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9. 2007년 내금강산 관광시대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9. 2007년 내금강산 관광시대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6.2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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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속살을 보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이란 노랫말처럼 금강산은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산천 유람의 최고 명승지로 꼽혔다. 그 이름도 열세 가지에 이를 만큼 유명하다.

38선 북쪽의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계절 따라 4색의 다른 이름은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금강·개골·열반·풍악·기달(怾怛)의 다섯 가지로 처음 기록됐다. 조선 초기부터 공식 기록된 금강산은 꽃과 새싹이 온산에 뒤덮이는 봄을 가리킨다. 녹음이 짙게 드리우는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단풍으로 물들므로 ‘풍악’,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바위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개골산’이라 불렀다. 산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개골산은 달리 ‘열반산’이라 불렀다.

금강산에 관한 가장 유명한 것은 ‘원생고려국 친견금강산’(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이란 글귀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소환한 말이다. 《태종실록》에는 1404년 9월 조정에서 하륜·이거이·성석린 등과 정책을 논하던 왕이 “중국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언에 말하기를, 중국인에게는 ‘고려국에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원(願)’이라 하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금강산이 동국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하륜은 그의 《송풍악승서》에서 “금강산이라 일컫는 것은 장경(藏經)의 설을 가탁한 것일 뿐이다.”라고 덧붙여 놓았다. 이때부터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개인 문집을 통해 널리 회자됐다.

겸재 정선이 1734년에 그린 《금강전도》를 보면, 금강산은 골산(바윗산)의 외금강과 육산(흙산)의 내금강으로 왜 나뉘는지를 알 수 있다. 기암절벽을 이루는 남성적 산악미의 외금강 구역과 달리 내금강은 여러 갈래 계곡과 수많은 폭포 등 우아한 여성적 계곡미가 일품이다. 또 장안사·금장암·표훈사·정양사·보덕굴·마하연 등 유명 사찰들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해방 후, 62년 만에 처음 열렸다. 2007년 6월 내금강 관광을 시행하면서 드디어 금강산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내금강의 부드러운 산세는 명승지 탐방과 성지순례에 즐거움을 더했다. 그때의 감동과 환희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금강산의 정상 비로봉 원경(2008.8). 사진=일본JS투어 홈페이지.





내금강 마하연의 옛 모습(1930년대). 사진=조선총독부 '유리원판목록집' 1권



금강산의 속살, 내금강산

“금강산은 결국 만폭동 계곡 하나를 보러 오는 것이다.”라고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한 말이다. 15세기 남효온의 《추강집》에는 “10여 리에 걸쳐 하나의 흰 바위가 끊어지지 않고 곳곳이 폭포이다. 그 아래는 깊은 못이고, 못 아래에 또한 폭포가 있으므로 골짜기 이름을 만폭동이라 하였으니, 폭포가 하나뿐이 아님을 표시한 것이다.” 1710년 겸재 정선은 “골짜기로 백 가지의 물이 쏟아지는데, 그 모습이 모두 달라서 ‘만폭동(萬瀑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천연기념물 제455호 내금강 만폭동의 8담(八潭)은 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거북담·배담·화룡담이 2km 계곡에 자리한다. 검푸른 용 같은 흑룡담, 비파 선율을 타는 비파담, 물안개가 푸른 파도 같은 벽파담, 하얀 눈을 뿜어내는 분설담, 보석처럼 아름다운 진주담, 거북바위가 머리를 들고 있는 구담(龜潭)을 지나 50m쯤 올라가면 못 모양이 배와 같이 생긴 선담(船潭)인데, 토사 등으로 모양이 변해서 배의 모양이 뚜렷하지 않다.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용이 입으로 불을 토해내는 것 같다는 화룡담이 제8담이다. 외금강의 상팔담과 구별하기 위해 내금강 팔담이라 부른다, 골짜기의 너비는 일정하지 않고, 깊이는 50∼70m로 골짜기 양사면은 거의 절벽에 가깝다. 여기에다 표훈사・정양사・보덕암・마하연 칠성각・불지암과 묘길상이 현존하는 ‘금강산의 하얀 속살’과도 같은 내금강은 2007년 6월 시범 관광으로 잠시 열렸던 적이 있다.

