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2. 걸식(해스팅 거리에서)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2. 걸식(해스팅 거리에서)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5.2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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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해스팅 거리

콘크리트 건물처럼 굳어진 얼굴들
겨울비 맞은 얼굴처럼 굳어진 표정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뭉친 근육 덩어리처럼
누워 있어도 기대있어도 혼이 나간 얼굴로

살아도 죽은 자처럼
방바닥 같은 보도 블럭 위에 누운 사람들
세상이 밀어내고 도시가 버린 사람들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영혼처럼

비둘기 빵 주워 먹듯
나뒹구는 주사 바늘
뒷골목 널브러진 빨래처럼

나의 손끝조차 닿는 것이 싫은
짧은 순간에도
대낮 밴쿠버 이스트 해스팅 거리
날마다 일상처럼 앰뷸런스에 실린 쓰러진 영혼
검은 장갑을 낀 경찰

한동안 뵈지 않던 중국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면서도 창틀에 며칠 동안 싸 간 음식이 뒹굴었다지

오래되어 익숙하지만 늘 낯설기만 한 이민자의 발걸음은
해스팅을 총총 걸음친다.

 







#작가의 변
한국에도 요즘 길거리에서 밥을 주는 밥 차가 많이 다니는 듯하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요즘엔 맥도널드조차 10불 이상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집을 나와 서성거리다 밥때가 되어 뭘 먹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은 눈에 안 띄고 가격만 눈에 들어온다. 한 끼를 때운다. 반면 식사를 즐기는 맛집 탐방의 차이는 아주 크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초대받은 집에 한국식 밑반찬이 많으면 부럽다. “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처럼 먹고 사네요” 하면 “웬걸요. 평소엔 우리도 다른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밑반찬이 풍성하면 밑반찬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식품점 가면 웬만한 한국 밑반찬 다 있지만, 가격이 선뜻 들게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늘 사던 콩나물, 두부, 시금치, 풋 배추 등이 2단에 5불, 콩나물 한 봉지에 3불, 무 한 개에 4불 등 쇼핑에도 기 눌리는 기분이다. 물론 한국 식품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코스코는 한 아이템이 보통 10불 단위다.

어릴 때 시골집엔 보따리상, 생선 장수, 자칭 상이군인, 스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대청 마루에 앉아 물건을 보여 주고, 때가 되면 우리 먹는 그대로 찬밥에 상추 쌈, 쌈장을 먹거나 담장에 길게 늘어선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싸 먹거나 애호박에 풋고추 감자 썰어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기도 했다. 생선전 같은 것은 제사 때나 먹는 것이고 육계장이든 돼지국밥이든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라도 있으면 일 도와주는 엄마를 졸졸 따라가 챙겨 주는 대로 냉 냉큼 잘도 받아먹었다. 모내기하는 날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국수 점심으로 나온 고추가루 뻘건 콩나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날마다 풀밭인 밥상은 생선 장수가 다녀가면 그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고등어나 꽁치, 운이 좋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면수가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두부도 한참 나가 구멍가게에 가서 사 와야 하니 두부 넣은 된장찌개는 손님이 오면 먹던 별식이었다. 보따리상이든 생선 장수든 그렇게 우리 먹는 것을 같이 먹고 보냈다. 밭에서 따온 오이밖에 없어 무침을 하거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냉장고가 없으니 밥이 쉴 때가 많았고 된장에도 꼴까지가 끼거나 굼벵이 같은 벌레가 기어가기도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밤늦게까지 놀면 친구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오기도 했다. 때론 체면 차린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먹었다고 말하면 알아서 차려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픈 설움을 아니까?
 







