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 특징 드러내고 단합 과시할 목적으로 원종 설립
조선불교 특징 드러내고 단합 과시할 목적으로 원종 설립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2.06.2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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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동대문 밖에 원흥사 창건해 조선불교 보호 노력
총종문소 역할, 13도에 수사찰 두어 도내 사찰 사무 총괄
1904년 폐지 불구, 조선불교가 근대로 나아가는데 분기점

1916년 무렵 각황사 모습. 원종은 승려들로부터 재원을 모아 조선불교계를 대표할 사찰로 각황사를 건립했다.
1916년 무렵 각황사 모습. 원종은 승려들로부터 재원을 모아 조선불교계를 대표할 사찰로 각황사를 건립했다.

1. 원종의 설립과 조동종 맹약

1) 원종의 설립과 활동

도성 출입 금지 해제 이후 일본 불교의 진출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들의 움직임에 놀란 조선 왕조는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대법산으로 삼고 지방의 주요 사찰 16곳을 지정하여 중법산으로 삼았다. 일본 불교의 조직적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는 조선 불교를 통합․ 정리해서 보호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흥사는 창건되면서부터 총종무소(總宗務所)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치된 승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도섭리(都攝理)와 내산섭리(內山攝理)였다. 도섭리는 종무를 총괄하는 총무원장이며, 내산은 경성 부근 사찰을 지칭하는 것으로, 내산섭리는 경성 부근의 사찰을 총감독 하는 위치였다. 이곳은 경성 내의 궁녀와 양반의 내방과 특별한 관계에 있어 시종 귀부인의 참배가 빈번하였다. 자연히 다른 도의 사찰과 구별하여 취급할 필요가 있어 책임자를 둔 것이다. 이러한 승직 이외에도 좌우교정(左右校正), 대선의(大禪議), 상강의(上講議) 각각 1인 그리고 이무理務 5인을 두었다.

이와 동시에 13도에 수사찰을 두어 도내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수사찰에는 섭리(攝理), 도교정(道校正), 부교정(副校正), 선의(禪議), 강의(講議) 각각 1인씩을 두었고, 각 사찰에는 주지 1인을 두었다.1

이러한 불교 정책은 조선조 배불의 경향에서 본다면 상당히 변화된 인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격변기의 한계적인 여건 때문에 기대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04년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불교계의 변화와 교단의 부흥 그리고 포교의 시작은 조선 불교가 근대로 나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2

일본불교, 일 정부 지원으로 급성장해 전국에 별원·포교소
조선불교 특징 드러내고 단합 과시할 목적으로 원종 설립
각 도 대표 52인 모여 종무원 설립…이회광 대종정 추대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는 종파별로 조선 불교계는 물론 조선 불교 승려와 밀접하게 교류하며 포교에 주력하였다.3 이들 각 종파는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까닭에 급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시기 일본 불교의 별원과 포교소는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4

이런 일본 불교 종파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시대 인식을 지켜본 조선 불교 승려들도 자신들을 대표해서 부를 수 있는 종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5 구체적인 실체 없이 그냥 불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조선 불교의 특징을 드러내고 단합을 과시할 수 있는 종단 명칭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종단 건립으로 이어져 원종이 설립되었다.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대표 52인이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김현암(金玄庵)을 총무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주요 부서와 부장을 임명하였다.6

조선 불교 종명을 원종으로 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이능화는 원종이라는 종명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확고하게 서술하고 있다.

