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6.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6.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8.3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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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몰랐을까?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아도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이제는 각자 기둥에 서로 발이 묶여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지도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사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랑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줄을


아주 먼 길을 떠나간 친구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 사이
그때 그 모습 찾으려
그때 그 목소리 들으려
애를 써 봐도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은
만나는 순간조차 중력에 사과 떨어 지듯 시간을 묶어 함께 달려간다
 

눈에 콩깍지 쓰이고
심장이 지멋대로 널뛰던 청춘아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세진 당신 목소리보다
그리운 손만 잡아도 찌릿찌릿 전기 오던 그날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작가의 변
왜 뜬 끔 없이 사랑 타령이냐? 물론 나이 들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앞서가는 서양 노인네들을 아내와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부러워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장이 저 혼자 쿵쾅쿵쾅 큰 북을 울리면서 사랑을 알렸지만. 그것을 모두 다 고백했다가는 우스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속으로 삭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어릴 때 함께 놀던 소꿉친구 재숙이, 금래 누나, 동네에서 내가 만날 수 있던 또래의 친구들을 거울처럼 마음에 담아 두었나 봅니다. 시골의 작은 동네 지금처럼 컴퓨터도, TV도, 게임기도 없던 시절 아니 손전화는커녕 선이 달리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유선 전화도 없던 시골살이였으니 눈에 담아둔 아름다움이 마음에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골 아이에게 백옥처럼 흰 피부에 늘씬한 키 선글라스까지 끼고 소풍 날 나타난 선생님이 교실에서 강단에 서서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고 화사한 날개를 단 천사같이 보였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었다. 늘 절골로 가는 소풍, 엄마 대신 늘 소풍에 내 손을 잡고 가 주던 누이, 이 모든 기억과 함께 화사한 선생님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창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돌 틈과 나무껍질 틈새에 숨겨둔 보물을 찾지 못해 찔찔 짜던 국민학생에게 찾은 보물을 건네줄지 알던 재숙이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몇일 전 한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를 만나 저녁 시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 친구를 만난 것인지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으로 가서 나의 모습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가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보기에도 잘사는 모습을 들으면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은 아마도 아내가 틈만 나면 나에게 되새기는 아파트를 판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부쩍이나 내가 사는 리치몬드 도시 내에 아파트 건축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살 우리 이름의 아파트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거리에 사는 것은 아니고 렌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늙어서도 계속 렌트 비를 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내와 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약된 것이리라. 새들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어도 비를 막지 못하는 집을 짓고도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면서 잘도 산다. 냉장고가 없는 산속의 동물들도 그날 그날 배고품과 허기는 물론 목마름까지도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취하면서 잘도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냉장고도 부족해 냉동고에 가득가득 쟁여 놓고 살아간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며 요동치는 연어를 길목에서 지키고 있던 곰이 잡아먹는 것을 보면 자연의 법칙, 약육강식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먹을 것을 냉장고 냉동고에 쌓아 두고, 입을 것을 옷장에 잔뜩 쌓아 두는 것으로 부족해 집을 수 십채 씩 사서 쌓아 두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단물을 쪽쪽 빨아 먹듯이 고혈을 빨아내는 인간들도 많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릴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 폰, 노트북, 컴퓨터, 도어락, 전기 차, 게임기, 충전기, 선풍기, 에어컨, 에어 플라이기, 오븐, 전자렌지, 토스터기, 청소기, 세탁기, 세척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한순간이라도 내 주변에 내 손안에 없으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문명의 이기들도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노래가 좋아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의 드라마가 너무 좋아 저 성우는 정말 행복하겠다. 라디오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그리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해체하고 안에 이상한 전자 기기들이 납땜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TV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는 세상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현실과 드라마 속을 혼돈하기도 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로봇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 될 수도 없다.







