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7. 내 사랑 내 조국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7. 내 사랑 내 조국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1.14 21:07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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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 많이 사는 한인 타운 살면 좀 좋아
외국 살면 없던 조국 사랑도 생겨난다고 했던가
한인 마켓 안 가고 주류 마켓인 수퍼스토아 코스코에 가도
한국제품 한두 개는 늘 눈에 뜨인다
어 이 만두 한국 거네
와 김을 박스로 사람들이 사가
김치도 사람들이 많이 사가
한국 물건을 보면 한국 사람 본 듯
반가워한다

코스코 입구에 떡 하니 진열된 삼성 그리고 엘지 가전제품에
어깨가 으쓱 살짝 올라간 듯 하다.
텔레비전에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세탁기까지
캐나다 시민권 가지고 캐나다 시민이라 말해도 비웃는 사람들보다야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만든 거라고 떠벌이는 것이 났지
가까운 중국 마켓가서도 눈에 확들어 오는
한국 과자며 화장품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 입만 들썩
짝사랑 같은 한국 사랑을 한다
축구를 해도 피겨 스케이팅을 해도
한국을 응원하다가도

자주 봐온 탓일까 붉은 단풍 캐나다 깃발도 자랑스러워
수십 년을 살아도 부르지 못하는 캐나다 국가
수십 년을 부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흥얼대는 애국가
귀국하면 외국인이라 한국인들 줄에 서지 못하고
삼성 제품 기아차만 쓴다고 놀림 받아도
어느새 한국 물건 자랑하고 있는 바보처럼.
 







 

#작가의 변
초기 이민 시절: 내가 한국을 떠나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95년 3월이었다. 1994년에 이미 영주권이 있는 여권을 받고도 캐나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면 영주권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짐을 먼저 배편으로 보내고 이민 가방 4개와 아직 분유를 먹고 있던 2살짜리 쌍둥이를 데리고 싱가폴 항공편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왔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제주도 가는 국내 비행기조차 타본 적 없이 덜컥 낯설고 물선 이국땅인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민국 심사를 하는데 캐나다 현지에 주소가 없다고 잡아 놓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시간 끌기를 2시간, 캐나다에 오면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사람이 나오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아파트 얻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도 주소도 없이 이민을 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결국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 랜딩 서비스 회사 사람의 신분 확인과 모텔에 묵으며 거주지를 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내보내 주었다. 일요일에 도착한 밴쿠버 공항은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우리 눈에 정말 자그마한 시골 공항으로 밖에 안 보였다. 도시에 차도 띠엄띠엄 다니고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공항 앞 사무실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랜딩 서비스 회사에서 초코 비스킷과 오렌지를 먹었는데 호텔에 근무하면서 오렌지며 초코 비스킷을 먹어 봤어도 오렌지 물도 많고 초코 비스킷도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 한인 타운이었던 킹스 웨이에 있는 모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들이 돌아갔다. 단독주택같은 모텔은 추웠고 침대는 어색했다. 한국에 전화하기 위해 공중 전화부스를 찾아 전화카드로 전화하고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 모텔이 낯설기만 했다. 다음 날 우리를 데리고 은행 구좌를 만들기 위해 다운타운 은행에 들려서 카드를 만들고 구경시켜준다고 노스밴쿠버로 갈 때 한국에서 지도로 달달 외운 거리를 읊으며, 다음엔 뭐가 나올 거고 하면서 겁도 없이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를 공항 근처인 리치몬드에 구하면서 마켓이 가까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조차 없던 막막한 이민 초기 모든 것이 낯설어 한국인만 보면 형제 같아 형님으로 모시자고 하던 랜딩 서비스 담당자와 싸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다. 짐이 도착하긴 했는데 한 컨테이너에 4가구의 짐이 들어 있었고 우리 짐은 밤 10시가 넘어서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이 도착하지 않아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을 먹던 우리를 보고 이웃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던 것도 한국인이었다. 가져온 분유가 떨어지고 짐은 오지 않고 도착하면 바로 받으려고 불편을 감수하고, 3달이나 먼저 짐을 보냈는데도 도착 못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얼굴을 붉히면 싫은 소리를 하고 한국의 운송회사에 전화해서 이삿짐 비용을 일부 빼고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마무리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거금이었던 800불의 거금을 주고 랜딩 서비스까지 맡아서 한 밴쿠버 현지 이삿짐 회사는 이민 가면 아무도 믿지 말라던 사람들 말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 야채가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아 한국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니 중년의 아줌마도 ‘예 반갑습니다’하고 대답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와이프를 툭 치며 “또, 아는 척 한다.’라고 말했다.

