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3.2013년 조계종-조불련 프로젝트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3.2013년 조계종-조불련 프로젝트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1.3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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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진출을 논하다”

평양은 북조선의 심장이다. ‘혁명의 수도’라 불리는 평양에서 정치와 군사 등 모든 권력과 통제가 이루어진다.

인구 300만 명으로 관리되는 평양은 6.25 전쟁 후, 새로 건설한 신도시다. 1950년 11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공군 출격계획을 설명하며 “불행히도 이(북측) 구역은 사막화될 것”이라 했다. 당시 미국 측이 “조선은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라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다. 전쟁을 일으킨 대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민중들이 겪은 고통은 처참했다.

그때 유엔군은 1952년 7월 교착상태의 휴전회담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항공압박작전’을 전역에 펼쳤다. 일명 ‘프레셔펌프작전’이라 명명된 세 차례 평양 대공습은 멀쩡한 건물이 2채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90% 폭격해 원시 상태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태평양지역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북한 전역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라고 선언했다. 북조선의 초대 내각 외무상 박헌영은 1952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성명에서 “맥아더 사령부가 매일 조선의 도시와 촌락에 수백 톤의 폭탄을 투하해놓고, 짐승같이 뻔뻔스럽게도 이를 조선인에 대한 커다란 선행이라고 내세우고 있다며 분개했다.” 미 공군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 시민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미제의 잔인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오늘날까지 지속하는 반미의식의 근원적 배경이 됐다.

“한국전쟁은 반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반한(反韓)을 위한 전쟁이었다.”라는 미국의 존 할리데이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1984년)에 기록한 것처럼 북측 ⅔의 지역이 파괴됐다. 당시 북측의 22개 주요 도시 중 18개 도시는 미군 폭격으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한 것보다 더 높은 수치다. 완전히 파괴된 평양은 “폐허를 재건하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건의까지 나왔다.

그러나 초대 내각의 김일성 수상은 폐허 위에 수도 평양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구소련 모스크바 건축대학 출신의 김정희가 1951년과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만든 마스터플랜이 기틀이 됐다. 이와 함께 ‘내각 결정 제125호’(1953년)에 따라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기본 개념으로, 오늘날 평양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지금껏 알려진 김일성의 국가주석 겸 조선로동당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장 직함에 대한 추대는 공교롭게도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박정희가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날과 같다.

그동안 평양은 갈 수 없는 미지의 도시였다. 남북한 불교계는 전쟁과 분단 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 진출을 모색했다. 2013년 8월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의를 통해 ‘평양불교회관’ 건립사업을 구체화했다. 이는 1997년 12월 평양에서 조불련과 평불협이 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설립 합의와 운영이라는 비종교 부문의 첫 진출에 이어 두 번째 논의였다. 특히, 남측 평불협이 2008년 8월 평양시 중구역 영광거리에 설립한 ‘금강빵공장’에 이은 두 번째로 협력사업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중점 사안으로 제의된 남북불교 협력사업과 교류 부문에 대해 다시 알아본다.

평양 대동강 량각도국제호텔에서 본 평양의 저녁노을(2013년 9월). 사진: bing dun 페이스북.





평양역 앞 영광거리 선전물(2016.12.3.). 사진: Ledge Biscuit 페이스북.





1952년 전소된 평양 광법사 보광전(1937년 3월 후지타 료사쿠 촬영). 사진=연합뉴스(2012.9.21.)



평양의 역사적 파노라마

평양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도시를 처음 건설해 주목받은 곳이다.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루나’ 또는 ‘바라나’라고 불린 평양(平壤)은 부루나의 이두식 표기다. 다른 별칭은 버드나무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류경(柳京). 지상 101층에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 이름도, 조선 후기 평양을 거점으로 한 보부상을 유상(柳商)이라 불렀다. 또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393년 가을, 평양 광법사・중흥사・대왕사 등 9개 절을 건립한 광개토대왕은 사찰을 관공서로 오늘날 국정홍보처와 같이 활용했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427년에 도읍지 천도로 다시 주목받았다.

