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3. 2008년 국외문화재 환수사업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3. 2008년 국외문화재 환수사업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8.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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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불교 일체를 이루다”

지금 되돌아보면, 남북불교 교류사에 한 획을 그은 일임에도 답답함과 서운함이 교차한다. 필자에게 남북관계보다 더 답답한 일은 약탈문화재 환수 운동의 뒷이야기다. 일제에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함께했던 이들의 공(功)은 사라지고, 한두 사람의 업적으로 치부돼 버렸다.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니까? 내가 한다.”라는 볼멘소리도 있겠지만, 한때는 동지였기에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당시의 몇 가지 사실들을 기록한다. 또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 하므로 다시 응원을 보낸다.

국가 차원의 문화재제자리찾기는 1995년 연말에 경복궁 자선당 유구 반환으로 빛이 바랬다. 민간차원에서는 2004년 불교계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은 2006년 3월 3일 오전 10시 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위원장 정념·철안) 출범으로부터다. 필자가 출범식 사회를 본 실록환수위원회 공동의장에는 정념 월정사 주지와 철안 봉선사 주지가 맡았다. 자문·환수위원으로는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이이화 고구려재단 이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배현숙 계명문화대 교수, 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 강혜숙·김원웅·김영춘·노회찬·이광재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들이 포진했다. 문만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이 실행위원장을 맡고, 혜문 봉선사 총무과장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사무처장·실장 등 여러 실행위원이 참여했다.

《조선왕조실록》 47책 환수가 90% 성사될 무렵, 일본이 환수 절차가 아닌 자율적 반환이란 외교적 술책으로 민간차원의 환수가 아닌 정부간 반환이 2006년 7월 7일에 이루어졌다. 실록환수위원회는 2006년 9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경복궁 흥례문 앞마당에서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출범으로 거듭 태어났다. 전례와 비슷하게 《조선왕실의궤》 책본이 2016년 5월 3일 일본에서 반환됨에 따라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은 기묘한 성과를 냈다. 이때 밀반출된 문화재는 ‘환수’(되찾아 옴)가 아닌 ‘반환’(되돌려 줌)으로 나쁜 선례를 남겼다.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한 남측 정부이지만, 그때 정부에서도 갑자기 로또 맞은 행운을 자기들만의 공치사로 누렸다.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되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공식 반환은 전모가 아니다. 그 당시 북측 조불련의 자주적 선언과 협조에 의한 남측 불교계의 헌신적 자세에 대해 일본 정부가 태도를 교묘하게 바꾼 것뿐이다. 2006년에 시작한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에 관한 숨은 노력들을 다시 정리하고, 2008년 한여름에 성사된 교류의 뒷이야기를 살펴본다.

해외 불법반출 문화재 환수운동을 위한 평양방문단(2008.8.5. 평양 순안국제공항). 사진=이지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에 보낸 북측 조불련의 전문(2006.5.27.). 사진=이지범



조불련 선택과 남측의 이행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에 대해 남북 불교계의 공조는 2006년 2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약칭 실록환수위원회)가 출범하기 21일 전의 일이다. 지금, 무협 소설처럼 공치사를 이야기하는 분들조차 희미해진 기억일 테다.

보이지 않는 선행 노력으로, 평양에서 미리 타이핑해 온 한 장의 전문이 금강산 교류회의에서 남측으로 전달됐다. 2006년 2월 10일 조불련 정서정 서기장의 명의로 된 그 전문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출범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다.”는 내용이다. 이 전문에 실린 남북공조의 뜻은 실록환수위원회 준비위가 향후, 추진사업의 실마리를 풀어낼 ‘비장의 카드’였던 셈이다.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백창기)는 북측 조불련과 2005년 3월 31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신도단체 교류회의’를 처음 가지면서 파트너십을 이뤘다. 같은 해 7월 1일 개성 신도대표자 회의에 이은 7월 22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금강산 신계사에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며 독자적인 교류 채널이 가동됐다.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가 북측과 교류 물꼬를 열어 두었기에 실록환수위원회도 조불련과의 직접 소통이 쉬워졌다.