멋쩍게 돌아서면서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취직하기 위해 50통이 넘게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면접을 본 곳은 팬 퍼시픽 호탤 한 곳밖에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인사 담당자가 나를 따로 불러 이곳에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 경력이 있어야 취직이 가능하다고 귀뜸 해 주었다. 한 달 후에 한국에서 같은 호텔에 근무하던 친구가 이민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친구와 우리 4식구가 함께 한 달 정도 생활했을 때 친구가 자기 취직됐다고 밴쿠버로 나간다고 했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서 다음 달 800불도 안 되던 렌트비가 걱정되던 때였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긴 했지만, 월세 780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스텐리 파크도 구경하고 아이들을 업고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나 아들에게 물어보니 자긴 5살 이전 기억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 호텔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호텔 케이크를 사다가 먹였는데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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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 많이 사는 한인 타운 살면 좀 좋아
외국 살면 없던 조국 사랑도 생겨난다고 했던가
한인 마켓 안 가고 주류 마켓인 수퍼스토아 코스코에 가도
한국제품 한두 개는 늘 눈에 뜨인다
어 이 만두 한국 거네
와 김을 박스로 사람들이 사가
김치도 사람들이 많이 사가
한국 물건을 보면 한국 사람 본 듯
반가워한다

코스코 입구에 떡 하니 진열된 삼성 그리고 엘지 가전제품에
어깨가 으쓱 살짝 올라간 듯 하다.
텔레비전에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세탁기까지
캐나다 시민권 가지고 캐나다 시민이라 말해도 비웃는 사람들보다야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만든 거라고 떠벌이는 것이 났지
가까운 중국 마켓가서도 눈에 확들어 오는
한국 과자며 화장품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 입만 들썩
짝사랑 같은 한국 사랑을 한다
축구를 해도 피겨 스케이팅을 해도
한국을 응원하다가도

자주 봐온 탓일까 붉은 단풍 캐나다 깃발도 자랑스러워
수십 년을 살아도 부르지 못하는 캐나다 국가
수십 년을 부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흥얼대는 애국가
귀국하면 외국인이라 한국인들 줄에 서지 못하고
삼성 제품 기아차만 쓴다고 놀림 받아도
어느새 한국 물건 자랑하고 있는 바보처럼.
 





한인들 많이 사는 한인 타운 살면 좀 좋아
외국 살면 없던 조국 사랑도 생겨난다고 했던가
한인 마켓 안 가고 주류 마켓인 수퍼스토아 코스코에 가도
한국제품 한두 개는 늘 눈에 뜨인다
어 이 만두 한국 거네
와 김을 박스로 사람들이 사가
김치도 사람들이 많이 사가
한국 물건을 보면 한국 사람 본 듯
반가워한다

코스코 입구에 떡 하니 진열된 삼성 그리고 엘지 가전제품에
어깨가 으쓱 살짝 올라간 듯 하다.
텔레비전에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세탁기까지
캐나다 시민권 가지고 캐나다 시민이라 말해도 비웃는 사람들보다야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만든 거라고 떠벌이는 것이 났지
가까운 중국 마켓가서도 눈에 확들어 오는
한국 과자며 화장품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 입만 들썩
짝사랑 같은 한국 사랑을 한다
축구를 해도 피겨 스케이팅을 해도
한국을 응원하다가도

자주 봐온 탓일까 붉은 단풍 캐나다 깃발도 자랑스러워
수십 년을 살아도 부르지 못하는 캐나다 국가
수십 년을 부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흥얼대는 애국가
귀국하면 외국인이라 한국인들 줄에 서지 못하고
삼성 제품 기아차만 쓴다고 놀림 받아도
어느새 한국 물건 자랑하고 있는 바보처럼.
 







