧明ㆍ1861~1937)은 절집 안팎에서 천진불(天眞佛)로 불렸듯이 늘 어린아이의 심성을 잃지 않았다. 10세를 전후하여 일찍 불문에 귀의하는 것을 동진출가라고 한다. 동진은 어린아이의 천진한 심성을 일컫는다. 그래서 천진이 곧 부처이고 불성이라는 옛 조사들의 가르침이 나왔다.

혜월은 어쩌다 뭔가 생기더라도 귀천과 친소를 가리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모든 고통은 탐욕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한 순간 욕망을 일으키면 그 욕망에 속박당하게 마련이다. 욕망은 끝을 모른다. 욕망의 늪에는 늘 고통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구하는 것이 없다면 욕망은 감히 고개를 치켜들지 못한다.

바로 무소유의 자유이며 즐거움이다.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혜월은 무소유와 나눔의 법륜을 굴리며 무애의 자유를 누렸다. 파계사에 잠깐 머물던 시절이었다. 한밤중에 양식을 털어가던 밤손님은 누가 등을 슬그머니 밀어주자 기절초풍을 했다. 혜월은 밤손님이 뒤를 돌아보자 “아무 소리 말고 짐이나 지고 내려가게”라고 말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법정(法頂)스님은 무소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돼 있지만, 그 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혜월도 경허의 품에서 지혜의 꽃을 피웠다. 깨달음의 꽃망울은 수심결(修心訣)을 통해 맺어졌다. 참선과 마음 닦는 법을 가르친 수심결은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ㆍ1158~1210)의 저술인데 제자의 근기를 파악한 스승이 수행의 방편으로 점지해준 것이다. 경허는 제자를 인가하면서 미진함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혜월아, 도는 알고 모르는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혜월은 갑자기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어 곧바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그래 그래 좋다.” 경허도 제자의 춤에 맞장구를 치며 신명을 냈다. 반야의 문고리를 잡은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일체법을 통달해 깨달으면

자성에도 소유가 없나니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곧 비로자나불을 보리라

了知一體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1902년 늦은 봄 혜월이 경허에게 받은 전법게(傳法偈)다. 제자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만날 것이라는 스승의 예언대로 혜월은 무소유와 나눔을 중생제도의 지팡肩?삼았다.

혜월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상대로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겼다. 미나미 지로가 혜월의 명성을 전해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

“어떤 것이 불법의 진리입니까.”

“귀신의 방귀이니라.”

똑같은 질문을 한 양 무제에게 달마가 내뱉은 불식(不識ㆍ모른다)의 화두를 연상시키는 혜월의 답변이었다. 조선불교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던 미니미 지로에 대한 일침인 동시에 진정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허튼수작을 버리라는 경고였다.

당황한 그는 마음 속으로 괘씸하게 여기고 돌아갔다. 조선총독이 혜월의 방망이를 맞고 갔다는 과장된 소문이 일본에까지 퍼졌다. 한 일본군인이 분을 삭이지 못한 나머지 현해탄을 건너 왔다. 그는 구둣발로 방문을 차고 들어가 혜월의 목에 일본도를 들이댔다.

혜월은 흐트러짐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뒤편을 가리켰다. 당황한 그가 돌아서자 혜월은 일어서서 그의 등을 치며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외쳤다. 그 순간 잘못을 깨달은 그는 칼을 거두며 “과연, 큰스님이십니다” 는 말과 함께 절을 올린 뒤 돌아갔다고 한다. 혜월의 법을 이은 조계종 원로의원 진제(眞際)스님은 이 일화를 즐겨 인용, 제자들의 수행을 독려하곤 한다.

‘용성스님이 있는 곳엔 불경편찬이 있고, 만공스님이 있는 곳엔 중창불사가 있고, 혜월스님이 있는 곳엔 사전(寺田)개간이 있다’는 말처럼 혜월은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손에서 놓칠 않았다.

부산 안양암에서 만년을 보내던 혜월은 솔방울을 줍기 위해 늘 하던 대로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솔방울을 반 자루쯤 채울 즈음에 혜월은 이승과의 이별을 감지했다. 그리고 자루를 짊어진 자세로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삶을 마감했다.

■ 연보

▦1861 충남 서산 출생, 속성은 신 (申)씨, 혜월은 법호 혜명은 법명

▦1872 예산 정혜사에서 출가, 이후 경허 문하에서 수행

▦1884 수심결에 대한 경허의 가르침을 듣고 대오

▦1902 경허로부터 전법게 받음

▦1908~20 도리사 통도사 내원사 등에서 선풍을 일으킴

▦1921 부산 선암사에 주석

▦1937 부산 안양암에서 세수 76, 법랍 65세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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