2006년 3월 3일 실록환수위원회의 출범식을 앞두고, 북측 조불련이 단체 명의로 보낸 전문은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경유해 전달됐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회 앞.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되찾기 위한 운동에 나선 귀 환수추진위원회의 여러 관계자분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일본은 지난 세기 40여 년 동안 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넋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을 수많이 강탈하여 갔습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온갖 죄악은 반드시 계산되어야 하며 빼앗아간 문화유산은 무조건 전부 반환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식민지 노예의 문명을 강요당하며 수치와 굴욕에 젖어 살던 지난날의 약소 민족이 더는 아닙니다. 우리는 귀 환수추진위원회가 벌리고 있는 사업이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되찾고, 민족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애국애족적인 활동이라고 보면서 이에 전적인 지지와 련대성을 보냅니다. 북남불교도들이 힘을 합쳐 《북관대첩비》를 되찾아온 것처럼 《조선왕조실록》 되찾기 사업에서도 큰 성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불기 2550(2006)년 3월 1일”이라는 지지와 연대의 입장문을 보내왔다.

이런 사실은 2006년 5월 27일을 기해 “귀측(조계종 중앙신도회)에서 요청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앞으로 보내는 전문을 함께 보냅니다. 귀 중앙신도회의 앞길에 언제나 부처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정서정”과 “환수위원회의 애국적 실천행에 전적인 지지와 련대를 표시합니다. …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가 보낸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실록환수위원회는 같은 해 3월 중순말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 김순식·이춘희 변호사를 선임하고, 일본 법원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도쿄대 총장을 상대로 《조선왕조실록》 반환소송 청구를 비롯한 국외 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과 도쿄대학 시라토리 쿠라기치 등에 의해 강제로 반출돼 일본 도쿄대학 측이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47책은 2006년 7월 7일에,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던 한국도서 1,205책 등의 공식 반환은 2011년 12월 6일에 결행됐다.

당시에 문화재 환수는 아니었지만, 반환사업에는 재일동포 변호사인 김순식·이춘희 등 숨은 조력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일명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반환 청구권이 소멸한 상황에서 소송과 반환 운동 전개를 무의미하게 본 국내외 변호사들은 또 소송 상대가 일본 도쿄대학이라는 점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 도쿄도지사 이시하라의 조선인학교 폐쇄조치에 맞서 조총련계 학교인 ‘에다가와 학교’ 지키기에 앞장선 김순식 변호사는 현지 분위기와 아랑곳없이 후배인 이춘희 변호사를 소개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과 재일 조선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사회운동 차원에서 함께 힘을 합쳤다고 전한다.

흔히 일에는 경중·완급·선후의 과정이 있듯이 원래 목표에 차질이 생긴 실록환수위원회는 또 다른 사업을 추진했다. 《북관대첩비》(2005년)와 《조선왕조실록》(2006년)의 잘못된 반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 2006년 9월 14일 발족한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약칭 의궤환수위원회)는 이라크·이집트 등 자국 문화재가 불법 반출된 국가의 시민단체들과 연대했다. 당시에 “우리 것이 지구촌 어디에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곧 우리 것”이라는 중국 측의 소극적 대응에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하지만 남측 의궤환수위원회는 일본에 대해 문화재 반환 청구권의 실효성이 있는 북측(조불련)과의 공조를 적극 모색했다. 결과는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전면 중단된 가운데에도 평양에서 완성됐다. 조불련의 선택에 의해 통일전선부가 실질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민간차원에서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를 위한 남북공동 합의서가 처음 체결됐다.



남북공동 합의서 서명본 교환(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공동합의서(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예불 후 면담(2008.8.8. 보현사 대웅전. 우측에서 첫 번째 보현사 진명, 두 번째 보현사 청벽 부주지, 세 번째 인묵 경기도 봉선사 주지). 사진=이지범.



남북공조 사업의 모범 사례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남북공조 사업은 일제강점기에 무단 반출된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남북공동 합의서 체결이 대표적이다. 합의서는 2008년 8월 8일 저녁 7시부터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47층 레스토랑에서 열린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남북대표자 회의’에서 그날 저녁 8시 정각에 맞춰 수표(서명)됐다.