 

#작가의 변
초기 이민 시절: 내가 한국을 떠나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95년 3월이었다. 1994년에 이미 영주권이 있는 여권을 받고도 캐나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면 영주권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짐을 먼저 배편으로 보내고 이민 가방 4개와 아직 분유를 먹고 있던 2살짜리 쌍둥이를 데리고 싱가폴 항공편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왔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제주도 가는 국내 비행기조차 타본 적 없이 덜컥 낯설고 물선 이국땅인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민국 심사를 하는데 캐나다 현지에 주소가 없다고 잡아 놓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시간 끌기를 2시간, 캐나다에 오면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사람이 나오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아파트 얻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도 주소도 없이 이민을 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결국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 랜딩 서비스 회사 사람의 신분 확인과 모텔에 묵으며 거주지를 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내보내 주었다. 일요일에 도착한 밴쿠버 공항은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우리 눈에 정말 자그마한 시골 공항으로 밖에 안 보였다. 도시에 차도 띠엄띠엄 다니고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공항 앞 사무실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랜딩 서비스 회사에서 초코 비스킷과 오렌지를 먹었는데 호텔에 근무하면서 오렌지며 초코 비스킷을 먹어 봤어도 오렌지 물도 많고 초코 비스킷도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 한인 타운이었던 킹스 웨이에 있는 모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들이 돌아갔다. 단독주택같은 모텔은 추웠고 침대는 어색했다. 한국에 전화하기 위해 공중 전화부스를 찾아 전화카드로 전화하고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 모텔이 낯설기만 했다. 다음 날 우리를 데리고 은행 구좌를 만들기 위해 다운타운 은행에 들려서 카드를 만들고 구경시켜준다고 노스밴쿠버로 갈 때 한국에서 지도로 달달 외운 거리를 읊으며, 다음엔 뭐가 나올 거고 하면서 겁도 없이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를 공항 근처인 리치몬드에 구하면서 마켓이 가까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조차 없던 막막한 이민 초기 모든 것이 낯설어 한국인만 보면 형제 같아 형님으로 모시자고 하던 랜딩 서비스 담당자와 싸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다. 짐이 도착하긴 했는데 한 컨테이너에 4가구의 짐이 들어 있었고 우리 짐은 밤 10시가 넘어서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이 도착하지 않아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을 먹던 우리를 보고 이웃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던 것도 한국인이었다. 가져온 분유가 떨어지고 짐은 오지 않고 도착하면 바로 받으려고 불편을 감수하고, 3달이나 먼저 짐을 보냈는데도 도착 못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얼굴을 붉히면 싫은 소리를 하고 한국의 운송회사에 전화해서 이삿짐 비용을 일부 빼고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마무리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거금이었던 800불의 거금을 주고 랜딩 서비스까지 맡아서 한 밴쿠버 현지 이삿짐 회사는 이민 가면 아무도 믿지 말라던 사람들 말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 야채가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아 한국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니 중년의 아줌마도 ‘예 반갑습니다’하고 대답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와이프를 툭 치며 “또, 아는 척 한다.’라고 말했다.