한때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빠진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 삐삐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공중전화로 확인하던 수많은 비지니스맨들이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달에 인간들의 정착 촌을 만들고 싶어 한다. 달 여행을 하기 위해 수백만 불을 기꺼이 내놓는 많은 부자가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고 편리해진 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자연을 동경하여 휴가 때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하려고 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거나 등짐으로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많은 사람은 과거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마차 박제라도 한 것처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행복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자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배부름도 불행할 수 있다. 너무 과식하고 괴로워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새는 이빨이 없는 데도 어떻게 생선을 꿀꺽하고도 소화해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새에게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서 우리의 엄마들이 아가들에게 잘근잘근 씹어서 아가의 입에 넣어 주던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새도 아기새는 어미가 먹었다가 다시 아가 새에게 넣어 주면서 자신의 소화액을 발라 더 소화를 잘되게 하는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 연기법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덧없는 일이다. 즐겁고, 괴로운 일들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를 잡고 사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늘 편리와 즐거움을 찾는 현대에는 미각을 추구하는 많은 유명 식당과 유명 조리사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의 말들이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논하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요소 즉 무명과 정견으로 대비되는 알지 못함과 아는 것, 몰라서 업을 쌓는 일, 과거 생의 업…. 사실 이생의 삶도 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눈, 귀, 코, 혀, 몸,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개구리알이 올챙이가 되어 가듯 사람도 10달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수없이 변화한다. 심장이 뛰고 손, 발이 생기고 눈 코, 귀 등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들은 가슴이 뛴다.

눈, 코, 귀, 혀, 몸 등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이 없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고 냄새를 맡고, 듣고, 혀의 감각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삶의 낙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도 많다. 탐진치도 이 기본 위에 탄생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반되지만 괴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아파트나 명품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과는 비슷한 것이다.

숨 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있고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아주 많은 인과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 킨 실타래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간다. 매듭을 풀어야 쓸 수 있는 실타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지만 삶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이다.

부탄이 삶의 행복 지수가 늘 높게 나오는 것은 그 삶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았다. 하지만 손전화가 없으면 나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의 세태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은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배고픔을 달랠 만큼만 먹는 새나 야생 동물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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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몰랐을까?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아도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이제는 각자 기둥에 서로 발이 묶여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지도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사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랑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줄을

아주 먼 길을 떠나간 친구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 사이
그때 그 모습 찾으려
그때 그 목소리 들으려
애를 써 봐도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은
만나는 순간조차 중력에 사과 떨어 지듯 시간을 묶어 함께 달려간다
 

눈에 콩깍지 쓰이고
심장이 지멋대로 널뛰던 청춘아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세진 당신 목소리보다
그리운 손만 잡아도 찌릿찌릿 전기 오던 그날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그때는 왜 몰랐을까?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아도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이제는 각자 기둥에 서로 발이 묶여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지도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사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랑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줄을


아주 먼 길을 떠나간 친구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 사이
그때 그 모습 찾으려
그때 그 목소리 들으려
애를 써 봐도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은
만나는 순간조차 중력에 사과 떨어 지듯 시간을 묶어 함께 달려간다
 