평양의 역사적 헤리티지는 광개토왕이 설계하고, 장수왕이 완성하며 시작됐다. 668년까지 고구려의 도읍지 장안이었다. 고려 때에는 주로 서경으로, 조선 시대에 평양이라 불렸다. 947년 고려 정종의 서경 천도론과 1136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의 서경 천도계획, 공민왕 때인 1367년 4월 신돈의 천도 건의를 비롯해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은 풍경궁을 설치하고, 두 개의 도읍지(二京) 계획은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산됐다.

조선 후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평양을 ‘조선 팔도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묘사했다. 1980년대 말, 평양을 방문한 중국 건축가 왕슈는 평양을 ‘화원(花園) 도시’라고 찬탄했다고 전한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흐르는 ‘물의 도시’이다.

조선 말엽에 〈봉이 김선달〉 민담 속의 이야깃거리로 등장했다. 1906년 《황성신문》에 실린 〈신단공인〉 소설에는 봉이 김선달 실명으로 17세기 초, 평양 출신의 ‘김인홍’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평양 땅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 우물에도 석회 성분이 섞여 식수로 부적합하여 강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승려 굉연이 지은 《도선전(道詵傳)》에 “대동강물 속의 큰 닻 전설은 홍수가 잦아 피해 본 서경 사람들이 평양이 행주형이라서 대동강 물길에 쫓아 내려가고 있으니까. 닻을 내려 배를 붙들어 매어놓아야 한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연광정 아래 강물 속에 큰 닻을 빠뜨렸는데, 그 후로 큰 홍수가 없었다.”는 전설이 실려 전한다.

풍수지리적으로 평양은 짐을 가득 실을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 배의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으로 거대한 배 모양을 이룬다. 일설에는 호리병 모양, 연꽃봉우리와 비슷하다고 했다. 나말여초 시기에 유행한 도선국사의 비보책을 썼다. 또 평양성의 정문으로 국보유적 4호 대동문에는 서로 다르게 쓴 편액을 층마다 걸었다. 4세기에 건립된 대동문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파괴되었다가 1394년에 중층 문루로 새로 지어졌다. 강쪽으로 맨 위층엔 석봉 한호가 쓴 해서체, 아래층엔 봉래 양사언이 초서로 쓴 대동문 현판을 걸었다. 무지개문 머릿돌에는 여말선초의 박위 장군이 대동문이라 쓴 해서를 음각으로 새겼다. 도심 쪽으로는 17세기 초, 평양감사 박엽이 해서로 쓴 ‘읍호루’(挹灝樓, 문루에서 손 드리워 강물을 떠올릴 수 있는 누각) 하얀색의 글씨를 위층에 달았다. 시적인 표현을 넘어 강변에 지은 건물 특징을 제대로 활용한 이름이다. 1515년 중종 때 평안도관찰사 안윤덕이 중수하고 읍호루란 이름을 처음 붙였다. 그 아래층엔 한석봉이 쓴 대동문 검정 글씨의 편액을 내걸었다.

평양 유적에서 문(門)은 대동문, 누(樓)는 부벽루, 정(亭)은 연광정, 대(臺)는 을밀대가 꼽힌다. 국보유적 16호 연광정(鍊光亭)은 ‘햇살이 물결에 비단처럼 아른거린다’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산수정이었다. 이를 단조롭다고 생각한 어떤 이가 ‘온갖 풍광이 고루 비친다’는 뜻으로 만화정이라 했다가 지금의 이름을 달고 있다. 1528년 관찰사 허굉이 건립한 연광정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찾아와 그 경지를 보고 감탄해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란 글씨를 써 붙였다. 1637년 1월 병자호란 때 연광정에 들른 청나라 황제 태종이 글씨와 경치를 보고 천하를 뗀 ‘제일강산’ 현판만을 한동안 붙이게 했는데, 지금은 다른 글씨체의 천하와 원래의 제일강산을 덧붙인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국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청나라 심유경이 회담했던 연광정에는 여러 개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는데, ‘제일누대(第一樓臺)’를 비롯한 고려 중기 김황원의 미완성 시구 등이 남아 있다. 1998년 이곳을 방문했던 남측인사는 그의 책에서 평양의 대동강변 산책길이라 서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조상들은 ‘고단한 삶의 강앳길’ 또 대동강 물장수에게 ‘애환이 서린 고통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대동강변 길은 그 곁에 사는 이들에게 고난의 길이다.