“총회가 끝난 후 어떤 자가 원종이 어디에서 출처한 것인가를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가 고려 대각 국사의 원종으로 대답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능화는 어떻게 대각 국사의 원종을 모를 수 있는가를 책망하면서 그것은 책 이름이며7 대각 국사는 화엄을 크게 홍통한 사람이다. 원종이란 종명은 어디에서 의거한 게 아니고 불교의 원융무애의 뜻에서 연유된 것이다.”8

《이조불교(李朝佛敎)》를 서술한 다까하시도오루(高橋亨)는 자신의 저서에서 원종이라는 종명은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에서 취하여 선교겸수종문을 표방한 것이라 하였다. 그 근거로써 자신이 당시 대종정에 피선된 이회광으로부터 직접 들었음을 밝혔다. 그렇지만 앞서 이능화가 원종은 원융무애한 뜻에서 의거하였음을 주장하고 있어 자신의 견해와 다르므로 어느 것이 올바른지 확단할 수 없다고 하였다.9

이와 같은 견해를 보면 다까하시도오루는 이능화의 주장보다 뒤에 나와 모든 견해를 참조하여 견해를 피력한 것이므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능화의 주장 역시 다까하시도오루의 주장을 알고 있었음을 저술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신도 다까하시도오루가 주장하는 종경록 유래를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올바르지 않다. 그래서 원종은 불교의 원융무애한 뜻에서 유래한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다.10

두 가지 견해 이외에도 원종은 당시의 불교가 선과 교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참선․간경․염불 내지 밀교까지 모두 수행한다는 뜻에서 원종이라 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1

세 가지 주장이 표방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 선과 교 가운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모습이다. 당시 불교계의 현실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불교계의 자세가 한쪽에 치우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세 가지 뜻이 모두 담긴 원종이란 종명이 가장 합당한 이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원종은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의 종파적 활동을 보고 스스로 종명을 붙이고 종무원을 설립하였던 것이지 따로 종조와 종통 그리고 종지가 있었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종래 종파가 없었던 산승 시대처럼 선과 교를 겸행원수(兼行圓修)하고자 한 의미가 강조되고, 그러한 원융무애한 뜻을 종지로 삼아 원종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조·종지 없어…겸행원수 강조, 원융무애 원종 종지 삼아
설립 후 포교 진력, 불교계 대표할 도심사찰 각황사 창건
대중포교, 불교강연, 서적 발간, 불교교육 등 활발히 활동

원종이 설립된 후 가장 노력한 분야는 포교였다. 가장 먼저 도심 속에 전체 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찰 건립을 계획하였다. 그런 목적을 갖고 1910년 10월 27일 창건된 것이 바로 각황사(覺皇寺)였다.12

각황사의 도심 창건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각황사가 창건되기 전까지 조선 불교는 배불정책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13 그런 상황에서 1910년 전 조선 불교 승려들이 재원을 모아 북부 전동(磚洞)에 있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각황사라 명명하고 여기에서 포교도 하고 간행사업도 함으로써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 것이다.14 1910년 10월 28일 동대문 밖 원흥사에 봉안하였던 금불상을 각황사로 이안하고 봉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15 그러나 각황사 창건은 갑작스럽게 추진한 탓에 공간이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창건 당시의 각황사 전각을 모두 철거하고 1914년 9월 28일 일본과 서양이 혼합된 양식으로 2층 전각을 기공하였다.16

각황사에서 불교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행하던 여러 가지 활동은 대중 포교와 불교 강연 그리고 서적 발간 등으로 요약된다. 먼저 대중 포교를 보면 처음부터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였다. 창건 다음 날부터 일반인에게 불교를 전포할 계획으로 포교문을 다수 발행하였다.17 또한 일반 신도를 위한 수계식이 각황사에서 거행되었음을 볼 때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포교 활동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18

다음 불교 강연은 대중을 위한 설법이 많았다. 유명한 선승을 초청하여 법회를 개최하였다.19 서울 각 포교당이 연합한 불교 대강연회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불교 대강연회는 춘기와 추기로 나누어서 개최되었다. 불교계 유명 인사 7인이 초청되어 7일 동안 설법하였다.20 설법 이외의 강연에서는 구미 쪽에서 공부한 연구자들이 초청되었다. 주로 종교와 관련된 주제로 개최되었다.21 조선 불교에서 건립한 각황사였던 까닭에 이곳에서 개최된 대중적 강연 역시 종교적인 주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22