눈에 콩깍지 쓰이고
심장이 지멋대로 널뛰던 청춘아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세진 당신 목소리보다
그리운 손만 잡아도 찌릿찌릿 전기 오던 그날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작가의 변
왜 뜬 끔 없이 사랑 타령이냐? 물론 나이 들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앞서가는 서양 노인네들을 아내와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부러워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장이 저 혼자 쿵쾅쿵쾅 큰 북을 울리면서 사랑을 알렸지만. 그것을 모두 다 고백했다가는 우스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속으로 삭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어릴 때 함께 놀던 소꿉친구 재숙이, 금래 누나, 동네에서 내가 만날 수 있던 또래의 친구들을 거울처럼 마음에 담아 두었나 봅니다. 시골의 작은 동네 지금처럼 컴퓨터도, TV도, 게임기도 없던 시절 아니 손전화는커녕 선이 달리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유선 전화도 없던 시골살이였으니 눈에 담아둔 아름다움이 마음에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골 아이에게 백옥처럼 흰 피부에 늘씬한 키 선글라스까지 끼고 소풍 날 나타난 선생님이 교실에서 강단에 서서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고 화사한 날개를 단 천사같이 보였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었다. 늘 절골로 가는 소풍, 엄마 대신 늘 소풍에 내 손을 잡고 가 주던 누이, 이 모든 기억과 함께 화사한 선생님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창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돌 틈과 나무껍질 틈새에 숨겨둔 보물을 찾지 못해 찔찔 짜던 국민학생에게 찾은 보물을 건네줄지 알던 재숙이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몇일 전 한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를 만나 저녁 시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 친구를 만난 것인지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으로 가서 나의 모습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가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보기에도 잘사는 모습을 들으면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은 아마도 아내가 틈만 나면 나에게 되새기는 아파트를 판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부쩍이나 내가 사는 리치몬드 도시 내에 아파트 건축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살 우리 이름의 아파트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거리에 사는 것은 아니고 렌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늙어서도 계속 렌트 비를 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내와 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약된 것이리라. 새들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어도 비를 막지 못하는 집을 짓고도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면서 잘도 산다. 냉장고가 없는 산속의 동물들도 그날 그날 배고품과 허기는 물론 목마름까지도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취하면서 잘도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냉장고도 부족해 냉동고에 가득가득 쟁여 놓고 살아간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며 요동치는 연어를 길목에서 지키고 있던 곰이 잡아먹는 것을 보면 자연의 법칙, 약육강식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먹을 것을 냉장고 냉동고에 쌓아 두고, 입을 것을 옷장에 잔뜩 쌓아 두는 것으로 부족해 집을 수 십채 씩 사서 쌓아 두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단물을 쪽쪽 빨아 먹듯이 고혈을 빨아내는 인간들도 많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릴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 폰, 노트북, 컴퓨터, 도어락, 전기 차, 게임기, 충전기, 선풍기, 에어컨, 에어 플라이기, 오븐, 전자렌지, 토스터기, 청소기, 세탁기, 세척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한순간이라도 내 주변에 내 손안에 없으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문명의 이기들도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노래가 좋아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의 드라마가 너무 좋아 저 성우는 정말 행복하겠다. 라디오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그리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해체하고 안에 이상한 전자 기기들이 납땜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TV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는 세상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현실과 드라마 속을 혼돈하기도 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로봇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 될 수도 없다.







한때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빠진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 삐삐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공중전화로 확인하던 수많은 비지니스맨들이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달에 인간들의 정착 촌을 만들고 싶어 한다. 달 여행을 하기 위해 수백만 불을 기꺼이 내놓는 많은 부자가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고 편리해진 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자연을 동경하여 휴가 때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하려고 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거나 등짐으로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많은 사람은 과거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마차 박제라도 한 것처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행복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자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배부름도 불행할 수 있다. 너무 과식하고 괴로워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새는 이빨이 없는 데도 어떻게 생선을 꿀꺽하고도 소화해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새에게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서 우리의 엄마들이 아가들에게 잘근잘근 씹어서 아가의 입에 넣어 주던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새도 아기새는 어미가 먹었다가 다시 아가 새에게 넣어 주면서 자신의 소화액을 발라 더 소화를 잘되게 하는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 연기법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덧없는 일이다. 즐겁고, 괴로운 일들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를 잡고 사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늘 편리와 즐거움을 찾는 현대에는 미각을 추구하는 많은 유명 식당과 유명 조리사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의 말들이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논하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요소 즉 무명과 정견으로 대비되는 알지 못함과 아는 것, 몰라서 업을 쌓는 일, 과거 생의 업…. 사실 이생의 삶도 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눈, 귀, 코, 혀, 몸,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개구리알이 올챙이가 되어 가듯 사람도 10달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수없이 변화한다. 심장이 뛰고 손, 발이 생기고 눈 코, 귀 등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들은 가슴이 뛴다.

눈, 코, 귀, 혀, 몸 등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이 없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고 냄새를 맡고, 듣고, 혀의 감각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삶의 낙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도 많다. 탐진치도 이 기본 위에 탄생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반되지만 괴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아파트나 명품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과는 비슷한 것이다.

숨 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있고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아주 많은 인과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 킨 실타래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간다. 매듭을 풀어야 쓸 수 있는 실타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지만 삶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이다.