대동문과 연광정 사이 종각에는 국보유물 23호 평양종이 걸려 있다. 1890년까지 시간을 알리고, 비상시에 타종했다. 1714년 평양에 북성을 쌓고 북장대를 세우면서 대동문 윗쪽 다락에 걸려 있던 종을 옮겨 달았다는데, 화재로 종이 소실돼 1726년 6월부터 4개월에 걸쳐 부벽루 서쪽 뜰, 영명사에서 주조 완성한 것이다. 높이 3.1m, 직경 1.6m, 무게 13.5t에 달하는 대종은 당시 평양성 백성들과 절에서 주철・생동・유기・쇠 등을 제공하고, 영명사의 승려 주조장인들이 만들었다.

묘향산 보현사 유점사종・조선중앙역사박물관의 금사사 범종과 함께 현존하는 평양종은 당시 객사인 대동관 앞에 종각을 짓고 달았다. 1804년에 화재로 종각이 불타면서 1805년 고쳐 지었다가 1827년 6월 24일 현 위치에 종각을 옮겨 세우고 종도 옮겨 달았다. 타종할 수 없는 개성 남대문루의 연복사종과 달리 평양종은 강원도 평창 상원사동종・경북 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충남 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종과 함께 한반도 5대 명종 가운데에서도 백성들이 유일하게 타종하는 범종이다. 전쟁으로 멈추었던 평양 종소리는 2001년부터 8.15 해방절 저물녘에 평양 시민들이 타종해 울리고 있다. 그러나 평양 범종을 타종한 외국인과 남측인사들은 아직 없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각 설경. 사진: 조선의 오늘(2021.12.18.)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로비, 남북불교회의(2013.8.19.). 사진: 민추본 홈페이지(2013.8.28.)





금강산 신계사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3.10.12.). 사진: 연합뉴스(2013.10.13.)



평양 입성, 미완의 이야기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로 다가온다고 한다. 2008년 8월과 11월 금강산・개성관광이 중단됐다. 조계종은 북녘으로 가는 길이 모두 멈춘 다음, 평양에로의 진출을 모색했다. 2013년 8월 18~19일 양일간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조계종 민추본과 북측 조불련이 남북불교 실무회담을 연 후, 세부실행 단계로까지 추진하지 못해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남북불교 교류의 확장성을 엿볼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조불련 리규룡 서기장을 단장으로 차금철 책임부원・한정철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위원장・김석철 신도위원이 참석한 실무회의에서는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종훈 집행위원장・성원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등 5명의 조계종 실무단과 평양시에 불교회관 건립에 관한 협의서를 체결했다. 일명 ‘JNK프로젝트’으로 불리는 이 협의서 4항에는 “(가칭)평양불교회관 건립사업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하며, 우선 조불련은 부지 및 건물확보를 위한 검토를, 조계종은 사업 시행의 타당성 검토 및 연구조사를 진행하기로 한다.”고 명시했다.

이런 논의는 2013년 3월 11~13일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단체 릴레이 회동에서도 제의돼 실무회의에서 협의됐다. 조계종 민추본은 같은 해 3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접견실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에게 전달한 ‘새 정부에 보내는 대북정책 건의서’에도 실었다. 이 건의서에는 “평양지역의 불교유적 발굴・복원을 추진하고 연계하여 보건복지시설을 포함한 (가칭)평양불교회관 건립, 내금강 불교유적 공동조사를 시작으로 북한 불교문화재 공동 전수조사 등을 추진하여 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2013년 8월 19일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담에서는 위 ④항을 비롯한 ① 금강산 신계사 낙성 6주년을 기념하여 남북합동 법회를 10월 13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봉행하기로 함. ② 서산대사 남북합동 다례재를 11월 19~22일까지 묘향산 보현사에서 봉행하기로 함. ③ 지난 수해로 인한 북측 피해가 상당한 것으로 확인했으며,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수해 지원을 적극 검토하기로 함. ⑤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북측 조불련 전국신도회간의 교류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0월 신계사 합동법회 시 남과 북의 신도회 대표단이 참석하고, 회동을 진행하기로 함. ⑥ 북측사찰 성지순례를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데에 따라 적극 추진하기로 함. ⑦ 북측 사찰문화재 공동 전수조사를 남북관계의 진전 상황을 보며 추후 논의하기로 함. ⑧ 위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협의를 위해 9월 중 개성에서 실무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 12일 오후 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 6돌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조불련 리규룡 서기장・차금철 부장・진각 신계사 주지・청학 표훈사 주지와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전영희 평양시 신도회 지도위원 등 30명이 참석하고,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조계종 정안 호법부장・법광 사회부장 등을 비롯한 진화 봉은사 주지 등 20여 명이 참가했다. 성원 사회국장과 혜안 책임부원의 공동사회로 진행된 이날 법회는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5번 타종으로 시작돼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남북측 참가자들이 헌향했다. 이어 리규룡 조불련 서기장의 개회사, 법광 조계종 사회부장의 복원 경과보고, 지홍 본부장의 봉행사, 남북공동 발원문 낭독, 기념촬영과 만세루에서 다과 순으로 진행됐다. 남측 이기흥 조계종 중앙신도회장과 북측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공동발원문을 통해 “통일조국, 현세 지상정토를 세우려는 남북 불자들의 서원이 원만 성취되도록 부처님의 가호와 가피가 있기를 발원”했다.