봉래와 선산이라 불린 금강산은 고려 후기 이곡의 《가정집》에 신선이 사는 ‘선산’이라 했다. “신선이 산다.”는 바다 섬으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는 중국의 산 이름이다. 7세기 말, 신라 의상대사가 경전을 번역하던 시대에 봉래산의 이름 대신에 금강산을 《신역화엄경》에 포함한 때로부터 모든 경전에서 인용했다. 15세기 봉래 양사언에 의해 봉래산으로 더 알려진 이름이다. 그는 금강산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호를 ‘봉래’라 부르고 썼다. 《봉래집》 <금강산> 시에는 “세상 사람 이르는 말 내 들었노라. 고려국에 태어나기 소원이라고. 친히 금강산에 와서 바라보니, 만 이천 봉우리마다 백옥이로세.”

이처럼 백옥의 금강산이 만든 내금강 만폭동에서 볼 수 있는 파란 물색은 게르마늄 성분이 들어 있는 맑은 물이 하얀 바위 웅덩이에 담겨 더 파랗게 보는 착시현상이다. 눈조차 시린 여름날의 광경은 1894년 여름,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금강산으로의 여정》에서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 저 여름의 맛깔스러운 푸름 속으로. 이런 묘사는 한갓 카탈로그일 뿐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서양 여성으로 처음, 금강산을 네 차례 방문한 그녀가 다이아몬드 마운틴으로 소개한 금강산 여름의 녹색 바람은 신선들이 만든다고 해서 ‘봉래바람’이라 불렀다. 그 바람은 내금강 만폭동의 금강대 아래 너럭바위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1566년에 강원도 회양 부사로 부임한 봉래 양사언이 직접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를 말한다. 내금강 만폭동의 금강대 아래에 청룡담과 잇대어 있는 길이 200m, 너비 15m의 너럭바위에다 “봉래·풍악산은 으뜸의 조화를 이룬 동천이다.”라는 뜻의 한자, 여덟 글자를 새겨놓았다. 18세기쯤부터 이 글씨를 두고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중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라 말할 정도였다.

신선의 글씨로 만폭동 찬가의 백미로 불린 양사언의 여덟 글자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위에서 아래로 두 자씩, 네 줄로 썼는데 그중 원(元)자는 승천하는 용을 형상화했다. 허균은 1603년 금강산을 다녀가면서 쓴 《풍악기행》 <양봉래의 여덟 대자>에서 “싸우는 용이 산을 거머쥔 듯 그 필치 뚜렷하고, 바위 박차고 뛰는 사자인 양 만고의 으뜸 조각. 옥루몽의 홍혼탈(紅渾脫)이 칼춤 추듯 휘날리니, 신비하게 휘두른 솜씨 그 누가 따를 수 있으랴.”라며, 글씨의 주인공과 그 필력을 기록했다.

조선 후기의 윤휴는 《풍악록》에서 “글자 모양이 날아 움직이는 것 같아 볼 만했다.” 홍여하는 《풍악만록》에서 “필획이 기이하고 위엄이 있어 산중의 공안(公案)이 될 만하다.”라고 했다. 신품(神品)이라 알려진 양사언의 글씨가 있는 만폭동 계곡은 몸 노출을 심히 꺼렸던 사대부들과 점잔빼던 조선 선비들조차 열광하던 아웃도어의 현장이다. 조선 전기의 남효온은 1485년 금강산 유람에서 “보덕굴 근처 계곡에 드러누워 물장구를 쳤다.”라고 《유금강산기》에 기록할 만큼, 발만 씻는 탁족(濯足)을 넘어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었던 최고의 피서지였다.

그러나 옛 선인들이 하던 대로 지금의 내금강 만폭동에서 행동한다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어떤 남측 관광객이 무턱대고 내금강 계곡물에 손발을 씻는다면, 조국 강토에 ‘환경오염죄’를 범한 죄로 벌금 처분을 받게 될 것은 뻔하다. 천하명산 금강산 이야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표현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은 그간 달라진 국가 체제와 레저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적 체함일 것이다.



