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보기 싫어 북향집 지어…왜경 감시 속 살아”
“총독부 보기 싫어 북향집 지어…왜경 감시 속 살아”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06.15 13: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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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숙 여사 증언, 선학원 만해 한용운 78주기 추모 학술제서
법진 스님 “감시·탄압에도 독립과 불교개혁에 일편단심”
지난 9일 선학원이 주최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서 법진 스님(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이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 주제 발표문 마지막에는 만해 스님의 여식 안영숙 여사의 육성증언이 담겨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심우장이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만해 스님의 딸 한영숙 여사는 한국불교선리원장 법진 스님과 대담에서 “만해 스님이 조선총독부가 꼴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확인했다. 북향집을 지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서는 아니라는 일부의 주장을 배척한다. 이 같은 증언은 지난 9일 선학원이 주최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서 법진 스님(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 주제발표에 담겼다.

한영숙 여사(89)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딸로 1934년생이다. 한 여사는 만해 스님이 심우장으로 옮긴 다음 해인 1934년 태어나, 한참 동안 심우장에서 살았다. 한 여사는 아직도 아버지를 “별난 스님”으로 기억한다. 심우장 시절 ‘별난 스님’은 어린 딸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한 여사는 “조선총독부가 보시 싫어서 북향집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며 “젊은 애들이 학도병 나가게 선전문를 써 도와달라고 하자 나무목침이 날아가고 했다.(그 정도로 일제를 싫어했다)”고 증언했다. 일제를 도와달라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목침을 던져 대노하던 만해 스님이 “북향집을 지은 것”이라고 확인했다. 심우장은 동아일보 김연국이 일본 오사카 지국장으로 가면서 비어있는 집을 김철중과 백양사 벽산 스님의 배려로 집을 짓게 됐고, 부인 유 씨의 소지금과 선학원 적음 스님, 조선일보 방응모, 박광 등의 성금으로 지었다.

당시 심우장은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 여사는 “현재 심우장은 나중에 지은 것”이라며 “처음에는 방, 광, 목욕실, 화장실이 있었고, 웃방에 장지문이 있어 그 문을 닫고 어머니하고 잠을 잤다”고 했다. 한 여사는 “북향이지만, 그냥 거기서 살 때가 좋았다.”고 했다. 또 한 여사는 “일본어 배운다고 (스님이) 소학교도 안 보내셨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해방 딱 되고 나서 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한 여사가 기억하는 만해 스님의 심우장 생활은 어땠을까. 한 여사는 “만해 스님은 잠이 없었다. 일어나면 병풍의 한문 글씨를 (스님이) 신문지에 쓰게 했다. 두 번 안 쓰고 흙장난만 하다가 죽을 만큼 혼났다”고 말한다.



만해 78주기 추모학술제.



심우장 살림은 빈곤했다. 집은 추웠다. ‘머리 깎은 스님'은 별났다. 불을 땔 수 없었다. 구공탄을 썼는데 많이 땔 수 없었다. 떼거리는 유숙원 여사가 마련했다. 만해 스님은 유숙원 여사와 심우장으로 이거하던 해인 1933년 결혼했다.

한 여사는 “생활비는 친구들이 조금씩 가져다주고, 조선일보에 연재소설 ’흑풍‘을 써 원고료를 받았다”고 기억한다.

한 여사는 어머니 유 여사가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말한다. 스님의 친구들이 유 여사의 음씩 솜씨를 칭찬했다고 기억한다. 일반적으로 유숙원 여사의 직업이 간호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 여사는 “무슨 직장을 나녔나, 이모님이 삼선교에서 병원을 하셨는데 거기 좀 같이 계셨던거다. (간호사 소문은) 와전된거다. 무슨 직장이냐 직장은 (유씨 부인은) 요조숙녀”라고 밝힌다. 한 여사는 또 “진실을 왜곡할 필요는 없지 않냐, 이모님이 의사였다. 이모님 댁인 삼선교 병원은 아래는 진찰실이고 위는 숙소인데 길가에 있었다”고 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생활은 이전 10여 년 동안 선학원에서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연속이었으며, 그동안 불교계에서 진행한 청년운동과 대중화를 점검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나라의 독립과 한국불교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보았다.