하지만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에서 열린 정례 법회 이외에 북녘 가는 길은 닫혔다. 쌍방의 잘잘못을 떠나 변화한 남북교류 환경에서 통일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의 물리적 공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 다음 편은 ‘2014년 남북공동의 만해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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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 량각도국제호텔에서 본 평양의 저녁노을(2013년 9월). 사진: bing dun 페이스북.
평양역 앞 영광거리 선전물(2016.12.3.). 사진: Ledge Biscuit 페이스북.
평양역 앞 영광거리 선전물(2016.12.3.). 사진: Ledge Biscuit 페이스북.
1952년 전소된 평양 광법사 보광전(1937년 3월 후지타 료사쿠 촬영). 사진=연합뉴스(2012.9.21.)
1952년 전소된 평양 광법사 보광전(1937년 3월 후지타 료사쿠 촬영). 사진=연합뉴스(2012.9.21.)

평양의 역사적 파노라마

평양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도시를 처음 건설해 주목받은 곳이다.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루나’ 또는 ‘바라나’라고 불린 평양(平壤)은 부루나의 이두식 표기다. 다른 별칭은 버드나무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류경(柳京). 지상 101층에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 이름도, 조선 후기 평양을 거점으로 한 보부상을 유상(柳商)이라 불렀다. 또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393년 가을, 평양 광법사・중흥사・대왕사 등 9개 절을 건립한 광개토대왕은 사찰을 관공서로 오늘날 국정홍보처와 같이 활용했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427년에 도읍지 천도로 다시 주목받았다.

평양의 역사적 헤리티지는 광개토왕이 설계하고, 장수왕이 완성하며 시작됐다. 668년까지 고구려의 도읍지 장안이었다. 고려 때에는 주로 서경으로, 조선 시대에 평양이라 불렸다. 947년 고려 정종의 서경 천도론과 1136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의 서경 천도계획, 공민왕 때인 1367년 4월 신돈의 천도 건의를 비롯해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은 풍경궁을 설치하고, 두 개의 도읍지(二京) 계획은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산됐다.

조선 후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평양을 ‘조선 팔도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묘사했다. 1980년대 말, 평양을 방문한 중국 건축가 왕슈는 평양을 ‘화원(花園) 도시’라고 찬탄했다고 전한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흐르는 ‘물의 도시’이다.

조선 말엽에 〈봉이 김선달〉 민담 속의 이야깃거리로 등장했다. 1906년 《황성신문》에 실린 〈신단공인〉 소설에는 봉이 김선달 실명으로 17세기 초, 평양 출신의 ‘김인홍’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평양 땅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 우물에도 석회 성분이 섞여 식수로 부적합하여 강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승려 굉연이 지은 《도선전(道詵傳)》에 “대동강물 속의 큰 닻 전설은 홍수가 잦아 피해 본 서경 사람들이 평양이 행주형이라서 대동강 물길에 쫓아 내려가고 있으니까. 닻을 내려 배를 붙들어 매어놓아야 한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연광정 아래 강물 속에 큰 닻을 빠뜨렸는데, 그 후로 큰 홍수가 없었다.”는 전설이 실려 전한다.