내금강 표훈사 반야보전과 석탑 전경. 사진=현대아산 홈페이지





내금강 조계종 성지순례단(2007.6.22. 표훈사 주지 청학대사 등). 사진=이지범



내금강까지 열린 관광길

1998년 11월 ‘금강호’가 처음 출항하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일시 중단되는 일도 있었지만, 2003년 9월 육로 관광이 시작하면서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찾았다. 또 2007년 6월 1일부터 금강산관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내금강 방문길이 열리면서 금강산의 안팎을 모두 꼼꼼히 구경하게 됐다.

특히 2007년 6월 22일에는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원로의원 지종·원명·법흥·천운·정무·활안·현해 등 내금강 성지순례단 160여 명이 왕복 8km에 달하는 내금강 코스를 거뜬히 소화했다. 마하연 터를 방문한 대표단 일행은 선방 터에 앉아 잠시 참선에 들며 옛 금강산인들을 추억했다. 이 시기에 도천 화엄사 조실은 수월 선사의 진영을 표훈사(주지 청학)에 기증하고, 일반에 공개돼 관심을 모았다.

내금강 방문코스는 외금강 온정각에서 출발, 관광 전용버스로 온정령과 철이령 108 구비를 넘어서 금강읍 마을 - 표훈사 주차장까지 47km 약 2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표훈사에서 금강문 바위 - 만폭동 금강대 - 내팔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 - 마하연 동구 삼거리 – 묘길상을 기점으로 회기하여 다시 보덕굴 - 표훈사 – 식사 – 백화암 부도밭 – 삼불암(三佛岩) – 울소(鳴淵) – 장안사 터까지 시범 관광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 내금강 탐방은 장안사에서 시작하거나 마치는 코스였다. 내금강에는 모두 8개 코스가 있는데, 2007년 6월 시범 관광은 만천동·만폭동·백운대 3개 코스를 가게 됐다. 당시의 북측 해설봉사원은 “이 방문코스는 내금강에서도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방을 한 분들에게) 어떻게 보셨습니까? … (서툰 말을 한 남측 기자에게) 아니, 기자가 그렇게 표현력이 딸려서 남측에 깊이 전달 잘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한 적도 있다.

표훈사 앞 만천 계곡에서 시작한 내금강 탐방은 절 동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금강문’이란 글자가 새겨진 돌문을 지나야 만폭동으로 들어간다. 내금강 절경의 시작점인 셈이다. 만폭 계곡의 연화담과 청룡담에 이르면 금강대 아래 너럭바위에 양사언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과 ‘만폭동’이라는 초서가 새겨져 있다. 광초체(狂草體)로 불리는 이 글씨는 내금강의 아름다움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 글씨로 영원히 남기기 위해 새긴 듯하다. 이곳에서 내팔담이 있는 만폭동이 시작된다. 하얗게 부서지는 계류와 옥빛의 여덟 곳의 소와 담(潭)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이어서 ‘금강의 심장’으로 불린 마하연 삼거리에서 칠성각을 만난다. 1909년에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233호 금강초롱 군락지가 있는 마하연 터 인근에 관음보살의 제자 남순동자 바위를 지나는 구간은 추사가 말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수류화개동”이다. 또 내금강에서 가장 험준한 산길로, 새나 다닐 수 있는 험한 길이라 하여 특별히 ‘둔행칠리(臀行七里)’라 부른다. 제석천의 궁전을 뜻하는 수미암과 바위로 된 수미탑 서쪽의 선암까지 구간이다. 1924년 춘원은 《금강산유기》에서 “(산길을) 내려오려면 엉덩이를 대고 걷는 데가 7리나 된다.”는 뜻이라 했다. 험한 바위 절벽이 많아 앞으로 갈 때 발로 더듬고, 손으로 붙잡고, 엉덩이를 바위에 기대어 넘어지고 미끄러지지 않게 7리의 노정을 눈감고 험한 길을 따라가므로 부른 지명이다.