부탄이 삶의 행복 지수가 늘 높게 나오는 것은 그 삶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았다. 하지만 손전화가 없으면 나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의 세태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은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배고픔을 달랠 만큼만 먹는 새나 야생 동물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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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뜬 끔 없이 사랑 타령이냐? 물론 나이 들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앞서가는 서양 노인네들을 아내와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부러워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장이 저 혼자 쿵쾅쿵쾅 큰 북을 울리면서 사랑을 알렸지만. 그것을 모두 다 고백했다가는 우스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속으로 삭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어릴 때 함께 놀던 소꿉친구 재숙이, 금래 누나, 동네에서 내가 만날 수 있던 또래의 친구들을 거울처럼 마음에 담아 두었나 봅니다. 시골의 작은 동네 지금처럼 컴퓨터도, TV도, 게임기도 없던 시절 아니 손전화는커녕 선이 달리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유선 전화도 없던 시골살이였으니 눈에 담아둔 아름다움이 마음에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골 아이에게 백옥처럼 흰 피부에 늘씬한 키 선글라스까지 끼고 소풍 날 나타난 선생님이 교실에서 강단에 서서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고 화사한 날개를 단 천사같이 보였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었다. 늘 절골로 가는 소풍, 엄마 대신 늘 소풍에 내 손을 잡고 가 주던 누이, 이 모든 기억과 함께 화사한 선생님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창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돌 틈과 나무껍질 틈새에 숨겨둔 보물을 찾지 못해 찔찔 짜던 국민학생에게 찾은 보물을 건네줄지 알던 재숙이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몇일 전 한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를 만나 저녁 시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 친구를 만난 것인지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으로 가서 나의 모습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가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보기에도 잘사는 모습을 들으면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은 아마도 아내가 틈만 나면 나에게 되새기는 아파트를 판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부쩍이나 내가 사는 리치몬드 도시 내에 아파트 건축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살 우리 이름의 아파트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거리에 사는 것은 아니고 렌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늙어서도 계속 렌트 비를 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내와 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약된 것이리라. 새들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어도 비를 막지 못하는 집을 짓고도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면서 잘도 산다. 냉장고가 없는 산속의 동물들도 그날 그날 배고품과 허기는 물론 목마름까지도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취하면서 잘도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냉장고도 부족해 냉동고에 가득가득 쟁여 놓고 살아간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며 요동치는 연어를 길목에서 지키고 있던 곰이 잡아먹는 것을 보면 자연의 법칙, 약육강식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먹을 것을 냉장고 냉동고에 쌓아 두고, 입을 것을 옷장에 잔뜩 쌓아 두는 것으로 부족해 집을 수 십채 씩 사서 쌓아 두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단물을 쪽쪽 빨아 먹듯이 고혈을 빨아내는 인간들도 많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릴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 폰, 노트북, 컴퓨터, 도어락, 전기 차, 게임기, 충전기, 선풍기, 에어컨, 에어 플라이기, 오븐, 전자렌지, 토스터기, 청소기, 세탁기, 세척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한순간이라도 내 주변에 내 손안에 없으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문명의 이기들도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노래가 좋아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의 드라마가 너무 좋아 저 성우는 정말 행복하겠다. 라디오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그리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해체하고 안에 이상한 전자 기기들이 납땜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TV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는 세상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현실과 드라마 속을 혼돈하기도 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로봇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 될 수도 없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아도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이제는 각자 기둥에 서로 발이 묶여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지도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사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랑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줄을


아주 먼 길을 떠나간 친구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 사이
그때 그 모습 찾으려
그때 그 목소리 들으려
애를 써 봐도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은
만나는 순간조차 중력에 사과 떨어 지듯 시간을 묶어 함께 달려간다
 