멋쩍게 돌아서면서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취직하기 위해 50통이 넘게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면접을 본 곳은 팬 퍼시픽 호탤 한 곳밖에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인사 담당자가 나를 따로 불러 이곳에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 경력이 있어야 취직이 가능하다고 귀뜸 해 주었다. 한 달 후에 한국에서 같은 호텔에 근무하던 친구가 이민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친구와 우리 4식구가 함께 한 달 정도 생활했을 때 친구가 자기 취직됐다고 밴쿠버로 나간다고 했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서 다음 달 800불도 안 되던 렌트비가 걱정되던 때였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긴 했지만, 월세 780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스텐리 파크도 구경하고 아이들을 업고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나 아들에게 물어보니 자긴 5살 이전 기억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 호텔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호텔 케이크를 사다가 먹였는데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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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초기 이민 시절: 내가 한국을 떠나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95년 3월이었다. 1994년에 이미 영주권이 있는 여권을 받고도 캐나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면 영주권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짐을 먼저 배편으로 보내고 이민 가방 4개와 아직 분유를 먹고 있던 2살짜리 쌍둥이를 데리고 싱가폴 항공편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왔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제주도 가는 국내 비행기조차 타본 적 없이 덜컥 낯설고 물선 이국땅인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민국 심사를 하는데 캐나다 현지에 주소가 없다고 잡아 놓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시간 끌기를 2시간, 캐나다에 오면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사람이 나오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아파트 얻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도 주소도 없이 이민을 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결국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 랜딩 서비스 회사 사람의 신분 확인과 모텔에 묵으며 거주지를 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내보내 주었다. 일요일에 도착한 밴쿠버 공항은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우리 눈에 정말 자그마한 시골 공항으로 밖에 안 보였다. 도시에 차도 띠엄띠엄 다니고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공항 앞 사무실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랜딩 서비스 회사에서 초코 비스킷과 오렌지를 먹었는데 호텔에 근무하면서 오렌지며 초코 비스킷을 먹어 봤어도 오렌지 물도 많고 초코 비스킷도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 한인 타운이었던 킹스 웨이에 있는 모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들이 돌아갔다. 단독주택같은 모텔은 추웠고 침대는 어색했다. 한국에 전화하기 위해 공중 전화부스를 찾아 전화카드로 전화하고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 모텔이 낯설기만 했다. 다음 날 우리를 데리고 은행 구좌를 만들기 위해 다운타운 은행에 들려서 카드를 만들고 구경시켜준다고 노스밴쿠버로 갈 때 한국에서 지도로 달달 외운 거리를 읊으며, 다음엔 뭐가 나올 거고 하면서 겁도 없이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를 공항 근처인 리치몬드에 구하면서 마켓이 가까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조차 없던 막막한 이민 초기 모든 것이 낯설어 한국인만 보면 형제 같아 형님으로 모시자고 하던 랜딩 서비스 담당자와 싸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다. 짐이 도착하긴 했는데 한 컨테이너에 4가구의 짐이 들어 있었고 우리 짐은 밤 10시가 넘어서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이 도착하지 않아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을 먹던 우리를 보고 이웃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던 것도 한국인이었다. 가져온 분유가 떨어지고 짐은 오지 않고 도착하면 바로 받으려고 불편을 감수하고, 3달이나 먼저 짐을 보냈는데도 도착 못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얼굴을 붉히면 싫은 소리를 하고 한국의 운송회사에 전화해서 이삿짐 비용을 일부 빼고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마무리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거금이었던 800불의 거금을 주고 랜딩 서비스까지 맡아서 한 밴쿠버 현지 이삿짐 회사는 이민 가면 아무도 믿지 말라던 사람들 말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 야채가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아 한국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니 중년의 아줌마도 ‘예 반갑습니다’하고 대답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와이프를 툭 치며 “또, 아는 척 한다.’라고 말했다.

멋쩍게 돌아서면서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취직하기 위해 50통이 넘게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면접을 본 곳은 팬 퍼시픽 호탤 한 곳밖에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인사 담당자가 나를 따로 불러 이곳에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 경력이 있어야 취직이 가능하다고 귀뜸 해 주었다. 한 달 후에 한국에서 같은 호텔에 근무하던 친구가 이민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친구와 우리 4식구가 함께 한 달 정도 생활했을 때 친구가 자기 취직됐다고 밴쿠버로 나간다고 했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서 다음 달 800불도 안 되던 렌트비가 걱정되던 때였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긴 했지만, 월세 780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스텐리 파크도 구경하고 아이들을 업고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나 아들에게 물어보니 자긴 5살 이전 기억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 호텔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호텔 케이크를 사다가 먹였는데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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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 많이 사는 한인 타운 살면 좀 좋아
외국 살면 없던 조국 사랑도 생겨난다고 했던가
한인 마켓 안 가고 주류 마켓인 수퍼스토아 코스코에 가도
한국제품 한두 개는 늘 눈에 뜨인다
어 이 만두 한국 거네
와 김을 박스로 사람들이 사가
김치도 사람들이 많이 사가
한국 물건을 보면 한국 사람 본 듯
반가워한다