그 산길 끝에 소광담이라는 소(沼)가 있다. 바로 옆, 미륵대 바위에 고려의 미소라 불린 묘길상(妙吉祥)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보존유적 제256호 묘길상은 1366년 나옹선사가 표훈사 16성상과 백화암 삼존불상과 같이 조성했다고 《유점사본말사지》에 기록됐다. 이곳을 기점으로 한 내금강 탐방코스는 “이 길로는 네발짐승들이 다닐 수 없었다. … 정작 가마를 탈 주인은 거의 절반이 걸어서 가야만 했다.”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회상했다.

내금강 팔담의 중간지점, 하얀 눈을 뿜어낸다는 분설담 출렁다리를 건너서 34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627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한 보덕암(窟)이다. 북측 안내원은 “내금강 구경 오시면, 다들 여기 보덕암만을 노리십네다.”라고 으뜸 경치를 자랑했다. 조선 후기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보덕굴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신의 조화와 귀신의 힘 같아 거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고 했다. 다시 표훈사로 돌아온 이들이 경내의 장수 샘물을 한 모금 마실 때 표훈사의 맛을 제대로 봤다고 한다.

18세기 어유봉의 《유금강산기》에 나오는 ‘그림자를 머금은 다리’인 함영교를 건너서 공터에서 식사한다. 돌다리가 1777년 홍수로 무너진 후, 오래된 외나무다리가 대신했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백화암 부도밭에 이른다. 1914년 3월 화재로 소실되고, 그 터에 서산대사비 등 3기와 사리탑 7기가 남아 있다. 옆에는 내금강의 일주문이라 불리는 보존유적 제309호 삼불암(三佛岩)이 있다. 18세기 윤사국이 삼불암 이름을 새겼다. 원뿔 모양의 커다란 바위 앞면에는 1366년 나옹 왕사가 새긴 석가모니불, 미륵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한다. 좌측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 입상과 뒷면에는 60명(座)의 보살상을 가지런히 새겼다. 삼불암에서 장안사 터로 가다 보면, 계곡 바위에 ‘명연(鳴淵)’이라는 옛 글씨가 있다. 또아리를 튼 울소(沼)는 신통하게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사람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지막 코스는 내금강의 바깥주인 장안사 터다. 보존유적 제96호로 지정된 장안사 터에는 여러 주춧돌, 소맷돌과 무경당 영운 대사 부도만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림에 그려 넣었던 ‘장안사 비홍교’는 1720년경 장맛비에 떠내려가고, 1747년 《해악전신첩》에 이미 없어진 다리를 커다랗게 그리고 그림 제목으로 썼다. 해방 이전까지 6전・7각・1문이던 장안사는 1951년 5월 폭격으로 엿새 동안 불에 탔다.

내금강에 들어갔던 그 하루는 탐방객의 가슴에 금강의 이름을 다시금 떠오르게 할 것만 같다. 당시 남측 사람들에게는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쯤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그 속살을 보려면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다음 편은 ‘2007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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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정상 비로봉 원경(2008.8). 사진=일본JS투어 홈페이지.
내금강 마하연의 옛 모습(1930년대). 사진=조선총독부 '유리원판목록집' 1권
내금강 마하연의 옛 모습(1930년대). 사진=조선총독부 '유리원판목록집' 1권