스님 바랑엔 쌀이 한 되박 들어가기도 하고 보리쌀, 감자가 들어가기도 했다. 현금!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까….
그런데 상이군인이라며 의수를 한 사람이 현금을 안 준다고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땡깡을 피웠다.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워서 너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다고. 참다 참다 아버지가 열받아 밭을 고르던 갈고리를 휘두르며 “이눔이 안 가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화를 내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은 잘 먹이자였다. 지금 아이들이 시어 터진 김치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반찬 없다 투덜댈 것이다. 나조차 그럴 것 같다. 시어 터진 김치를 송송 썰어 볶아 찬밥을 넣고 볶아 먹을 때 남의 살 돼지고기 몇 점이라도 있다면 정말 맛있었을 텐데, 가끔 산에서 싸리버섯을 따다 볶아 먹으면 고기 맛이 났다.
배고파 본 사람만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이나 동남아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이 정말 부처님 시대를 몸소 느끼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걸식은 사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떳떳하게 돈을 내고 먹는 것과 밥을 구걸하는 일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힘든 것처럼 거절당할지 모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손에 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추위는 더욱 어깨에 내려와 앉고, 더위는 몸 안에 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모른다. 밴쿠버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료 금식을 하는 기관은 대부분이 교회 관련 기관이거나 교회에서 주관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곳도 있고 교회 재정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도 천주교 신부님이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비빔밥도 돈을 받고 파는 곳이 늘고 있다. 불교에도 자비와 나눔을 하는 무료 급식을 하는 사찰이 늘어났으면 한다. 사찰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보수하는 일, 진입로 포장 등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찰이 더욱 보기좋다. 사찰 건물에 쓸 자금이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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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해스팅 거리

콘크리트 건물처럼 굳어진 얼굴들
겨울비 맞은 얼굴처럼 굳어진 표정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뭉친 근육 덩어리처럼
누워 있어도 기대있어도 혼이 나간 얼굴로

살아도 죽은 자처럼
방바닥 같은 보도 블럭 위에 누운 사람들
세상이 밀어내고 도시가 버린 사람들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영혼처럼

비둘기 빵 주워 먹듯
나뒹구는 주사 바늘
뒷골목 널브러진 빨래처럼

나의 손끝조차 닿는 것이 싫은
짧은 순간에도
대낮 밴쿠버 이스트 해스팅 거리
날마다 일상처럼 앰뷸런스에 실린 쓰러진 영혼
검은 장갑을 낀 경찰

한동안 뵈지 않던 중국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면서도 창틀에 며칠 동안 싸 간 음식이 뒹굴었다지

오래되어 익숙하지만 늘 낯설기만 한 이민자의 발걸음은
해스팅을 총총 걸음친다.

 





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해스팅 거리

콘크리트 건물처럼 굳어진 얼굴들
겨울비 맞은 얼굴처럼 굳어진 표정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뭉친 근육 덩어리처럼
누워 있어도 기대있어도 혼이 나간 얼굴로

살아도 죽은 자처럼
방바닥 같은 보도 블럭 위에 누운 사람들
세상이 밀어내고 도시가 버린 사람들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영혼처럼

비둘기 빵 주워 먹듯
나뒹구는 주사 바늘
뒷골목 널브러진 빨래처럼

나의 손끝조차 닿는 것이 싫은
짧은 순간에도
대낮 밴쿠버 이스트 해스팅 거리
날마다 일상처럼 앰뷸런스에 실린 쓰러진 영혼
검은 장갑을 낀 경찰

한동안 뵈지 않던 중국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면서도 창틀에 며칠 동안 싸 간 음식이 뒹굴었다지

오래되어 익숙하지만 늘 낯설기만 한 이민자의 발걸음은
해스팅을 총총 걸음친다.

 







#작가의 변
한국에도 요즘 길거리에서 밥을 주는 밥 차가 많이 다니는 듯하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요즘엔 맥도널드조차 10불 이상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집을 나와 서성거리다 밥때가 되어 뭘 먹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은 눈에 안 띄고 가격만 눈에 들어온다. 한 끼를 때운다. 반면 식사를 즐기는 맛집 탐방의 차이는 아주 크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초대받은 집에 한국식 밑반찬이 많으면 부럽다. “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처럼 먹고 사네요” 하면 “웬걸요. 평소엔 우리도 다른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밑반찬이 풍성하면 밑반찬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식품점 가면 웬만한 한국 밑반찬 다 있지만, 가격이 선뜻 들게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늘 사던 콩나물, 두부, 시금치, 풋 배추 등이 2단에 5불, 콩나물 한 봉지에 3불, 무 한 개에 4불 등 쇼핑에도 기 눌리는 기분이다. 물론 한국 식품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코스코는 한 아이템이 보통 10불 단위다.