눈에 콩깍지 쓰이고
심장이 지멋대로 널뛰던 청춘아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세진 당신 목소리보다
그리운 손만 잡아도 찌릿찌릿 전기 오던 그날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작가의 변
왜 뜬 끔 없이 사랑 타령이냐? 물론 나이 들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앞서가는 서양 노인네들을 아내와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부러워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장이 저 혼자 쿵쾅쿵쾅 큰 북을 울리면서 사랑을 알렸지만. 그것을 모두 다 고백했다가는 우스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속으로 삭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어릴 때 함께 놀던 소꿉친구 재숙이, 금래 누나, 동네에서 내가 만날 수 있던 또래의 친구들을 거울처럼 마음에 담아 두었나 봅니다. 시골의 작은 동네 지금처럼 컴퓨터도, TV도, 게임기도 없던 시절 아니 손전화는커녕 선이 달리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유선 전화도 없던 시골살이였으니 눈에 담아둔 아름다움이 마음에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골 아이에게 백옥처럼 흰 피부에 늘씬한 키 선글라스까지 끼고 소풍 날 나타난 선생님이 교실에서 강단에 서서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고 화사한 날개를 단 천사같이 보였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었다. 늘 절골로 가는 소풍, 엄마 대신 늘 소풍에 내 손을 잡고 가 주던 누이, 이 모든 기억과 함께 화사한 선생님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창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돌 틈과 나무껍질 틈새에 숨겨둔 보물을 찾지 못해 찔찔 짜던 국민학생에게 찾은 보물을 건네줄지 알던 재숙이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몇일 전 한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를 만나 저녁 시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 친구를 만난 것인지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으로 가서 나의 모습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가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보기에도 잘사는 모습을 들으면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은 아마도 아내가 틈만 나면 나에게 되새기는 아파트를 판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부쩍이나 내가 사는 리치몬드 도시 내에 아파트 건축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살 우리 이름의 아파트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거리에 사는 것은 아니고 렌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늙어서도 계속 렌트 비를 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내와 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약된 것이리라. 새들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어도 비를 막지 못하는 집을 짓고도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면서 잘도 산다. 냉장고가 없는 산속의 동물들도 그날 그날 배고품과 허기는 물론 목마름까지도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취하면서 잘도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냉장고도 부족해 냉동고에 가득가득 쟁여 놓고 살아간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며 요동치는 연어를 길목에서 지키고 있던 곰이 잡아먹는 것을 보면 자연의 법칙, 약육강식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먹을 것을 냉장고 냉동고에 쌓아 두고, 입을 것을 옷장에 잔뜩 쌓아 두는 것으로 부족해 집을 수 십채 씩 사서 쌓아 두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단물을 쪽쪽 빨아 먹듯이 고혈을 빨아내는 인간들도 많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릴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 폰, 노트북, 컴퓨터, 도어락, 전기 차, 게임기, 충전기, 선풍기, 에어컨, 에어 플라이기, 오븐, 전자렌지, 토스터기, 청소기, 세탁기, 세척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한순간이라도 내 주변에 내 손안에 없으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문명의 이기들도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노래가 좋아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의 드라마가 너무 좋아 저 성우는 정말 행복하겠다. 라디오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그리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해체하고 안에 이상한 전자 기기들이 납땜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TV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는 세상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현실과 드라마 속을 혼돈하기도 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로봇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 될 수도 없다.







한때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빠진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 삐삐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공중전화로 확인하던 수많은 비지니스맨들이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달에 인간들의 정착 촌을 만들고 싶어 한다. 달 여행을 하기 위해 수백만 불을 기꺼이 내놓는 많은 부자가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고 편리해진 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자연을 동경하여 휴가 때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하려고 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거나 등짐으로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많은 사람은 과거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마차 박제라도 한 것처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행복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자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배부름도 불행할 수 있다. 너무 과식하고 괴로워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새는 이빨이 없는 데도 어떻게 생선을 꿀꺽하고도 소화해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새에게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서 우리의 엄마들이 아가들에게 잘근잘근 씹어서 아가의 입에 넣어 주던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새도 아기새는 어미가 먹었다가 다시 아가 새에게 넣어 주면서 자신의 소화액을 발라 더 소화를 잘되게 하는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 연기법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덧없는 일이다. 즐겁고, 괴로운 일들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를 잡고 사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늘 편리와 즐거움을 찾는 현대에는 미각을 추구하는 많은 유명 식당과 유명 조리사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의 말들이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논하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요소 즉 무명과 정견으로 대비되는 알지 못함과 아는 것, 몰라서 업을 쌓는 일, 과거 생의 업…. 사실 이생의 삶도 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눈, 귀, 코, 혀, 몸,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개구리알이 올챙이가 되어 가듯 사람도 10달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수없이 변화한다. 심장이 뛰고 손, 발이 생기고 눈 코, 귀 등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들은 가슴이 뛴다.

눈, 코, 귀, 혀, 몸 등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이 없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고 냄새를 맡고, 듣고, 혀의 감각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삶의 낙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도 많다. 탐진치도 이 기본 위에 탄생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반되지만 괴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아파트나 명품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과는 비슷한 것이다.

숨 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있고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아주 많은 인과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 킨 실타래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간다. 매듭을 풀어야 쓸 수 있는 실타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지만 삶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이다.