선학원 이사장 지광 스님 등 100여명이 추모학술제에 참석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은 왜경의 감시 속에 살았다. 한 여사는 “왜경들이 쭉 산에 있어서 친구들이나 독립지사들이 많이 찾아오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심우장 위쪽이 소나무였는 데 산 쪽에 왜경이 매일 와서 지키면서 친구들이 와도 다 체크했다. 방응모 사장이 왔다.”고 기억했다. 그래도 춘성 스님, 적음 스님, 김관호, 박광, 국수열, 이창수 씨가 자주 왔다고 한 여사는 기억한다. 또 만공 스님은 서울에 오면 심우장에 들러 자고 갔다고 했다. 그는 “만공 스님이 오시면 내가 세숫물하고 발 씻는 물을 떠다 바쳤다. 심부름 꽤나 했다.”고 기억했다.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이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자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한 여사는 “감시 때문에 사람들이 못 왔다.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관에 모시기 전에 (심우장) 계단 밑에 제상을 차리는 데 눕혀놓았다. 지금은 3일장을 하지만 그때는 5일장 아니면 7일장이었다.”고 기억한다.

만해 스님은 광복을 한 해 앞 둔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한 여사는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중풍이 왔다. (돌아가시던 날 스님이) 지팡이 짚고 새벽에 일어나 방에서 소변을 보고 누우셨는데, 그대로 그냥 가셨다. 그때 내가 깼었다. 그날 사이렌이 울리고 등화관제가 있을 때였다. 까만 포장으로(창문을 덮었다). 어머니가 일어나 아버지 주무시는 밑에를 만져 보더라. 그리고 흔들고 하는데, 어려도 이상했다. 그더더니 어머니가 밖으로 막 뛰어나가시더니 이창수 씨라고 친한 분을 불러 오셨는데 그대로 임종했다.”고 했다. 만해 스님은 말년 중풍을 앓았다. 한 여사는 “중풍이 오래되지 않았다. 총알이 몸 안에 그냥 있었다. 몇 개인지 모르지만 안 뺀 건 확실하다. 적음 스님이 오셔서 열십자로 침도 놓고 그러셨다”고 기억한다. 선학원 적음 스님은 침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 여사는 “5일장인가 7일장인가 치렀다. 춘성 스님이 오셨는데, (만해 스님) 혼백을 춘성 스님이 불렀다고, 그냥 무슨 소리를 치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일본놈들이 다 보고 있으니, 장사도 화려하게 할 돈도 없고, 장례차도 장지도 준비해야 하는데 통신망이 없으니까 여기저기 아는 분들에게 연락해야 하니 날짜가 오래갔다. 6월 29일 날이 더웠는데 그렇게 모셔놨어도 깨끗하셨다”고 했다. 장지인 망우리 묘지도 “미아리도 있었지만, 친구분들이 주선한 것”으로 한 여사는 기억한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으로 옮기기 전 만당을 조직했다.

법진 스님은 주제 발표에서 “만해 스님은 심우장 시절 항일과 독립을 위한 청년불교운동과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며 “독립운동 당시 활동했던 불교계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리에 조직된 만당은 만해가 당수였다. 그들은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해인사와 범어사 등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있었다. 최범술·박광·이용조 등 불교계의 애국청년과 승려들은 항일운동을 통해 만해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1938년까지 만당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됐다.”고 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스님의 심우장 시절을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정(合理宗政)의 확립 △ 대중불교의 실현이라는 불교청년운동의 3대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했다.”고 보았다.

그는 “만해의 <불교>지 속간과 그 운영은 대표적인 불교대중화운동이기도 했다”며 “스님은 <불교>에 「반종교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등의 계몽적인 논설을 통해 불교대중화와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하지만 “<불교> 제작과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경남삼본산회와 당시 불교계의 주도층은 만해의 사찰행정이나 교리와 수행, 그리고 의식에 대한 개혁적 성향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면서 “때문에 불교는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심우장 시절 만해는 역사적 지성인의 업적을 선양해 무기력한 백성들에게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고 보았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 시절, “독립지사 김동삼의 유해를 장사 지내고, 단재 신채호와 대종교 초대교주 나철의 유고집을 간행하고자 했으며, 다산 정약용의 서세 100년을 기념”했다.



만해 스님의 심우장 시절 주요 연보.



법진 스님은 “만해의 삶은 격랑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61세를 맞이해 읊은 「즉흥」은 인생과 자신의 서원을 말하고 있다. 세속에 몸을 의지하고 한동안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았지만, 가난과 병을 근심하지 않았고, 자유자재했다.”면서 “누군가 남아있는 생을 묻자 매미 소리와 석양을 말하여 여생은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풍상 속에서도 일편단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 그가 세속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착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 9일 선학원이 주최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서 법진 스님(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이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 주제 발표문 마지막에는 만해 스님의 여식 안영숙 여사의 육성증언이 담겨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심우장이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만해 스님의 딸 한영숙 여사는 한국불교선리원장 법진 스님과 대담에서 “만해 스님이 조선총독부가 꼴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확인했다. 북향집을 지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서는 아니라는 일부의 주장을 배척한다. 이 같은 증언은 지난 9일 선학원이 주최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서 법진 스님(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 주제발표에 담겼다.