금강산의 속살, 내금강산

“금강산은 결국 만폭동 계곡 하나를 보러 오는 것이다.”라고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한 말이다. 15세기 남효온의 《추강집》에는 “10여 리에 걸쳐 하나의 흰 바위가 끊어지지 않고 곳곳이 폭포이다. 그 아래는 깊은 못이고, 못 아래에 또한 폭포가 있으므로 골짜기 이름을 만폭동이라 하였으니, 폭포가 하나뿐이 아님을 표시한 것이다.” 1710년 겸재 정선은 “골짜기로 백 가지의 물이 쏟아지는데, 그 모습이 모두 달라서 ‘만폭동(萬瀑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천연기념물 제455호 내금강 만폭동의 8담(八潭)은 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거북담·배담·화룡담이 2km 계곡에 자리한다. 검푸른 용 같은 흑룡담, 비파 선율을 타는 비파담, 물안개가 푸른 파도 같은 벽파담, 하얀 눈을 뿜어내는 분설담, 보석처럼 아름다운 진주담, 거북바위가 머리를 들고 있는 구담(龜潭)을 지나 50m쯤 올라가면 못 모양이 배와 같이 생긴 선담(船潭)인데, 토사 등으로 모양이 변해서 배의 모양이 뚜렷하지 않다.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용이 입으로 불을 토해내는 것 같다는 화룡담이 제8담이다. 외금강의 상팔담과 구별하기 위해 내금강 팔담이라 부른다, 골짜기의 너비는 일정하지 않고, 깊이는 50∼70m로 골짜기 양사면은 거의 절벽에 가깝다. 여기에다 표훈사・정양사・보덕암・마하연 칠성각・불지암과 묘길상이 현존하는 ‘금강산의 하얀 속살’과도 같은 내금강은 2007년 6월 시범 관광으로 잠시 열렸던 적이 있다.

봉래와 선산이라 불린 금강산은 고려 후기 이곡의 《가정집》에 신선이 사는 ‘선산’이라 했다. “신선이 산다.”는 바다 섬으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는 중국의 산 이름이다. 7세기 말, 신라 의상대사가 경전을 번역하던 시대에 봉래산의 이름 대신에 금강산을 《신역화엄경》에 포함한 때로부터 모든 경전에서 인용했다. 15세기 봉래 양사언에 의해 봉래산으로 더 알려진 이름이다. 그는 금강산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호를 ‘봉래’라 부르고 썼다. 《봉래집》 <금강산> 시에는 “세상 사람 이르는 말 내 들었노라. 고려국에 태어나기 소원이라고. 친히 금강산에 와서 바라보니, 만 이천 봉우리마다 백옥이로세.”

이처럼 백옥의 금강산이 만든 내금강 만폭동에서 볼 수 있는 파란 물색은 게르마늄 성분이 들어 있는 맑은 물이 하얀 바위 웅덩이에 담겨 더 파랗게 보는 착시현상이다. 눈조차 시린 여름날의 광경은 1894년 여름,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금강산으로의 여정》에서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 저 여름의 맛깔스러운 푸름 속으로. 이런 묘사는 한갓 카탈로그일 뿐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서양 여성으로 처음, 금강산을 네 차례 방문한 그녀가 다이아몬드 마운틴으로 소개한 금강산 여름의 녹색 바람은 신선들이 만든다고 해서 ‘봉래바람’이라 불렀다. 그 바람은 내금강 만폭동의 금강대 아래 너럭바위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1566년에 강원도 회양 부사로 부임한 봉래 양사언이 직접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를 말한다. 내금강 만폭동의 금강대 아래에 청룡담과 잇대어 있는 길이 200m, 너비 15m의 너럭바위에다 “봉래·풍악산은 으뜸의 조화를 이룬 동천이다.”라는 뜻의 한자, 여덟 글자를 새겨놓았다. 18세기쯤부터 이 글씨를 두고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중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라 말할 정도였다.

신선의 글씨로 만폭동 찬가의 백미로 불린 양사언의 여덟 글자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위에서 아래로 두 자씩, 네 줄로 썼는데 그중 원(元)자는 승천하는 용을 형상화했다. 허균은 1603년 금강산을 다녀가면서 쓴 《풍악기행》 <양봉래의 여덟 대자>에서 “싸우는 용이 산을 거머쥔 듯 그 필치 뚜렷하고, 바위 박차고 뛰는 사자인 양 만고의 으뜸 조각. 옥루몽의 홍혼탈(紅渾脫)이 칼춤 추듯 휘날리니, 신비하게 휘두른 솜씨 그 누가 따를 수 있으랴.”라며, 글씨의 주인공과 그 필력을 기록했다.