남북공조의 모범 사례인 남북대표자 회의는 평양의 여의도라 불리는 양각도국제호텔에서 열렸다. 호텔이 위치한 양각도는 대동강에 위치한 ‘섬의 모양이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상 47층과 지하 1층에 프랑스 기술진과 합작사업으로 건립돼 1995년 개관한 양각도국제호텔의 47층(흔히 48층)에서 열린 대표자 회의는 공교롭게도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의 개회식 날짜와 시간이 똑같다. 북측 조불련 정서정 서기장과 서철민 책임부원, 조불련 전국신도회 라영식 회장·리현숙 부회장·김명희 상무위원이 참석했다. 남측 의궤환수위원회에서는 인묵 봉선사 주지와 김원웅 환수위원회 공동대표, 법상·혜문 환수위원회 간사, 조계종 중앙신도회 손안식 상임부회장·이상근 사무총장·이지범 실장, 강성수·송영한 환수위 실행위원과 김윤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실장, 정락인 시사저널 기자 등 11명이 참가했다.

필자의 사회로 진행된 평양 남북대표자 회의는 호텔 개관 이래 처음으로 남측에서 만들어간 펼침막을 유리 벽면에 붙이고, 조인식 테이블을 설치해 환수위 활동 자료와 문헌을 펼쳤다. 양측 대표의 등단과 소개에 이어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과 김원웅 환수위원회 공동대표의 인사말, 라영식 조불련 전국신도회장과 인묵 환수위 공동대표가 축사를 했다. 그날 저녁 8시 정각에 맞춰서 양측은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공동합의서’에 각기 단체를 대표해 수표했다. 북측의 정서정 서기장은 조불련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라영식 회장은 조불련 전국신도회를 대표하여 그리고 남측의 김원웅 전 국회의원은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를 대표하여, 인묵 봉선사 주지는 문화재제자리찾기를 대표하여, 손안식 상임부회장이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대표하여 서명한 합의서는 정서정 서기장과 김원웅 공동대표가 서명본을 교환했다.

공동합의서에 “우리는 지난 세기 외세에 의해 강탈된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귀중한 문화재들을 되찾기 위한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절감해왔다. … 우리는 외세가 략탈해 간 문화재들의 조속한 반환을 위하여 우리 민족끼리 기치 밑에 더욱 굳게 련대해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① 남과 북은 외세가 강탈한 문화재 반환운동에 공동으로 협력한다. ② 남과 북은 공동으로 《조선왕실의궤》의 조속한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③ 남과 북은 일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개성 화장사 《패엽경》의 반환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④ 남과 북은 미국 보스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마탑형사리구》의 반환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⑤ 북과 남은 조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통하여 민족문화재가 전부 반환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한다. ⑥ 문화재 반환운동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량측은 필요한 때마다 적당한 장소에서 실무접촉을 가진다.”는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6개 항목이 체결됐다.

특히 대표자 회의에서 조불련은 일본 법원에 제출할 청구 소장에 관한 대리 위임장에 서명했고, 《조선왕실의궤》 공동반환 요청서를 작성 검토하고 완성했다. 또 이날 회의에서는 일본이 소·중학교 학생들에 대한 교육지침서인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명기 확정하고, 그에 대해 공식 발표한 것 등에 관하여 “일본의 독도강탈 책동을 단호히 규탄한다.”라는 제하의 북남불교도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조불련 전국신도회 김명희 상무위원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손안식 상임부회장이 함께 낭독했다.

남북교류에 최초란 수식어가 붙은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은 2008년 7월 24일 개성에서 예비 접촉을 하고, 8월 5일~9일까지 평양 방문을 통해 남북불교가 일체가 되었다. 8월 4일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사증(비자)을 받고, 8월 5일 평양에 들어가 조불련 청사를 방문, 법당에서 합동 법회와 간담회를 열었다. 실록환수위원회 활동과 반출문화재 도서 목록 등을 전달했다. 동국대는 《한국불교전서》(14권 전질)을 조불련과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했다. 8월 6~7일에는 평양 동명왕릉과 정릉사·조선중앙역사박물관 등을 방문하고, 7일 저녁에 평양-향산 고속도로를 통해 향산호텔에 도착해 1박, 8월 8일 오전에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합동 예불을 했다. 정서정 서기장이 전날 향산호텔 측에 요청한 일로, 그날 점심을 겸한 필자의 생일 잔칫상이 묘향산 만폭동계곡 모래톱에 차려졌고, 축하 노래와 호텔 측 봉사접대원 동무가 야생화를 꺾어 만든 꽃다발을 선물했다. 그날 오후, 평양으로 가는 길에 인묵 봉선사 주지와 혜문 환수위원회 간사 등은 평안남도 안주시 인근 고속도로변에서 운허 용하 강백의 고향인 서북쪽 정주지역을 향해 삼배의 예를 올렸다. 곧이어 평양 광법사에서 ‘첨향례불’(불단에 향 피워 예를 표함)을 마치고, 저녁 8시 양각도호텔에서 공동합의서를 체결했다.