한영숙 여사(89)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딸로 1934년생이다. 한 여사는 만해 스님이 심우장으로 옮긴 다음 해인 1934년 태어나, 한참 동안 심우장에서 살았다. 한 여사는 아직도 아버지를 “별난 스님”으로 기억한다. 심우장 시절 ‘별난 스님’은 어린 딸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한 여사는 “조선총독부가 보시 싫어서 북향집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며 “젊은 애들이 학도병 나가게 선전문를 써 도와달라고 하자 나무목침이 날아가고 했다.(그 정도로 일제를 싫어했다)”고 증언했다. 일제를 도와달라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목침을 던져 대노하던 만해 스님이 “북향집을 지은 것”이라고 확인했다. 심우장은 동아일보 김연국이 일본 오사카 지국장으로 가면서 비어있는 집을 김철중과 백양사 벽산 스님의 배려로 집을 짓게 됐고, 부인 유 씨의 소지금과 선학원 적음 스님, 조선일보 방응모, 박광 등의 성금으로 지었다.

당시 심우장은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 여사는 “현재 심우장은 나중에 지은 것”이라며 “처음에는 방, 광, 목욕실, 화장실이 있었고, 웃방에 장지문이 있어 그 문을 닫고 어머니하고 잠을 잤다”고 했다. 한 여사는 “북향이지만, 그냥 거기서 살 때가 좋았다.”고 했다. 또 한 여사는 “일본어 배운다고 (스님이) 소학교도 안 보내셨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해방 딱 되고 나서 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한 여사가 기억하는 만해 스님의 심우장 생활은 어땠을까. 한 여사는 “만해 스님은 잠이 없었다. 일어나면 병풍의 한문 글씨를 (스님이) 신문지에 쓰게 했다. 두 번 안 쓰고 흙장난만 하다가 죽을 만큼 혼났다”고 말한다.

만해 78주기 추모학술제.
만해 78주기 추모학술제.

심우장 살림은 빈곤했다. 집은 추웠다. ‘머리 깎은 스님'은 별났다. 불을 땔 수 없었다. 구공탄을 썼는데 많이 땔 수 없었다. 떼거리는 유숙원 여사가 마련했다. 만해 스님은 유숙원 여사와 심우장으로 이거하던 해인 1933년 결혼했다.

한 여사는 “생활비는 친구들이 조금씩 가져다주고, 조선일보에 연재소설 ’흑풍‘을 써 원고료를 받았다”고 기억한다.

한 여사는 어머니 유 여사가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말한다. 스님의 친구들이 유 여사의 음씩 솜씨를 칭찬했다고 기억한다. 일반적으로 유숙원 여사의 직업이 간호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 여사는 “무슨 직장을 나녔나, 이모님이 삼선교에서 병원을 하셨는데 거기 좀 같이 계셨던거다. (간호사 소문은) 와전된거다. 무슨 직장이냐 직장은 (유씨 부인은) 요조숙녀”라고 밝힌다. 한 여사는 또 “진실을 왜곡할 필요는 없지 않냐, 이모님이 의사였다. 이모님 댁인 삼선교 병원은 아래는 진찰실이고 위는 숙소인데 길가에 있었다”고 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생활은 이전 10여 년 동안 선학원에서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연속이었으며, 그동안 불교계에서 진행한 청년운동과 대중화를 점검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나라의 독립과 한국불교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보았다.

선학원 이사장 지광 스님 등 100여명이 추모학술제에 참석했다.
선학원 이사장 지광 스님 등 100여명이 추모학술제에 참석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은 왜경의 감시 속에 살았다. 한 여사는 “왜경들이 쭉 산에 있어서 친구들이나 독립지사들이 많이 찾아오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심우장 위쪽이 소나무였는 데 산 쪽에 왜경이 매일 와서 지키면서 친구들이 와도 다 체크했다. 방응모 사장이 왔다.”고 기억했다. 그래도 춘성 스님, 적음 스님, 김관호, 박광, 국수열, 이창수 씨가 자주 왔다고 한 여사는 기억한다. 또 만공 스님은 서울에 오면 심우장에 들러 자고 갔다고 했다. 그는 “만공 스님이 오시면 내가 세숫물하고 발 씻는 물을 떠다 바쳤다. 심부름 꽤나 했다.”고 기억했다.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이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자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한 여사는 “감시 때문에 사람들이 못 왔다.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관에 모시기 전에 (심우장) 계단 밑에 제상을 차리는 데 눕혀놓았다. 지금은 3일장을 하지만 그때는 5일장 아니면 7일장이었다.”고 기억한다.