조선 후기의 윤휴는 《풍악록》에서 “글자 모양이 날아 움직이는 것 같아 볼 만했다.” 홍여하는 《풍악만록》에서 “필획이 기이하고 위엄이 있어 산중의 공안(公案)이 될 만하다.”라고 했다. 신품(神品)이라 알려진 양사언의 글씨가 있는 만폭동 계곡은 몸 노출을 심히 꺼렸던 사대부들과 점잔빼던 조선 선비들조차 열광하던 아웃도어의 현장이다. 조선 전기의 남효온은 1485년 금강산 유람에서 “보덕굴 근처 계곡에 드러누워 물장구를 쳤다.”라고 《유금강산기》에 기록할 만큼, 발만 씻는 탁족(濯足)을 넘어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었던 최고의 피서지였다.

그러나 옛 선인들이 하던 대로 지금의 내금강 만폭동에서 행동한다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어떤 남측 관광객이 무턱대고 내금강 계곡물에 손발을 씻는다면, 조국 강토에 ‘환경오염죄’를 범한 죄로 벌금 처분을 받게 될 것은 뻔하다. 천하명산 금강산 이야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표현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은 그간 달라진 국가 체제와 레저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적 체함일 것이다.

내금강 표훈사 반야보전과 석탑 전경. 사진=현대아산 홈페이지
내금강 표훈사 반야보전과 석탑 전경. 사진=현대아산 홈페이지
내금강 조계종 성지순례단(2007.6.22. 표훈사 주지 청학대사 등). 사진=이지범
내금강 조계종 성지순례단(2007.6.22. 표훈사 주지 청학대사 등). 사진=이지범

내금강까지 열린 관광길

1998년 11월 ‘금강호’가 처음 출항하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일시 중단되는 일도 있었지만, 2003년 9월 육로 관광이 시작하면서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찾았다. 또 2007년 6월 1일부터 금강산관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내금강 방문길이 열리면서 금강산의 안팎을 모두 꼼꼼히 구경하게 됐다.

특히 2007년 6월 22일에는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원로의원 지종·원명·법흥·천운·정무·활안·현해 등 내금강 성지순례단 160여 명이 왕복 8km에 달하는 내금강 코스를 거뜬히 소화했다. 마하연 터를 방문한 대표단 일행은 선방 터에 앉아 잠시 참선에 들며 옛 금강산인들을 추억했다. 이 시기에 도천 화엄사 조실은 수월 선사의 진영을 표훈사(주지 청학)에 기증하고, 일반에 공개돼 관심을 모았다.

내금강 방문코스는 외금강 온정각에서 출발, 관광 전용버스로 온정령과 철이령 108 구비를 넘어서 금강읍 마을 - 표훈사 주차장까지 47km 약 2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표훈사에서 금강문 바위 - 만폭동 금강대 - 내팔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 - 마하연 동구 삼거리 – 묘길상을 기점으로 회기하여 다시 보덕굴 - 표훈사 – 식사 – 백화암 부도밭 – 삼불암(三佛岩) – 울소(鳴淵) – 장안사 터까지 시범 관광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 내금강 탐방은 장안사에서 시작하거나 마치는 코스였다. 내금강에는 모두 8개 코스가 있는데, 2007년 6월 시범 관광은 만천동·만폭동·백운대 3개 코스를 가게 됐다. 당시의 북측 해설봉사원은 “이 방문코스는 내금강에서도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방을 한 분들에게) 어떻게 보셨습니까? … (서툰 말을 한 남측 기자에게) 아니, 기자가 그렇게 표현력이 딸려서 남측에 깊이 전달 잘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한 적도 있다.