코스코 입구에 떡 하니 진열된 삼성 그리고 엘지 가전제품에
어깨가 으쓱 살짝 올라간 듯 하다.
텔레비전에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세탁기까지
캐나다 시민권 가지고 캐나다 시민이라 말해도 비웃는 사람들보다야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만든 거라고 떠벌이는 것이 났지
가까운 중국 마켓가서도 눈에 확들어 오는
한국 과자며 화장품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 입만 들썩
짝사랑 같은 한국 사랑을 한다
축구를 해도 피겨 스케이팅을 해도
한국을 응원하다가도

자주 봐온 탓일까 붉은 단풍 캐나다 깃발도 자랑스러워
수십 년을 살아도 부르지 못하는 캐나다 국가
수십 년을 부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흥얼대는 애국가
귀국하면 외국인이라 한국인들 줄에 서지 못하고
삼성 제품 기아차만 쓴다고 놀림 받아도
어느새 한국 물건 자랑하고 있는 바보처럼.
 







 

#작가의 변
초기 이민 시절: 내가 한국을 떠나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95년 3월이었다. 1994년에 이미 영주권이 있는 여권을 받고도 캐나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더 이상 지체하면 영주권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짐을 먼저 배편으로 보내고 이민 가방 4개와 아직 분유를 먹고 있던 2살짜리 쌍둥이를 데리고 싱가폴 항공편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왔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제주도 가는 국내 비행기조차 타본 적 없이 덜컥 낯설고 물선 이국땅인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민국 심사를 하는데 캐나다 현지에 주소가 없다고 잡아 놓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시간 끌기를 2시간, 캐나다에 오면 랜딩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사람이 나오기로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아파트 얻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도 주소도 없이 이민을 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결국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 랜딩 서비스 회사 사람의 신분 확인과 모텔에 묵으며 거주지를 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내보내 주었다. 일요일에 도착한 밴쿠버 공항은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우리 눈에 정말 자그마한 시골 공항으로 밖에 안 보였다. 도시에 차도 띠엄띠엄 다니고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공항 앞 사무실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랜딩 서비스 회사에서 초코 비스킷과 오렌지를 먹었는데 호텔에 근무하면서 오렌지며 초코 비스킷을 먹어 봤어도 오렌지 물도 많고 초코 비스킷도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 한인 타운이었던 킹스 웨이에 있는 모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들이 돌아갔다. 단독주택같은 모텔은 추웠고 침대는 어색했다. 한국에 전화하기 위해 공중 전화부스를 찾아 전화카드로 전화하고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 모텔이 낯설기만 했다. 다음 날 우리를 데리고 은행 구좌를 만들기 위해 다운타운 은행에 들려서 카드를 만들고 구경시켜준다고 노스밴쿠버로 갈 때 한국에서 지도로 달달 외운 거리를 읊으며, 다음엔 뭐가 나올 거고 하면서 겁도 없이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를 공항 근처인 리치몬드에 구하면서 마켓이 가까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조차 없던 막막한 이민 초기 모든 것이 낯설어 한국인만 보면 형제 같아 형님으로 모시자고 하던 랜딩 서비스 담당자와 싸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다. 짐이 도착하긴 했는데 한 컨테이너에 4가구의 짐이 들어 있었고 우리 짐은 밤 10시가 넘어서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이 도착하지 않아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을 먹던 우리를 보고 이웃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던 것도 한국인이었다. 가져온 분유가 떨어지고 짐은 오지 않고 도착하면 바로 받으려고 불편을 감수하고, 3달이나 먼저 짐을 보냈는데도 도착 못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얼굴을 붉히면 싫은 소리를 하고 한국의 운송회사에 전화해서 이삿짐 비용을 일부 빼고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마무리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거금이었던 800불의 거금을 주고 랜딩 서비스까지 맡아서 한 밴쿠버 현지 이삿짐 회사는 이민 가면 아무도 믿지 말라던 사람들 말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 야채가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아 한국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니 중년의 아줌마도 ‘예 반갑습니다’하고 대답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와이프를 툭 치며 “또, 아는 척 한다.’라고 말했다.