이 시기의 국외 불법반출 문화재 환수운동을 위한 ‘평양 합의’와 공조는 이해당사자로서 해결방안을 만드는 실질적인 토대를 구축했다. 남측 의궤환수위원회의 실천이행으로부터 일본 궁내청 문고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2016년 5월 3일 반환되는 성과를 냈다. 이는 남북한 공조 사업의 대표적 선행사례로 남아 향후, 남북교류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불교 교류사를 다시금 정리하고, 세밀하게 기록하는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때다.

# 다음 편은 ‘2008년 개성관광 중단사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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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불법반출 문화재 환수운동을 위한 평양방문단(2008.8.5. 평양 순안국제공항). 사진=이지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에 보낸 북측 조불련의 전문(2006.5.27.). 사진=이지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에 보낸 북측 조불련의 전문(2006.5.27.). 사진=이지범

조불련 선택과 남측의 이행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에 대해 남북 불교계의 공조는 2006년 2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약칭 실록환수위원회)가 출범하기 21일 전의 일이다. 지금, 무협 소설처럼 공치사를 이야기하는 분들조차 희미해진 기억일 테다.

보이지 않는 선행 노력으로, 평양에서 미리 타이핑해 온 한 장의 전문이 금강산 교류회의에서 남측으로 전달됐다. 2006년 2월 10일 조불련 정서정 서기장의 명의로 된 그 전문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출범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다.”는 내용이다. 이 전문에 실린 남북공조의 뜻은 실록환수위원회 준비위가 향후, 추진사업의 실마리를 풀어낼 ‘비장의 카드’였던 셈이다.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백창기)는 북측 조불련과 2005년 3월 31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신도단체 교류회의’를 처음 가지면서 파트너십을 이뤘다. 같은 해 7월 1일 개성 신도대표자 회의에 이은 7월 22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금강산 신계사에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며 독자적인 교류 채널이 가동됐다.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가 북측과 교류 물꼬를 열어 두었기에 실록환수위원회도 조불련과의 직접 소통이 쉬워졌다.

2006년 3월 3일 실록환수위원회의 출범식을 앞두고, 북측 조불련이 단체 명의로 보낸 전문은 남측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경유해 전달됐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회 앞.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되찾기 위한 운동에 나선 귀 환수추진위원회의 여러 관계자분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일본은 지난 세기 40여 년 동안 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넋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을 수많이 강탈하여 갔습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온갖 죄악은 반드시 계산되어야 하며 빼앗아간 문화유산은 무조건 전부 반환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식민지 노예의 문명을 강요당하며 수치와 굴욕에 젖어 살던 지난날의 약소 민족이 더는 아닙니다. 우리는 귀 환수추진위원회가 벌리고 있는 사업이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되찾고, 민족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애국애족적인 활동이라고 보면서 이에 전적인 지지와 련대성을 보냅니다. 북남불교도들이 힘을 합쳐 《북관대첩비》를 되찾아온 것처럼 《조선왕조실록》 되찾기 사업에서도 큰 성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불기 2550(2006)년 3월 1일”이라는 지지와 연대의 입장문을 보내왔다.

이런 사실은 2006년 5월 27일을 기해 “귀측(조계종 중앙신도회)에서 요청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앞으로 보내는 전문을 함께 보냅니다. 귀 중앙신도회의 앞길에 언제나 부처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정서정”과 “환수위원회의 애국적 실천행에 전적인 지지와 련대를 표시합니다. …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가 보낸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실록환수위원회는 같은 해 3월 중순말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 김순식·이춘희 변호사를 선임하고, 일본 법원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도쿄대 총장을 상대로 《조선왕조실록》 반환소송 청구를 비롯한 국외 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과 도쿄대학 시라토리 쿠라기치 등에 의해 강제로 반출돼 일본 도쿄대학 측이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47책은 2006년 7월 7일에,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던 한국도서 1,205책 등의 공식 반환은 2011년 12월 6일에 결행됐다.