부탄이 삶의 행복 지수가 늘 높게 나오는 것은 그 삶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았다. 하지만 손전화가 없으면 나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의 세태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은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배고픔을 달랠 만큼만 먹는 새나 야생 동물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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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빠진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 삐삐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공중전화로 확인하던 수많은 비지니스맨들이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달에 인간들의 정착 촌을 만들고 싶어 한다. 달 여행을 하기 위해 수백만 불을 기꺼이 내놓는 많은 부자가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고 편리해진 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자연을 동경하여 휴가 때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하려고 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거나 등짐으로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많은 사람은 과거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마차 박제라도 한 것처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행복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자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배부름도 불행할 수 있다. 너무 과식하고 괴로워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새는 이빨이 없는 데도 어떻게 생선을 꿀꺽하고도 소화해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새에게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서 우리의 엄마들이 아가들에게 잘근잘근 씹어서 아가의 입에 넣어 주던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새도 아기새는 어미가 먹었다가 다시 아가 새에게 넣어 주면서 자신의 소화액을 발라 더 소화를 잘되게 하는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 연기법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덧없는 일이다. 즐겁고, 괴로운 일들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를 잡고 사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늘 편리와 즐거움을 찾는 현대에는 미각을 추구하는 많은 유명 식당과 유명 조리사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의 말들이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논하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요소 즉 무명과 정견으로 대비되는 알지 못함과 아는 것, 몰라서 업을 쌓는 일, 과거 생의 업…. 사실 이생의 삶도 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눈, 귀, 코, 혀, 몸,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개구리알이 올챙이가 되어 가듯 사람도 10달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수없이 변화한다. 심장이 뛰고 손, 발이 생기고 눈 코, 귀 등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들은 가슴이 뛴다.

눈, 코, 귀, 혀, 몸 등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이 없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고 냄새를 맡고, 듣고, 혀의 감각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삶의 낙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도 많다. 탐진치도 이 기본 위에 탄생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반되지만 괴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아파트나 명품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과는 비슷한 것이다.

숨 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있고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아주 많은 인과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 킨 실타래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간다. 매듭을 풀어야 쓸 수 있는 실타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지만 삶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이다.

부탄이 삶의 행복 지수가 늘 높게 나오는 것은 그 삶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았다. 하지만 손전화가 없으면 나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의 세태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은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배고픔을 달랠 만큼만 먹는 새나 야생 동물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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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몰랐을까?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아도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이제는 각자 기둥에 서로 발이 묶여
마주 서서 얼굴 바라보지도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사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랑이 그리도 가까이 있는 줄을


아주 먼 길을 떠나간 친구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 사이
그때 그 모습 찾으려
그때 그 목소리 들으려
애를 써 봐도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은
만나는 순간조차 중력에 사과 떨어 지듯 시간을 묶어 함께 달려간다
 