만해 스님은 광복을 한 해 앞 둔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한 여사는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중풍이 왔다. (돌아가시던 날 스님이) 지팡이 짚고 새벽에 일어나 방에서 소변을 보고 누우셨는데, 그대로 그냥 가셨다. 그때 내가 깼었다. 그날 사이렌이 울리고 등화관제가 있을 때였다. 까만 포장으로(창문을 덮었다). 어머니가 일어나 아버지 주무시는 밑에를 만져 보더라. 그리고 흔들고 하는데, 어려도 이상했다. 그더더니 어머니가 밖으로 막 뛰어나가시더니 이창수 씨라고 친한 분을 불러 오셨는데 그대로 임종했다.”고 했다. 만해 스님은 말년 중풍을 앓았다. 한 여사는 “중풍이 오래되지 않았다. 총알이 몸 안에 그냥 있었다. 몇 개인지 모르지만 안 뺀 건 확실하다. 적음 스님이 오셔서 열십자로 침도 놓고 그러셨다”고 기억한다. 선학원 적음 스님은 침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 여사는 “5일장인가 7일장인가 치렀다. 춘성 스님이 오셨는데, (만해 스님) 혼백을 춘성 스님이 불렀다고, 그냥 무슨 소리를 치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일본놈들이 다 보고 있으니, 장사도 화려하게 할 돈도 없고, 장례차도 장지도 준비해야 하는데 통신망이 없으니까 여기저기 아는 분들에게 연락해야 하니 날짜가 오래갔다. 6월 29일 날이 더웠는데 그렇게 모셔놨어도 깨끗하셨다”고 했다. 장지인 망우리 묘지도 “미아리도 있었지만, 친구분들이 주선한 것”으로 한 여사는 기억한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으로 옮기기 전 만당을 조직했다.

법진 스님은 주제 발표에서 “만해 스님은 심우장 시절 항일과 독립을 위한 청년불교운동과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며 “독립운동 당시 활동했던 불교계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리에 조직된 만당은 만해가 당수였다. 그들은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해인사와 범어사 등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있었다. 최범술·박광·이용조 등 불교계의 애국청년과 승려들은 항일운동을 통해 만해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1938년까지 만당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됐다.”고 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스님의 심우장 시절을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정(合理宗政)의 확립 △ 대중불교의 실현이라는 불교청년운동의 3대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했다.”고 보았다.

그는 “만해의 <불교>지 속간과 그 운영은 대표적인 불교대중화운동이기도 했다”며 “스님은 <불교>에 「반종교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등의 계몽적인 논설을 통해 불교대중화와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하지만 “<불교> 제작과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경남삼본산회와 당시 불교계의 주도층은 만해의 사찰행정이나 교리와 수행, 그리고 의식에 대한 개혁적 성향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면서 “때문에 불교는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심우장 시절 만해는 역사적 지성인의 업적을 선양해 무기력한 백성들에게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고 보았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 시절, “독립지사 김동삼의 유해를 장사 지내고, 단재 신채호와 대종교 초대교주 나철의 유고집을 간행하고자 했으며, 다산 정약용의 서세 100년을 기념”했다.

만해 스님의 심우장 시절 주요 연보.
만해 스님의 심우장 시절 주요 연보.

법진 스님은 “만해의 삶은 격랑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61세를 맞이해 읊은 「즉흥」은 인생과 자신의 서원을 말하고 있다. 세속에 몸을 의지하고 한동안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았지만, 가난과 병을 근심하지 않았고, 자유자재했다.”면서 “누군가 남아있는 생을 묻자 매미 소리와 석양을 말하여 여생은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풍상 속에서도 일편단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 그가 세속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법진 스님이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을 발표하고, 김경집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토론했다. 이어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이 ‘한용운의 지적 흐름과 실천, 그리고 근대불교적 가치’를 발표하고,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가 토론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재단법인 선학원이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개최하는 ‘만해 선사 78주기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열린다.

‘만해 선사 78주기 추모행사’는 이날 학술제에 이어 18일 오후 7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예술제’가, 29일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추모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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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멀 2022-06-15 22:43:39
심우장을 만해가 지은 것은 아니지요.
만해는 승려 결혼은 주창했다
누가 지금도 만해를 스님이라하는가?
만해 선생이라해야지.
김구도 절집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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