표훈사 앞 만천 계곡에서 시작한 내금강 탐방은 절 동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금강문’이란 글자가 새겨진 돌문을 지나야 만폭동으로 들어간다. 내금강 절경의 시작점인 셈이다. 만폭 계곡의 연화담과 청룡담에 이르면 금강대 아래 너럭바위에 양사언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과 ‘만폭동’이라는 초서가 새겨져 있다. 광초체(狂草體)로 불리는 이 글씨는 내금강의 아름다움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 글씨로 영원히 남기기 위해 새긴 듯하다. 이곳에서 내팔담이 있는 만폭동이 시작된다. 하얗게 부서지는 계류와 옥빛의 여덟 곳의 소와 담(潭)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이어서 ‘금강의 심장’으로 불린 마하연 삼거리에서 칠성각을 만난다. 1909년에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233호 금강초롱 군락지가 있는 마하연 터 인근에 관음보살의 제자 남순동자 바위를 지나는 구간은 추사가 말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수류화개동”이다. 또 내금강에서 가장 험준한 산길로, 새나 다닐 수 있는 험한 길이라 하여 특별히 ‘둔행칠리(臀行七里)’라 부른다. 제석천의 궁전을 뜻하는 수미암과 바위로 된 수미탑 서쪽의 선암까지 구간이다. 1924년 춘원은 《금강산유기》에서 “(산길을) 내려오려면 엉덩이를 대고 걷는 데가 7리나 된다.”는 뜻이라 했다. 험한 바위 절벽이 많아 앞으로 갈 때 발로 더듬고, 손으로 붙잡고, 엉덩이를 바위에 기대어 넘어지고 미끄러지지 않게 7리의 노정을 눈감고 험한 길을 따라가므로 부른 지명이다.

그 산길 끝에 소광담이라는 소(沼)가 있다. 바로 옆, 미륵대 바위에 고려의 미소라 불린 묘길상(妙吉祥)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보존유적 제256호 묘길상은 1366년 나옹선사가 표훈사 16성상과 백화암 삼존불상과 같이 조성했다고 《유점사본말사지》에 기록됐다. 이곳을 기점으로 한 내금강 탐방코스는 “이 길로는 네발짐승들이 다닐 수 없었다. … 정작 가마를 탈 주인은 거의 절반이 걸어서 가야만 했다.”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회상했다.

내금강 팔담의 중간지점, 하얀 눈을 뿜어낸다는 분설담 출렁다리를 건너서 34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627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한 보덕암(窟)이다. 북측 안내원은 “내금강 구경 오시면, 다들 여기 보덕암만을 노리십네다.”라고 으뜸 경치를 자랑했다. 조선 후기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보덕굴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신의 조화와 귀신의 힘 같아 거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고 했다. 다시 표훈사로 돌아온 이들이 경내의 장수 샘물을 한 모금 마실 때 표훈사의 맛을 제대로 봤다고 한다.

18세기 어유봉의 《유금강산기》에 나오는 ‘그림자를 머금은 다리’인 함영교를 건너서 공터에서 식사한다. 돌다리가 1777년 홍수로 무너진 후, 오래된 외나무다리가 대신했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백화암 부도밭에 이른다. 1914년 3월 화재로 소실되고, 그 터에 서산대사비 등 3기와 사리탑 7기가 남아 있다. 옆에는 내금강의 일주문이라 불리는 보존유적 제309호 삼불암(三佛岩)이 있다. 18세기 윤사국이 삼불암 이름을 새겼다. 원뿔 모양의 커다란 바위 앞면에는 1366년 나옹 왕사가 새긴 석가모니불, 미륵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한다. 좌측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 입상과 뒷면에는 60명(座)의 보살상을 가지런히 새겼다. 삼불암에서 장안사 터로 가다 보면, 계곡 바위에 ‘명연(鳴淵)’이라는 옛 글씨가 있다. 또아리를 튼 울소(沼)는 신통하게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사람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지막 코스는 내금강의 바깥주인 장안사 터다. 보존유적 제96호로 지정된 장안사 터에는 여러 주춧돌, 소맷돌과 무경당 영운 대사 부도만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림에 그려 넣었던 ‘장안사 비홍교’는 1720년경 장맛비에 떠내려가고, 1747년 《해악전신첩》에 이미 없어진 다리를 커다랗게 그리고 그림 제목으로 썼다. 해방 이전까지 6전・7각・1문이던 장안사는 1951년 5월 폭격으로 엿새 동안 불에 탔다.

내금강에 들어갔던 그 하루는 탐방객의 가슴에 금강의 이름을 다시금 떠오르게 할 것만 같다. 당시 남측 사람들에게는 내가 원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쯤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그 속살을 보려면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다음 편은 ‘2007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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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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