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7. 반찬 투정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7. 반찬 투정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9.0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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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도 계란후라이 해줘

엄마 콩자반 싫어

엄마 이거 봐 김칫국물에 책이 빨게 졌어

나도 가는 멸치볶음 해줘
 

#작가의 변
냄새난다고 샌드위치 싸가던 아들이 집에서 먹던 김치볶음밥, 장조림, 소시지볶음을 싸서 갔다. 한국인 유전자가 어딜 가랴/ 한국 음식은 좋아하면서도 한국인으로 불리는 건 싫어한다.

애써 준비한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꼬기’만 달라면 정말 밉다. 음식이라고는 라면도 안 끓여 본 딸이 독립하고 제일 힘든 게 먹는 거라고 한다. 먹는 거야 쉽지만 준비하는 게 보던 것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날마다 먹는 김치도 쉬어 터진 김치보다 겉절이 좋아하고 애호박에 두부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만 날마다 먹어도 괜찮은데, 콩자반은 싫어. 그래도 엄마가 조려 준 쪼글쪼글 주름 잡힌 ‘애기감자’가 그립다.

이십 대 중반 조리를 시작해서 30년을 넘게 일을 해오고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콩 농사를 짓고 그것을 가마솥에 푹 삶아 메주를 매달아 익힌 후에 그 메주로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이 기본이 되는 음식들, 특히 돌담 위에 넝쿨 잎을 뻗어 내며 애호박을 앙증맞게도 매달아 놓으면 그것이 된장찌개로 들어가 맛을 내는 그런 시골 반찬이 좋았다. 물론 여름에야 푸성귀가 많이 나오니 얼갈이 배춧국, 열무김치, 풋콩, 풋감자 등 이름에서도 이미 풋내 풀풀 풍기는 여름은 먹을 것이 풍성했다. 하지만 한 끼 해 먹고 남은 것은 다시 먹는 게 쉽지 않다. 냉장고가 없으니 날씨는 덥고 파리 등 해충까지,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큰일을 치르기 위해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삶고 볶고 하는 여러 음식을 아침 일찍, 아니 새벽부터 준비하기에 바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책에서 나오는 마음의 양식으로 산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 사는 일 아닌가? 먹고 자고 입고하는 일이 사람 사는데 기본 중 기본이라서 늘 사람들은 먹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싫어하는 음식 앞에선 진심 아주 싫어하는 내색을 하기도 한다.