마지막으로 서적 발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각지의 승사(僧史), 사적을 조사하여 발간할 계획으로 서해담(徐海曇), 이회명(李晦明), 김현암 세 명을 편찬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불교 유적의 보전을 위한 계획도 수립하였다.23 중앙포교당과 각 사찰과의 연락 관계를 위해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를 발간한 사실도 그런 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24

원종은 불교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국의 사찰 조직을 정비한 후 지금까지 불교의 교육기관으로 유지되어 오던 명진학교(明進學校)를 고등전문학교 정도의 수준으로 승격시키기로 의결하였다. 이런 개편을 학부에 청원하여 1910년 4월 고등학교 정도로 승인을 받은 후 교명을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바꾸었다. 수업 과정은 3년제 사범과(師範科)와 1년제 수의과(隨意科)를 두었다. 불교사범학교의 교과 과정은 명진학교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외국어와 측량․ 토목․ 산술․ 역사․ 지리 등 신학문의 과목을 더 배정한 것이 특색이었다. 불교 과목 이외의 신학문의 과목 수준은 명진학교보다 조금 높았다. 그리고 수의과 교과 과정은 주로 일어를 이수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25

이것은 원종이 불교사범학교를 설립한 것은 무엇보다도 포교전도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교과과목도 거기에 부합하도록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조선 불교 승려로서 신체 건강하고 뜻이 견고하며 품행이 방정한 자였다. 연령은 과정마다 조금씩 달랐다. 별과는 18세 이상이며 본과는 19세 이상이었다. 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 학력으로는 본과는 대교과를 졸업한 자였으며, 별과는 사교과를 수료한 자로 제한하였다.

불교사범학교의 직제는 명진학교에 비해서 조금 축소되었다. 졸업 후 일정한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지정된 학교나 사찰의 전문 강원에서 종사해야 하는 규정도 새로 신설되었다. 이런 규정은 앞서 명진학교 시절부터 사찰의 비용으로 교육시키고도 그 효용성이 떨어짐을 방지하고자 의무적인 조항을 설정한 것이다.

이 무렵 사찰의 재정으로 일본유학이나 새로운 학문을 습득한 승려들이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되돌아가는 경우가 드물어 이를 시정하라는 논설들이 빈번하였다. 불교계의 큰 문제로 대두되면서 이 같은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재학 때에 받았던 사비금의 전부나 일부를 상환하도록 하였다.26 이렇게 해서 불교계의 인력을 관리하는 한편 그 효용성을 극대화시키려고 했던 것이 종단의 의도였다.

불교계의 교육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고자 설립되었던 불교사범학교였지만 그 운영은 순조롭지 못했다. 불교사범학교로 개편된 후 4개월만인 1910년 8월에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합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해 9월에 경성부에 의해 실태조사를 받았고, 1911년 8월 23일부터 조선교육령에 따라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에 의해 일어와 일본 역사 그리고 일본 지리 등이 교과과정에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11월 1일부터 사립학교규칙에 따라 전문교육을 실행하려는 학교는 다음과 같은 자격 조건을 구비하여야 했다. 먼저 재단법인을 조직하여야 했다. 그리고 전문학교가 아니면서 전문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립학교는 교과과정을 전문학교 규칙에 준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명칭에 있어서도 앞에 사립이란 글자를 붙여야 하였다. 교과서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것이나 조선 총독의 검정을 받은 것만 사용하여야 하였다. 사립학교의 교원은 일어에 통달하고 또 해당 학교의 정도에 상응한 학력을 가진 자로 한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총독은 사립학교의 폐쇄를 명할 수 있다는 조항을 첨부하여 철저하게 교육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교육 규칙에 따라 불교사범학교는 일본 관헌에 의해 관․ 사립의 차별을 받아 각종 학교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27

[주] -----

1) 이능화(1918), 《조선불교통사》(상), 신문관, 616쪽.