풍수지리적으로 평양은 짐을 가득 실을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 배의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으로 거대한 배 모양을 이룬다. 일설에는 호리병 모양, 연꽃봉우리와 비슷하다고 했다. 나말여초 시기에 유행한 도선국사의 비보책을 썼다. 또 평양성의 정문으로 국보유적 4호 대동문에는 서로 다르게 쓴 편액을 층마다 걸었다. 4세기에 건립된 대동문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파괴되었다가 1394년에 중층 문루로 새로 지어졌다. 강쪽으로 맨 위층엔 석봉 한호가 쓴 해서체, 아래층엔 봉래 양사언이 초서로 쓴 대동문 현판을 걸었다. 무지개문 머릿돌에는 여말선초의 박위 장군이 대동문이라 쓴 해서를 음각으로 새겼다. 도심 쪽으로는 17세기 초, 평양감사 박엽이 해서로 쓴 ‘읍호루’(挹灝樓, 문루에서 손 드리워 강물을 떠올릴 수 있는 누각) 하얀색의 글씨를 위층에 달았다. 시적인 표현을 넘어 강변에 지은 건물 특징을 제대로 활용한 이름이다. 1515년 중종 때 평안도관찰사 안윤덕이 중수하고 읍호루란 이름을 처음 붙였다. 그 아래층엔 한석봉이 쓴 대동문 검정 글씨의 편액을 내걸었다.

평양 유적에서 문(門)은 대동문, 누(樓)는 부벽루, 정(亭)은 연광정, 대(臺)는 을밀대가 꼽힌다. 국보유적 16호 연광정(鍊光亭)은 ‘햇살이 물결에 비단처럼 아른거린다’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산수정이었다. 이를 단조롭다고 생각한 어떤 이가 ‘온갖 풍광이 고루 비친다’는 뜻으로 만화정이라 했다가 지금의 이름을 달고 있다. 1528년 관찰사 허굉이 건립한 연광정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찾아와 그 경지를 보고 감탄해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란 글씨를 써 붙였다. 1637년 1월 병자호란 때 연광정에 들른 청나라 황제 태종이 글씨와 경치를 보고 천하를 뗀 ‘제일강산’ 현판만을 한동안 붙이게 했는데, 지금은 다른 글씨체의 천하와 원래의 제일강산을 덧붙인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국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청나라 심유경이 회담했던 연광정에는 여러 개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는데, ‘제일누대(第一樓臺)’를 비롯한 고려 중기 김황원의 미완성 시구 등이 남아 있다. 1998년 이곳을 방문했던 남측인사는 그의 책에서 평양의 대동강변 산책길이라 서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조상들은 ‘고단한 삶의 강앳길’ 또 대동강 물장수에게 ‘애환이 서린 고통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대동강변 길은 그 곁에 사는 이들에게 고난의 길이다.

대동문과 연광정 사이 종각에는 국보유물 23호 평양종이 걸려 있다. 1890년까지 시간을 알리고, 비상시에 타종했다. 1714년 평양에 북성을 쌓고 북장대를 세우면서 대동문 윗쪽 다락에 걸려 있던 종을 옮겨 달았다는데, 화재로 종이 소실돼 1726년 6월부터 4개월에 걸쳐 부벽루 서쪽 뜰, 영명사에서 주조 완성한 것이다. 높이 3.1m, 직경 1.6m, 무게 13.5t에 달하는 대종은 당시 평양성 백성들과 절에서 주철・생동・유기・쇠 등을 제공하고, 영명사의 승려 주조장인들이 만들었다.

묘향산 보현사 유점사종・조선중앙역사박물관의 금사사 범종과 함께 현존하는 평양종은 당시 객사인 대동관 앞에 종각을 짓고 달았다. 1804년에 화재로 종각이 불타면서 1805년 고쳐 지었다가 1827년 6월 24일 현 위치에 종각을 옮겨 세우고 종도 옮겨 달았다. 타종할 수 없는 개성 남대문루의 연복사종과 달리 평양종은 강원도 평창 상원사동종・경북 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충남 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종과 함께 한반도 5대 명종 가운데에서도 백성들이 유일하게 타종하는 범종이다. 전쟁으로 멈추었던 평양 종소리는 2001년부터 8.15 해방절 저물녘에 평양 시민들이 타종해 울리고 있다. 그러나 평양 범종을 타종한 외국인과 남측인사들은 아직 없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각 설경. 사진: 조선의 오늘(2021.12.18.)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각 설경. 사진: 조선의 오늘(2021.12.18.)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로비, 남북불교회의(2013.8.19.). 사진: 민추본 홈페이지(2013.8.28.)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 로비, 남북불교회의(2013.8.19.). 사진: 민추본 홈페이지(2013.8.28.)
금강산 신계사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3.10.12.). 사진: 연합뉴스(2013.10.13.)
금강산 신계사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13.10.12.). 사진: 연합뉴스(2013.10.13.)