이발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샤워나 목욕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 이발하기 위해 친구 할아버지의 손을 빌렸다. 오래된 의자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다 큰 마을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이발소에서 이발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를 손님으로 대하던 이발소의 형의 모습이 생소했다. 왜냐면 친구 할아버지의 이발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다. 이발 스타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친구 할아버지는 당연히 상고머리나 빡빡머리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발소의 형은 ‘어떻게 깎아 줄까’ 하고 늘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물론 그래도 나중엔 늘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 나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뒷머리는 짧게 앞머리는 눈썹 위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귀는 나오는 단정한 스타일. 상고머리와 비슷하지만 때로는 펑크 머리가 유행할 땐 펑크도 해보고 일명 깍두기 스타일 스포츠머리도 해봤지만 결국은 기존 스타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목욕은 큰 고무 함지에 가마솥에 끓인 물과 찬물을 섞어서 했는데, 두레박 우물에서 길어다 물동이로 옮겨 써야 해서 자주 씻을 수가 없었다. 여름엔 개울에 가서 살다시피 하거나 홍골 연못에 가서 개구리헤엄을 치면서 놀다 보니 따로 목욕할 필요는 없었지만 홍골 연못에서 연못에 깊은 곳을 표시한 나무 표식을 잡겠다고 물속에서 점프했는데 점프는 안 되고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니 계속 깊은 곳으로 밀려 들어가서 나중엔 깊은 물에 2번이나 꼴까닥 꼴까닥 하고 들어갔다 나오니 누군가 다가와 나를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끌고 나와서 연못 배수구 시멘트 위에 물통을 배에 괴어 놓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물을 엄청나게 먹었었고 그것을 다 토해냈다고 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이다. 중학교가 되어 제천 시내의 공중목욕탕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친구랑 같이 온탕 냉탕을 오가면서 즐기다 서로 등도 밀어주고 나올 땐 그리 상쾌할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혀나 기타 감각이 주는 기쁨을 떨쳐야 하지만 ‘인생 뭐 있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데 하면서 먹는 것에 진심일 수밖에 없다. 조기를 보면 천장에 조기를 매달아 놓고 반찬으로 먹었다는 짠돌이 구두쇠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평소엔 먹지 못하던 조기를 제사때나 명절에 먹을 수 있었고, 조기에 대한 기억은 짭조름 한 살을 발라 하얀 이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정말 꼬습고 꿀맛이 뚝뚝 떨어진다는 거다. 그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요즘 조기를 먹으면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짭조름이 덜해서 일수도 있고 중국산이어서 일수도 있고. 서해바다가 오염되어서 일수도 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 나의 맛을 담당하는 입맛이란 놈이 다양한 서양 음식까지 맛보느라 고유의 우리 음식을 맛을 잊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먹는 거 부실하게 먹었던 시절에 더욱 꿀맛 같은 음식들이 기억 회로에 남아 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밥맛 없을 때, 밥이 살짝 맛이 가서 찬물에 씻어서 찬물만 밥에 김치 손으로 쭉쭉 찢어 얹어서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충청도 내륙까지 오느라 짜게 절인 자반고등어도 사실 조기만큼 맛있었던 듯하다. 콩조림이 딱딱하거나 물렁 하거나 그 시커먼 염소 똥 같은 비주얼 때문에 콩자반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김치를 반찬으로 싸줄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책에 김치 냄새 풍기고 지도까지 그린 김치 반찬은 용서가 안 됐다. 꼭 짜고 송송 썰어 볶아 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땐 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계란후라이를 하기 힘들었다. 프라이팬도 없었고 가마솥에 ‘후라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철도에 다닌다던 짝꿍이, 책상에 금을 딱 그어 놓고 넘어 오지 말라던 그 짝꿍이 밥 위에 계란 부침을 싸 오니 부럽고 심사가 뒤틀리고 그랬던 거다. 캐나다에선 김치냄새 난다고 쑥덕거리는 이민족 사람들 때문에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거나 아침에 먹는 것도 삼가하게 된다. 인도인들은 카레를 시도 때도 없이 대놓고 먹고 파르메산 치즈나 유럽 고유의 고다치즈도 꼬린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맛있다며 자랑스럽게 먹는데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에 동네 60가구가 넘는 집을 돌면서 “아부지가 아침 식사하시러 오시래유.” 하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은 내 생일이라고 동네 사람들 부르라고 하면 부르러 갈까?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남편 생일(사실은 회갑이었음)이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사람들이 수없이 와서 먹고 마시고 저녁 늦게까지 그 수발을 받던 어머니처럼 남편 말에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 시절로 끝난 일이거나 시골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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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계란후라이 해줘

엄마 콩자반 싫어

엄마 이거 봐 김칫국물에 책이 빨게 졌어

나도 가는 멸치볶음 해줘
 

#작가의 변
냄새난다고 샌드위치 싸가던 아들이 집에서 먹던 김치볶음밥, 장조림, 소시지볶음을 싸서 갔다. 한국인 유전자가 어딜 가랴/ 한국 음식은 좋아하면서도 한국인으로 불리는 건 싫어한다.

애써 준비한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꼬기’만 달라면 정말 밉다. 음식이라고는 라면도 안 끓여 본 딸이 독립하고 제일 힘든 게 먹는 거라고 한다. 먹는 거야 쉽지만 준비하는 게 보던 것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날마다 먹는 김치도 쉬어 터진 김치보다 겉절이 좋아하고 애호박에 두부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만 날마다 먹어도 괜찮은데, 콩자반은 싫어. 그래도 엄마가 조려 준 쪼글쪼글 주름 잡힌 ‘애기감자’가 그립다.