京畿道 : 廣州 奉恩寺, 陽州 奉先寺, 水原 龍珠寺.

忠淸道 : 公州 麻谷寺, 報恩 法住寺.

全羅道 : 順天 松廣寺, 金提 金山寺.

慶尙道 : 陜川 海印寺, 梁山 通度寺, 大邱 桐華寺.

江原道 : 江陵 月精寺, 高城 楡岾寺.

咸鏡道 : 安邊 釋王寺, 咸興 歸州寺.

平安道 : 寧邊 普賢寺.

黃海道 : 海州 神光寺.

2) 김경집(1999), <근대 원흥사의 창건과 현행세칙에 대한 연구>, 《구산논집》 제3집, 구산장학회, 85∼95쪽.

3) 한석희 저 김승태 역(1990), 《일제의 종교 침략》, 기독교문사, 61쪽.

4) 유병덕(1992), <일제시대의 불교>,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155쪽.

5) 김영태(1984), <근대 불교의 종통 종맥>,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출판국, 189쪽.

6) 이능화(1918), 《조선불교통사》(하), 신문관, 937쪽.
이때 임명된 각 부서의 부장은 다음과 같다.
敎務部長 : 陳震應
學務部長 : 金寶輪, 金之淳
庶務部長 : 金石翁, 姜大蓮
人事部長 : 李晦明, 金九河
監査部長 : 朴普峰, 羅晴湖
財務部長 : 徐鶴庵, 金龍谷
高等講師 : 朴漢永.

7) 대각 국사 의천이 화엄종의 여러 문헌 가운데 요점을 뽑아 정리한 책 《원종문류(圓宗文類)》를 말한다.

8) 이능화(1918), 앞의 책(하), 937쪽.

9) 高橋亨(1929), 《이조불교》, 보문관, 920∼921쪽.

10) 이능화(1918), 앞의 책(하), 935쪽.

11) 김포광(프린트본), 《조선불교사》, 121쪽.

12) <매일신보> 1914. 01. 30.

13)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가 세워져 다소나마 한국 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근대적인 포교를 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각황사를 창건한 것에서 원흥사가 관제적 성격을 띠었으므로 그것을 벗어나 불교계의 힘으로 자신의 종단을 운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1895년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와 함께 불교계에서도 도성 내에 자신들의 포교 장소를 가지고 싶었던 염원이기도 하다.

14) 권상로(1939), 《조선불교사 개설》, 불교시보사, 63∼64쪽.

15) <매일신보> 1910. 10. 28.

16) <매일신보> 1914. 09. 28.

17) <매일신보> 1910. 10. 29.

18) <매일신보> 1915. 06. 24. 불교진흥회의 회주인 이회광 선사가 240여 명에게 계첩을 분급하였음을 볼 때 지속적이고 제법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 <매일신보> 1915. 03. 30. 그런 설법 가운데 경운 선사를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자 한 계획이 그런 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선사는 산문을 안 나온 지 30여 년에 이르고 학식과 도가 높아 당시 생불과 같이 신앙되었다고 한다.

20) <매일신보> 1916. 09. 03. 이때의 대강연회는 9월 4일에서 10일까지 개최되었는데 당시 설교사는 김경운, 김남전, 강도봉, 한용운, 이회명, 강대련, 김일운이었다.

21) <매일신보> 1910. 11. 26.

22) <매일신보> 1911. 11. 05. 석종(石宗)이란 연사가 종교에 관하여 강설하였는데 청중이 100여 명 모였다고 한 기사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23) <매일신보> 1910. 11. 29.

24) <매일신보> 1914. 01. 30.

25) 칠십년사편찬위원회(1976), 《동대칠십년사》, 동국대 출판부, 17∼18쪽.

26) 칠십년사편찬위원회(1976), 위의 책, 280∼285쪽.

27) 남도영(1977), <개화기의 사원교육제도>, 《현대사학의 제문제》, 일조각,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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