평양 입성, 미완의 이야기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로 다가온다고 한다. 2008년 8월과 11월 금강산・개성관광이 중단됐다. 조계종은 북녘으로 가는 길이 모두 멈춘 다음, 평양에로의 진출을 모색했다. 2013년 8월 18~19일 양일간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조계종 민추본과 북측 조불련이 남북불교 실무회담을 연 후, 세부실행 단계로까지 추진하지 못해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남북불교 교류의 확장성을 엿볼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조불련 리규룡 서기장을 단장으로 차금철 책임부원・한정철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위원장・김석철 신도위원이 참석한 실무회의에서는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종훈 집행위원장・성원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등 5명의 조계종 실무단과 평양시에 불교회관 건립에 관한 협의서를 체결했다. 일명 ‘JNK프로젝트’으로 불리는 이 협의서 4항에는 “(가칭)평양불교회관 건립사업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하며, 우선 조불련은 부지 및 건물확보를 위한 검토를, 조계종은 사업 시행의 타당성 검토 및 연구조사를 진행하기로 한다.”고 명시했다.

이런 논의는 2013년 3월 11~13일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단체 릴레이 회동에서도 제의돼 실무회의에서 협의됐다. 조계종 민추본은 같은 해 3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접견실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에게 전달한 ‘새 정부에 보내는 대북정책 건의서’에도 실었다. 이 건의서에는 “평양지역의 불교유적 발굴・복원을 추진하고 연계하여 보건복지시설을 포함한 (가칭)평양불교회관 건립, 내금강 불교유적 공동조사를 시작으로 북한 불교문화재 공동 전수조사 등을 추진하여 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2013년 8월 19일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담에서는 위 ④항을 비롯한 ① 금강산 신계사 낙성 6주년을 기념하여 남북합동 법회를 10월 13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봉행하기로 함. ② 서산대사 남북합동 다례재를 11월 19~22일까지 묘향산 보현사에서 봉행하기로 함. ③ 지난 수해로 인한 북측 피해가 상당한 것으로 확인했으며,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수해 지원을 적극 검토하기로 함. ⑤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북측 조불련 전국신도회간의 교류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0월 신계사 합동법회 시 남과 북의 신도회 대표단이 참석하고, 회동을 진행하기로 함. ⑥ 북측사찰 성지순례를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데에 따라 적극 추진하기로 함. ⑦ 북측 사찰문화재 공동 전수조사를 남북관계의 진전 상황을 보며 추후 논의하기로 함. ⑧ 위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협의를 위해 9월 중 개성에서 실무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 12일 오후 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 6돌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조불련 리규룡 서기장・차금철 부장・진각 신계사 주지・청학 표훈사 주지와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전영희 평양시 신도회 지도위원 등 30명이 참석하고,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조계종 정안 호법부장・법광 사회부장 등을 비롯한 진화 봉은사 주지 등 20여 명이 참가했다. 성원 사회국장과 혜안 책임부원의 공동사회로 진행된 이날 법회는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5번 타종으로 시작돼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남북측 참가자들이 헌향했다. 이어 리규룡 조불련 서기장의 개회사, 법광 조계종 사회부장의 복원 경과보고, 지홍 본부장의 봉행사, 남북공동 발원문 낭독, 기념촬영과 만세루에서 다과 순으로 진행됐다. 남측 이기흥 조계종 중앙신도회장과 북측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공동발원문을 통해 “통일조국, 현세 지상정토를 세우려는 남북 불자들의 서원이 원만 성취되도록 부처님의 가호와 가피가 있기를 발원”했다.

하지만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에서 열린 정례 법회 이외에 북녘 가는 길은 닫혔다. 쌍방의 잘잘못을 떠나 변화한 남북교류 환경에서 통일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의 물리적 공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 다음 편은 ‘2014년 남북공동의 만해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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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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