이십 대 중반 조리를 시작해서 30년을 넘게 일을 해오고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콩 농사를 짓고 그것을 가마솥에 푹 삶아 메주를 매달아 익힌 후에 그 메주로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이 기본이 되는 음식들, 특히 돌담 위에 넝쿨 잎을 뻗어 내며 애호박을 앙증맞게도 매달아 놓으면 그것이 된장찌개로 들어가 맛을 내는 그런 시골 반찬이 좋았다. 물론 여름에야 푸성귀가 많이 나오니 얼갈이 배춧국, 열무김치, 풋콩, 풋감자 등 이름에서도 이미 풋내 풀풀 풍기는 여름은 먹을 것이 풍성했다. 하지만 한 끼 해 먹고 남은 것은 다시 먹는 게 쉽지 않다. 냉장고가 없으니 날씨는 덥고 파리 등 해충까지,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큰일을 치르기 위해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삶고 볶고 하는 여러 음식을 아침 일찍, 아니 새벽부터 준비하기에 바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책에서 나오는 마음의 양식으로 산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 사는 일 아닌가? 먹고 자고 입고하는 일이 사람 사는데 기본 중 기본이라서 늘 사람들은 먹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싫어하는 음식 앞에선 진심 아주 싫어하는 내색을 하기도 한다.

이발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샤워나 목욕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 이발하기 위해 친구 할아버지의 손을 빌렸다. 오래된 의자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다 큰 마을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이발소에서 이발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를 손님으로 대하던 이발소의 형의 모습이 생소했다. 왜냐면 친구 할아버지의 이발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다. 이발 스타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친구 할아버지는 당연히 상고머리나 빡빡머리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발소의 형은 ‘어떻게 깎아 줄까’ 하고 늘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물론 그래도 나중엔 늘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 나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뒷머리는 짧게 앞머리는 눈썹 위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귀는 나오는 단정한 스타일. 상고머리와 비슷하지만 때로는 펑크 머리가 유행할 땐 펑크도 해보고 일명 깍두기 스타일 스포츠머리도 해봤지만 결국은 기존 스타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목욕은 큰 고무 함지에 가마솥에 끓인 물과 찬물을 섞어서 했는데, 두레박 우물에서 길어다 물동이로 옮겨 써야 해서 자주 씻을 수가 없었다. 여름엔 개울에 가서 살다시피 하거나 홍골 연못에 가서 개구리헤엄을 치면서 놀다 보니 따로 목욕할 필요는 없었지만 홍골 연못에서 연못에 깊은 곳을 표시한 나무 표식을 잡겠다고 물속에서 점프했는데 점프는 안 되고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니 계속 깊은 곳으로 밀려 들어가서 나중엔 깊은 물에 2번이나 꼴까닥 꼴까닥 하고 들어갔다 나오니 누군가 다가와 나를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끌고 나와서 연못 배수구 시멘트 위에 물통을 배에 괴어 놓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물을 엄청나게 먹었었고 그것을 다 토해냈다고 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이다. 중학교가 되어 제천 시내의 공중목욕탕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친구랑 같이 온탕 냉탕을 오가면서 즐기다 서로 등도 밀어주고 나올 땐 그리 상쾌할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혀나 기타 감각이 주는 기쁨을 떨쳐야 하지만 ‘인생 뭐 있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데 하면서 먹는 것에 진심일 수밖에 없다. 조기를 보면 천장에 조기를 매달아 놓고 반찬으로 먹었다는 짠돌이 구두쇠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평소엔 먹지 못하던 조기를 제사때나 명절에 먹을 수 있었고, 조기에 대한 기억은 짭조름 한 살을 발라 하얀 이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정말 꼬습고 꿀맛이 뚝뚝 떨어진다는 거다. 그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요즘 조기를 먹으면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짭조름이 덜해서 일수도 있고 중국산이어서 일수도 있고. 서해바다가 오염되어서 일수도 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 나의 맛을 담당하는 입맛이란 놈이 다양한 서양 음식까지 맛보느라 고유의 우리 음식을 맛을 잊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먹는 거 부실하게 먹었던 시절에 더욱 꿀맛 같은 음식들이 기억 회로에 남아 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밥맛 없을 때, 밥이 살짝 맛이 가서 찬물에 씻어서 찬물만 밥에 김치 손으로 쭉쭉 찢어 얹어서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충청도 내륙까지 오느라 짜게 절인 자반고등어도 사실 조기만큼 맛있었던 듯하다. 콩조림이 딱딱하거나 물렁 하거나 그 시커먼 염소 똥 같은 비주얼 때문에 콩자반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김치를 반찬으로 싸줄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책에 김치 냄새 풍기고 지도까지 그린 김치 반찬은 용서가 안 됐다. 꼭 짜고 송송 썰어 볶아 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땐 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계란후라이를 하기 힘들었다. 프라이팬도 없었고 가마솥에 ‘후라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철도에 다닌다던 짝꿍이, 책상에 금을 딱 그어 놓고 넘어 오지 말라던 그 짝꿍이 밥 위에 계란 부침을 싸 오니 부럽고 심사가 뒤틀리고 그랬던 거다. 캐나다에선 김치냄새 난다고 쑥덕거리는 이민족 사람들 때문에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거나 아침에 먹는 것도 삼가하게 된다. 인도인들은 카레를 시도 때도 없이 대놓고 먹고 파르메산 치즈나 유럽 고유의 고다치즈도 꼬린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맛있다며 자랑스럽게 먹는데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에 동네 60가구가 넘는 집을 돌면서 “아부지가 아침 식사하시러 오시래유.” 하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은 내 생일이라고 동네 사람들 부르라고 하면 부르러 갈까?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남편 생일(사실은 회갑이었음)이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사람들이 수없이 와서 먹고 마시고 저녁 늦게까지 그 수발을 받던 어머니처럼 남편 말에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 시절로 끝난 일이거나 시골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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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계란후라이 해줘