어릴 때 시골집엔 보따리상, 생선 장수, 자칭 상이군인, 스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대청 마루에 앉아 물건을 보여 주고, 때가 되면 우리 먹는 그대로 찬밥에 상추 쌈, 쌈장을 먹거나 담장에 길게 늘어선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싸 먹거나 애호박에 풋고추 감자 썰어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기도 했다. 생선전 같은 것은 제사 때나 먹는 것이고 육계장이든 돼지국밥이든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라도 있으면 일 도와주는 엄마를 졸졸 따라가 챙겨 주는 대로 냉 냉큼 잘도 받아먹었다. 모내기하는 날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국수 점심으로 나온 고추가루 뻘건 콩나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날마다 풀밭인 밥상은 생선 장수가 다녀가면 그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고등어나 꽁치, 운이 좋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면수가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두부도 한참 나가 구멍가게에 가서 사 와야 하니 두부 넣은 된장찌개는 손님이 오면 먹던 별식이었다. 보따리상이든 생선 장수든 그렇게 우리 먹는 것을 같이 먹고 보냈다. 밭에서 따온 오이밖에 없어 무침을 하거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냉장고가 없으니 밥이 쉴 때가 많았고 된장에도 꼴까지가 끼거나 굼벵이 같은 벌레가 기어가기도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밤늦게까지 놀면 친구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오기도 했다. 때론 체면 차린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먹었다고 말하면 알아서 차려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픈 설움을 아니까?
 







스님 바랑엔 쌀이 한 되박 들어가기도 하고 보리쌀, 감자가 들어가기도 했다. 현금!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까….
그런데 상이군인이라며 의수를 한 사람이 현금을 안 준다고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땡깡을 피웠다.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워서 너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다고. 참다 참다 아버지가 열받아 밭을 고르던 갈고리를 휘두르며 “이눔이 안 가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화를 내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은 잘 먹이자였다. 지금 아이들이 시어 터진 김치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반찬 없다 투덜댈 것이다. 나조차 그럴 것 같다. 시어 터진 김치를 송송 썰어 볶아 찬밥을 넣고 볶아 먹을 때 남의 살 돼지고기 몇 점이라도 있다면 정말 맛있었을 텐데, 가끔 산에서 싸리버섯을 따다 볶아 먹으면 고기 맛이 났다.
배고파 본 사람만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이나 동남아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이 정말 부처님 시대를 몸소 느끼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걸식은 사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떳떳하게 돈을 내고 먹는 것과 밥을 구걸하는 일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힘든 것처럼 거절당할지 모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손에 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추위는 더욱 어깨에 내려와 앉고, 더위는 몸 안에 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모른다. 밴쿠버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료 금식을 하는 기관은 대부분이 교회 관련 기관이거나 교회에서 주관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곳도 있고 교회 재정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도 천주교 신부님이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비빔밥도 돈을 받고 파는 곳이 늘고 있다. 불교에도 자비와 나눔을 하는 무료 급식을 하는 사찰이 늘어났으면 한다. 사찰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보수하는 일, 진입로 포장 등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찰이 더욱 보기좋다. 사찰 건물에 쓸 자금이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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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한국에도 요즘 길거리에서 밥을 주는 밥 차가 많이 다니는 듯하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요즘엔 맥도널드조차 10불 이상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집을 나와 서성거리다 밥때가 되어 뭘 먹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은 눈에 안 띄고 가격만 눈에 들어온다. 한 끼를 때운다. 반면 식사를 즐기는 맛집 탐방의 차이는 아주 크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초대받은 집에 한국식 밑반찬이 많으면 부럽다. “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처럼 먹고 사네요” 하면 “웬걸요. 평소엔 우리도 다른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밑반찬이 풍성하면 밑반찬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식품점 가면 웬만한 한국 밑반찬 다 있지만, 가격이 선뜻 들게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늘 사던 콩나물, 두부, 시금치, 풋 배추 등이 2단에 5불, 콩나물 한 봉지에 3불, 무 한 개에 4불 등 쇼핑에도 기 눌리는 기분이다. 물론 한국 식품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코스코는 한 아이템이 보통 10불 단위다.

어릴 때 시골집엔 보따리상, 생선 장수, 자칭 상이군인, 스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대청 마루에 앉아 물건을 보여 주고, 때가 되면 우리 먹는 그대로 찬밥에 상추 쌈, 쌈장을 먹거나 담장에 길게 늘어선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싸 먹거나 애호박에 풋고추 감자 썰어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기도 했다. 생선전 같은 것은 제사 때나 먹는 것이고 육계장이든 돼지국밥이든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라도 있으면 일 도와주는 엄마를 졸졸 따라가 챙겨 주는 대로 냉 냉큼 잘도 받아먹었다. 모내기하는 날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국수 점심으로 나온 고추가루 뻘건 콩나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날마다 풀밭인 밥상은 생선 장수가 다녀가면 그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고등어나 꽁치, 운이 좋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면수가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두부도 한참 나가 구멍가게에 가서 사 와야 하니 두부 넣은 된장찌개는 손님이 오면 먹던 별식이었다. 보따리상이든 생선 장수든 그렇게 우리 먹는 것을 같이 먹고 보냈다. 밭에서 따온 오이밖에 없어 무침을 하거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냉장고가 없으니 밥이 쉴 때가 많았고 된장에도 꼴까지가 끼거나 굼벵이 같은 벌레가 기어가기도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밤늦게까지 놀면 친구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오기도 했다. 때론 체면 차린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먹었다고 말하면 알아서 차려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픈 설움을 아니까?
 