멋쩍게 돌아서면서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취직하기 위해 50통이 넘게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면접을 본 곳은 팬 퍼시픽 호탤 한 곳밖에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인사 담당자가 나를 따로 불러 이곳에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 경력이 있어야 취직이 가능하다고 귀뜸 해 주었다. 한 달 후에 한국에서 같은 호텔에 근무하던 친구가 이민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친구와 우리 4식구가 함께 한 달 정도 생활했을 때 친구가 자기 취직됐다고 밴쿠버로 나간다고 했다.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서 다음 달 800불도 안 되던 렌트비가 걱정되던 때였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긴 했지만, 월세 780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스텐리 파크도 구경하고 아이들을 업고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나 아들에게 물어보니 자긴 5살 이전 기억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 호텔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호텔 케이크를 사다가 먹였는데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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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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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씨 2022-11-16 00:03:44
박광서에게. ㅁ1안하나. 뷸교알러면. 비불패알려면 배앙현니의. 노래들어보시길 바랍니다. ㄱ1ㆍ끔가다 교수 별 볼일. 노. 그냥. 직압인입니다.

아자씨 2022-11-15 23:56:10
박광서에게 서강대교수 글고 자승과 그. 똘마니. 혜일 드응. 구본일이선재 이기흥 김의정 주씨. 여자불자회 많지요
박광서씨 알고도 무속인. 모르고도 무속인 경고해도 자기가 무속인. ㅈㅈㅈ

아자씨 2022-11-15 23:39:23
이태리안에. 천주교뮌나라있다 합니다 교황청인지. 황제청인지. 당신의. 신이. 갈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천주교 신부 신도에게 갈것입니다 당신의. 신은 나보면. 점점점 합니다 개신교도. 무속인 힌두교도무속인 이슬람도. 우속인 아차. 순교란 명 목으로 타인생명뺑앗ㄴ 자. 들은 그 가족들도 그 신들이. 지옥에서. 관리할것입니다 이정도로. ㆍᆢ. 더. 알면 저기합니다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힌두교. 이스라엘 어떡해

아자씨 2022-11-15 23:30:04
아차. 이자씨입에서 수ㄴ대냄새나요. 왜 압럭차로 피나요 핏덩이도나와요. 옛날. 관악산에사 발바닥너덜할때2. 눈걸엇서 ) 봉청 사거리 중엉시자ㅇ에데려가. 순대국바ㅂ. 먹었어요. 마걸리 하고 . 그뗀 올랐는데 지금 압니다 아. 불보사니밍. 함께. 글고 황우석 박사님관련자들 미국인들. 더럽지요. 서을대. 모여자의사외. 그리고. .제가 반드시. 말씀드립니다 ㅈ

천주교. 문제 많지요. 추기경 당신들이. 생명관런해. 말씀많이 하면 생 명 살러. 보세요 추기경들. 과학작으로. 검증하7시다 이태리 추기경 대표. 운제 만ㅎ습니다 헛소리 늘어놓고
세계 천주교에 신들이 갈겁니다. 미국. 천주교교당 문재인에게. 당신들의. 신이 천주교도 글고 가장 부패한. 종교세력중 하나입니다. 나에게 살려 달라고 합니다. 나도

아자씨 2022-11-15 23:04:27
인드라님읁 누구? 옌날. 유럽인으ㅁ악가. 그시대 그돜쿄의. 반인륜적 행위로. 불교귀의. 수행. 동남아예서. 글고 한극ㆍ으로 환생. 그렇게. 생각하고 다이삼나도. 모름니다. 아자씨는. 누구. 불교수행자로혹독한수행했으니. 지구인들 믿으세요. 쉽게. 이정도그만. 그럼개신교 기독교 무속인들 신이 왜. 나에게 외ㆍㅆ을가요. ? 굉장히중요질문입니다
이래 저래 생각하면알수 있지요. 개시교와 천주교가 차이가. 있어요. 둘 다 예수를. 강조하나. 예수와 그모친은. 신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목사. 신부들은. 알아요
외ㅓ. 과학의 이름으로. 알렿습니다 여러번 신지들을 기망했어요
모두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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