엄마 콩자반 싫어

엄마 이거 봐 김칫국물에 책이 빨게 졌어

나도 가는 멸치볶음 해줘
 

#작가의 변
냄새난다고 샌드위치 싸가던 아들이 집에서 먹던 김치볶음밥, 장조림, 소시지볶음을 싸서 갔다. 한국인 유전자가 어딜 가랴/ 한국 음식은 좋아하면서도 한국인으로 불리는 건 싫어한다.

애써 준비한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꼬기’만 달라면 정말 밉다. 음식이라고는 라면도 안 끓여 본 딸이 독립하고 제일 힘든 게 먹는 거라고 한다. 먹는 거야 쉽지만 준비하는 게 보던 것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날마다 먹는 김치도 쉬어 터진 김치보다 겉절이 좋아하고 애호박에 두부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만 날마다 먹어도 괜찮은데, 콩자반은 싫어. 그래도 엄마가 조려 준 쪼글쪼글 주름 잡힌 ‘애기감자’가 그립다.

이십 대 중반 조리를 시작해서 30년을 넘게 일을 해오고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콩 농사를 짓고 그것을 가마솥에 푹 삶아 메주를 매달아 익힌 후에 그 메주로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이 기본이 되는 음식들, 특히 돌담 위에 넝쿨 잎을 뻗어 내며 애호박을 앙증맞게도 매달아 놓으면 그것이 된장찌개로 들어가 맛을 내는 그런 시골 반찬이 좋았다. 물론 여름에야 푸성귀가 많이 나오니 얼갈이 배춧국, 열무김치, 풋콩, 풋감자 등 이름에서도 이미 풋내 풀풀 풍기는 여름은 먹을 것이 풍성했다. 하지만 한 끼 해 먹고 남은 것은 다시 먹는 게 쉽지 않다. 냉장고가 없으니 날씨는 덥고 파리 등 해충까지,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큰일을 치르기 위해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삶고 볶고 하는 여러 음식을 아침 일찍, 아니 새벽부터 준비하기에 바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책에서 나오는 마음의 양식으로 산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 사는 일 아닌가? 먹고 자고 입고하는 일이 사람 사는데 기본 중 기본이라서 늘 사람들은 먹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싫어하는 음식 앞에선 진심 아주 싫어하는 내색을 하기도 한다.