눈에 콩깍지 쓰이고
심장이 지멋대로 널뛰던 청춘아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세진 당신 목소리보다
그리운 손만 잡아도 찌릿찌릿 전기 오던 그날들이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작가의 변
왜 뜬 끔 없이 사랑 타령이냐? 물론 나이 들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앞서가는 서양 노인네들을 아내와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부러워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장이 저 혼자 쿵쾅쿵쾅 큰 북을 울리면서 사랑을 알렸지만. 그것을 모두 다 고백했다가는 우스운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속으로 삭이는 법부터 배워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어릴 때 함께 놀던 소꿉친구 재숙이, 금래 누나, 동네에서 내가 만날 수 있던 또래의 친구들을 거울처럼 마음에 담아 두었나 봅니다. 시골의 작은 동네 지금처럼 컴퓨터도, TV도, 게임기도 없던 시절 아니 손전화는커녕 선이 달리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유선 전화도 없던 시골살이였으니 눈에 담아둔 아름다움이 마음에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골 아이에게 백옥처럼 흰 피부에 늘씬한 키 선글라스까지 끼고 소풍 날 나타난 선생님이 교실에서 강단에 서서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고 화사한 날개를 단 천사같이 보였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것이었다. 늘 절골로 가는 소풍, 엄마 대신 늘 소풍에 내 손을 잡고 가 주던 누이, 이 모든 기억과 함께 화사한 선생님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창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돌 틈과 나무껍질 틈새에 숨겨둔 보물을 찾지 못해 찔찔 짜던 국민학생에게 찾은 보물을 건네줄지 알던 재숙이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몇일 전 한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를 만나 저녁 시간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던지. 친구를 만난 것인지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으로 가서 나의 모습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가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보기에도 잘사는 모습을 들으면서 나만 뒤처진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은 아마도 아내가 틈만 나면 나에게 되새기는 아파트를 판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부쩍이나 내가 사는 리치몬드 도시 내에 아파트 건축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살 우리 이름의 아파트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거리에 사는 것은 아니고 렌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늙어서도 계속 렌트 비를 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내와 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약된 것이리라. 새들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어도 비를 막지 못하는 집을 짓고도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면서 잘도 산다. 냉장고가 없는 산속의 동물들도 그날 그날 배고품과 허기는 물론 목마름까지도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취하면서 잘도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냉장고도 부족해 냉동고에 가득가득 쟁여 놓고 살아간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며 요동치는 연어를 길목에서 지키고 있던 곰이 잡아먹는 것을 보면 자연의 법칙, 약육강식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먹을 것을 냉장고 냉동고에 쌓아 두고, 입을 것을 옷장에 잔뜩 쌓아 두는 것으로 부족해 집을 수 십채 씩 사서 쌓아 두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단물을 쪽쪽 빨아 먹듯이 고혈을 빨아내는 인간들도 많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릴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손 폰, 노트북, 컴퓨터, 도어락, 전기 차, 게임기, 충전기, 선풍기, 에어컨, 에어 플라이기, 오븐, 전자렌지, 토스터기, 청소기, 세탁기, 세척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한순간이라도 내 주변에 내 손안에 없으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문명의 이기들도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노래가 좋아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의 드라마가 너무 좋아 저 성우는 정말 행복하겠다. 라디오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그리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해체하고 안에 이상한 전자 기기들이 납땜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TV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는 세상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현실과 드라마 속을 혼돈하기도 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로봇이 같을 수도 없고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 될 수도 없다.







한때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에 빠진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 삐삐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공중전화로 확인하던 수많은 비지니스맨들이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달에 인간들의 정착 촌을 만들고 싶어 한다. 달 여행을 하기 위해 수백만 불을 기꺼이 내놓는 많은 부자가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고 편리해진 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자연을 동경하여 휴가 때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하려고 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거나 등짐으로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많은 사람은 과거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마차 박제라도 한 것처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행복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자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배부름도 불행할 수 있다. 너무 과식하고 괴로워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새는 이빨이 없는 데도 어떻게 생선을 꿀꺽하고도 소화해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새에게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서 우리의 엄마들이 아가들에게 잘근잘근 씹어서 아가의 입에 넣어 주던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새도 아기새는 어미가 먹었다가 다시 아가 새에게 넣어 주면서 자신의 소화액을 발라 더 소화를 잘되게 하는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12 연기법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덧없는 일이다. 즐겁고, 괴로운 일들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만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를 잡고 사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늘 편리와 즐거움을 찾는 현대에는 미각을 추구하는 많은 유명 식당과 유명 조리사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의 말들이 유튜브를 통해 끊임없이 논하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요소 즉 무명과 정견으로 대비되는 알지 못함과 아는 것, 몰라서 업을 쌓는 일, 과거 생의 업…. 사실 이생의 삶도 돌아보면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눈, 귀, 코, 혀, 몸,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개구리알이 올챙이가 되어 가듯 사람도 10달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서 수없이 변화한다. 심장이 뛰고 손, 발이 생기고 눈 코, 귀 등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들은 가슴이 뛴다.

눈, 코, 귀, 혀, 몸 등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이 없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고 냄새를 맡고, 듣고, 혀의 감각으로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삶의 낙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도 많다. 탐진치도 이 기본 위에 탄생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반되지만 괴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아파트나 명품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과는 비슷한 것이다.

숨 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있고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아주 많은 인과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 킨 실타래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간다. 매듭을 풀어야 쓸 수 있는 실타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리거나 잘라 버리고 싶지만 삶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이다.

부탄이 삶의 행복 지수가 늘 높게 나오는 것은 그 삶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았다. 하지만 손전화가 없으면 나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요즘의 세태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은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배고픔을 달랠 만큼만 먹는 새나 야생 동물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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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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