당시에 문화재 환수는 아니었지만, 반환사업에는 재일동포 변호사인 김순식·이춘희 등 숨은 조력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일명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반환 청구권이 소멸한 상황에서 소송과 반환 운동 전개를 무의미하게 본 국내외 변호사들은 또 소송 상대가 일본 도쿄대학이라는 점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 도쿄도지사 이시하라의 조선인학교 폐쇄조치에 맞서 조총련계 학교인 ‘에다가와 학교’ 지키기에 앞장선 김순식 변호사는 현지 분위기와 아랑곳없이 후배인 이춘희 변호사를 소개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과 재일 조선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사회운동 차원에서 함께 힘을 합쳤다고 전한다.

흔히 일에는 경중·완급·선후의 과정이 있듯이 원래 목표에 차질이 생긴 실록환수위원회는 또 다른 사업을 추진했다. 《북관대첩비》(2005년)와 《조선왕조실록》(2006년)의 잘못된 반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 2006년 9월 14일 발족한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약칭 의궤환수위원회)는 이라크·이집트 등 자국 문화재가 불법 반출된 국가의 시민단체들과 연대했다. 당시에 “우리 것이 지구촌 어디에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곧 우리 것”이라는 중국 측의 소극적 대응에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하지만 남측 의궤환수위원회는 일본에 대해 문화재 반환 청구권의 실효성이 있는 북측(조불련)과의 공조를 적극 모색했다. 결과는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전면 중단된 가운데에도 평양에서 완성됐다. 조불련의 선택에 의해 통일전선부가 실질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민간차원에서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를 위한 남북공동 합의서가 처음 체결됐다.

남북공동 합의서 서명본 교환(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남북공동 합의서 서명본 교환(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공동합의서(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공동합의서(2008.8.8.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사진=이지범.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예불 후 면담(2008.8.8. 보현사 대웅전. 우측에서 첫 번째 보현사 진명, 두 번째 보현사 청벽 부주지, 세 번째 인묵 경기도 봉선사 주지). 사진=이지범.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예불 후 면담(2008.8.8. 보현사 대웅전. 우측에서 첫 번째 보현사 진명, 두 번째 보현사 청벽 부주지, 세 번째 인묵 경기도 봉선사 주지). 사진=이지범.

남북공조 사업의 모범 사례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남북공조 사업은 일제강점기에 무단 반출된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남북공동 합의서 체결이 대표적이다. 합의서는 2008년 8월 8일 저녁 7시부터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47층 레스토랑에서 열린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남북대표자 회의’에서 그날 저녁 8시 정각에 맞춰 수표(서명)됐다.

남북공조의 모범 사례인 남북대표자 회의는 평양의 여의도라 불리는 양각도국제호텔에서 열렸다. 호텔이 위치한 양각도는 대동강에 위치한 ‘섬의 모양이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상 47층과 지하 1층에 프랑스 기술진과 합작사업으로 건립돼 1995년 개관한 양각도국제호텔의 47층(흔히 48층)에서 열린 대표자 회의는 공교롭게도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의 개회식 날짜와 시간이 똑같다. 북측 조불련 정서정 서기장과 서철민 책임부원, 조불련 전국신도회 라영식 회장·리현숙 부회장·김명희 상무위원이 참석했다. 남측 의궤환수위원회에서는 인묵 봉선사 주지와 김원웅 환수위원회 공동대표, 법상·혜문 환수위원회 간사, 조계종 중앙신도회 손안식 상임부회장·이상근 사무총장·이지범 실장, 강성수·송영한 환수위 실행위원과 김윤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실장, 정락인 시사저널 기자 등 11명이 참가했다.