이발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샤워나 목욕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 이발하기 위해 친구 할아버지의 손을 빌렸다. 오래된 의자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다 큰 마을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이발소에서 이발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를 손님으로 대하던 이발소의 형의 모습이 생소했다. 왜냐면 친구 할아버지의 이발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다. 이발 스타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친구 할아버지는 당연히 상고머리나 빡빡머리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발소의 형은 ‘어떻게 깎아 줄까’ 하고 늘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물론 그래도 나중엔 늘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 나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뒷머리는 짧게 앞머리는 눈썹 위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귀는 나오는 단정한 스타일. 상고머리와 비슷하지만 때로는 펑크 머리가 유행할 땐 펑크도 해보고 일명 깍두기 스타일 스포츠머리도 해봤지만 결국은 기존 스타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목욕은 큰 고무 함지에 가마솥에 끓인 물과 찬물을 섞어서 했는데, 두레박 우물에서 길어다 물동이로 옮겨 써야 해서 자주 씻을 수가 없었다. 여름엔 개울에 가서 살다시피 하거나 홍골 연못에 가서 개구리헤엄을 치면서 놀다 보니 따로 목욕할 필요는 없었지만 홍골 연못에서 연못에 깊은 곳을 표시한 나무 표식을 잡겠다고 물속에서 점프했는데 점프는 안 되고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니 계속 깊은 곳으로 밀려 들어가서 나중엔 깊은 물에 2번이나 꼴까닥 꼴까닥 하고 들어갔다 나오니 누군가 다가와 나를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끌고 나와서 연못 배수구 시멘트 위에 물통을 배에 괴어 놓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물을 엄청나게 먹었었고 그것을 다 토해냈다고 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이다. 중학교가 되어 제천 시내의 공중목욕탕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친구랑 같이 온탕 냉탕을 오가면서 즐기다 서로 등도 밀어주고 나올 땐 그리 상쾌할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혀나 기타 감각이 주는 기쁨을 떨쳐야 하지만 ‘인생 뭐 있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데 하면서 먹는 것에 진심일 수밖에 없다. 조기를 보면 천장에 조기를 매달아 놓고 반찬으로 먹었다는 짠돌이 구두쇠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평소엔 먹지 못하던 조기를 제사때나 명절에 먹을 수 있었고, 조기에 대한 기억은 짭조름 한 살을 발라 하얀 이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정말 꼬습고 꿀맛이 뚝뚝 떨어진다는 거다. 그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요즘 조기를 먹으면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짭조름이 덜해서 일수도 있고 중국산이어서 일수도 있고. 서해바다가 오염되어서 일수도 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 나의 맛을 담당하는 입맛이란 놈이 다양한 서양 음식까지 맛보느라 고유의 우리 음식을 맛을 잊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먹는 거 부실하게 먹었던 시절에 더욱 꿀맛 같은 음식들이 기억 회로에 남아 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밥맛 없을 때, 밥이 살짝 맛이 가서 찬물에 씻어서 찬물만 밥에 김치 손으로 쭉쭉 찢어 얹어서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충청도 내륙까지 오느라 짜게 절인 자반고등어도 사실 조기만큼 맛있었던 듯하다. 콩조림이 딱딱하거나 물렁 하거나 그 시커먼 염소 똥 같은 비주얼 때문에 콩자반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김치를 반찬으로 싸줄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책에 김치 냄새 풍기고 지도까지 그린 김치 반찬은 용서가 안 됐다. 꼭 짜고 송송 썰어 볶아 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땐 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계란후라이를 하기 힘들었다. 프라이팬도 없었고 가마솥에 ‘후라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철도에 다닌다던 짝꿍이, 책상에 금을 딱 그어 놓고 넘어 오지 말라던 그 짝꿍이 밥 위에 계란 부침을 싸 오니 부럽고 심사가 뒤틀리고 그랬던 거다. 캐나다에선 김치냄새 난다고 쑥덕거리는 이민족 사람들 때문에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거나 아침에 먹는 것도 삼가하게 된다. 인도인들은 카레를 시도 때도 없이 대놓고 먹고 파르메산 치즈나 유럽 고유의 고다치즈도 꼬린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맛있다며 자랑스럽게 먹는데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에 동네 60가구가 넘는 집을 돌면서 “아부지가 아침 식사하시러 오시래유.” 하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은 내 생일이라고 동네 사람들 부르라고 하면 부르러 갈까?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남편 생일(사실은 회갑이었음)이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사람들이 수없이 와서 먹고 마시고 저녁 늦게까지 그 수발을 받던 어머니처럼 남편 말에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 시절로 끝난 일이거나 시골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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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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