필자의 사회로 진행된 평양 남북대표자 회의는 호텔 개관 이래 처음으로 남측에서 만들어간 펼침막을 유리 벽면에 붙이고, 조인식 테이블을 설치해 환수위 활동 자료와 문헌을 펼쳤다. 양측 대표의 등단과 소개에 이어 정서정 조불련 서기장과 김원웅 환수위원회 공동대표의 인사말, 라영식 조불련 전국신도회장과 인묵 환수위 공동대표가 축사를 했다. 그날 저녁 8시 정각에 맞춰서 양측은 ‘해외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한 공동합의서’에 각기 단체를 대표해 수표했다. 북측의 정서정 서기장은 조불련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라영식 회장은 조불련 전국신도회를 대표하여 그리고 남측의 김원웅 전 국회의원은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를 대표하여, 인묵 봉선사 주지는 문화재제자리찾기를 대표하여, 손안식 상임부회장이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대표하여 서명한 합의서는 정서정 서기장과 김원웅 공동대표가 서명본을 교환했다.

공동합의서에 “우리는 지난 세기 외세에 의해 강탈된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귀중한 문화재들을 되찾기 위한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절감해왔다. … 우리는 외세가 략탈해 간 문화재들의 조속한 반환을 위하여 우리 민족끼리 기치 밑에 더욱 굳게 련대해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① 남과 북은 외세가 강탈한 문화재 반환운동에 공동으로 협력한다. ② 남과 북은 공동으로 《조선왕실의궤》의 조속한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③ 남과 북은 일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개성 화장사 《패엽경》의 반환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④ 남과 북은 미국 보스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마탑형사리구》의 반환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⑤ 북과 남은 조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통하여 민족문화재가 전부 반환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한다. ⑥ 문화재 반환운동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량측은 필요한 때마다 적당한 장소에서 실무접촉을 가진다.”는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6개 항목이 체결됐다.

특히 대표자 회의에서 조불련은 일본 법원에 제출할 청구 소장에 관한 대리 위임장에 서명했고, 《조선왕실의궤》 공동반환 요청서를 작성 검토하고 완성했다. 또 이날 회의에서는 일본이 소·중학교 학생들에 대한 교육지침서인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명기 확정하고, 그에 대해 공식 발표한 것 등에 관하여 “일본의 독도강탈 책동을 단호히 규탄한다.”라는 제하의 북남불교도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조불련 전국신도회 김명희 상무위원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손안식 상임부회장이 함께 낭독했다.

남북교류에 최초란 수식어가 붙은 국외 약탈문화재 환수사업은 2008년 7월 24일 개성에서 예비 접촉을 하고, 8월 5일~9일까지 평양 방문을 통해 남북불교가 일체가 되었다. 8월 4일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사증(비자)을 받고, 8월 5일 평양에 들어가 조불련 청사를 방문, 법당에서 합동 법회와 간담회를 열었다. 실록환수위원회 활동과 반출문화재 도서 목록 등을 전달했다. 동국대는 《한국불교전서》(14권 전질)을 조불련과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했다. 8월 6~7일에는 평양 동명왕릉과 정릉사·조선중앙역사박물관 등을 방문하고, 7일 저녁에 평양-향산 고속도로를 통해 향산호텔에 도착해 1박, 8월 8일 오전에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합동 예불을 했다. 정서정 서기장이 전날 향산호텔 측에 요청한 일로, 그날 점심을 겸한 필자의 생일 잔칫상이 묘향산 만폭동계곡 모래톱에 차려졌고, 축하 노래와 호텔 측 봉사접대원 동무가 야생화를 꺾어 만든 꽃다발을 선물했다. 그날 오후, 평양으로 가는 길에 인묵 봉선사 주지와 혜문 환수위원회 간사 등은 평안남도 안주시 인근 고속도로변에서 운허 용하 강백의 고향인 서북쪽 정주지역을 향해 삼배의 예를 올렸다. 곧이어 평양 광법사에서 ‘첨향례불’(불단에 향 피워 예를 표함)을 마치고, 저녁 8시 양각도호텔에서 공동합의서를 체결했다.

이 시기의 국외 불법반출 문화재 환수운동을 위한 ‘평양 합의’와 공조는 이해당사자로서 해결방안을 만드는 실질적인 토대를 구축했다. 남측 의궤환수위원회의 실천이행으로부터 일본 궁내청 문고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2016년 5월 3일 반환되는 성과를 냈다. 이는 남북한 공조 사업의 대표적 선행사례로 남아 향후, 남북교류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불교 교류사를 다시금 정리하고, 세밀하게 기록하는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때다.

# 다음 편은 ‘2008년 개성관광 중단사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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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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