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해스팅 거리

콘크리트 건물처럼 굳어진 얼굴들
겨울비 맞은 얼굴처럼 굳어진 표정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뭉친 근육 덩어리처럼
누워 있어도 기대있어도 혼이 나간 얼굴로

살아도 죽은 자처럼
방바닥 같은 보도 블럭 위에 누운 사람들
세상이 밀어내고 도시가 버린 사람들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영혼처럼

비둘기 빵 주워 먹듯
나뒹구는 주사 바늘
뒷골목 널브러진 빨래처럼

나의 손끝조차 닿는 것이 싫은
짧은 순간에도
대낮 밴쿠버 이스트 해스팅 거리
날마다 일상처럼 앰뷸런스에 실린 쓰러진 영혼
검은 장갑을 낀 경찰

한동안 뵈지 않던 중국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면서도 창틀에 며칠 동안 싸 간 음식이 뒹굴었다지

오래되어 익숙하지만 늘 낯설기만 한 이민자의 발걸음은
해스팅을 총총 걸음친다.

 







#작가의 변
한국에도 요즘 길거리에서 밥을 주는 밥 차가 많이 다니는 듯하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요즘엔 맥도널드조차 10불 이상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집을 나와 서성거리다 밥때가 되어 뭘 먹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은 눈에 안 띄고 가격만 눈에 들어온다. 한 끼를 때운다. 반면 식사를 즐기는 맛집 탐방의 차이는 아주 크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초대받은 집에 한국식 밑반찬이 많으면 부럽다. “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처럼 먹고 사네요” 하면 “웬걸요. 평소엔 우리도 다른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밑반찬이 풍성하면 밑반찬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식품점 가면 웬만한 한국 밑반찬 다 있지만, 가격이 선뜻 들게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늘 사던 콩나물, 두부, 시금치, 풋 배추 등이 2단에 5불, 콩나물 한 봉지에 3불, 무 한 개에 4불 등 쇼핑에도 기 눌리는 기분이다. 물론 한국 식품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코스코는 한 아이템이 보통 10불 단위다.

어릴 때 시골집엔 보따리상, 생선 장수, 자칭 상이군인, 스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대청 마루에 앉아 물건을 보여 주고, 때가 되면 우리 먹는 그대로 찬밥에 상추 쌈, 쌈장을 먹거나 담장에 길게 늘어선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싸 먹거나 애호박에 풋고추 감자 썰어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기도 했다. 생선전 같은 것은 제사 때나 먹는 것이고 육계장이든 돼지국밥이든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라도 있으면 일 도와주는 엄마를 졸졸 따라가 챙겨 주는 대로 냉 냉큼 잘도 받아먹었다. 모내기하는 날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국수 점심으로 나온 고추가루 뻘건 콩나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날마다 풀밭인 밥상은 생선 장수가 다녀가면 그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고등어나 꽁치, 운이 좋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면수가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두부도 한참 나가 구멍가게에 가서 사 와야 하니 두부 넣은 된장찌개는 손님이 오면 먹던 별식이었다. 보따리상이든 생선 장수든 그렇게 우리 먹는 것을 같이 먹고 보냈다. 밭에서 따온 오이밖에 없어 무침을 하거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냉장고가 없으니 밥이 쉴 때가 많았고 된장에도 꼴까지가 끼거나 굼벵이 같은 벌레가 기어가기도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밤늦게까지 놀면 친구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오기도 했다. 때론 체면 차린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먹었다고 말하면 알아서 차려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픈 설움을 아니까?
 







스님 바랑엔 쌀이 한 되박 들어가기도 하고 보리쌀, 감자가 들어가기도 했다. 현금!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까….
그런데 상이군인이라며 의수를 한 사람이 현금을 안 준다고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땡깡을 피웠다.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워서 너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다고. 참다 참다 아버지가 열받아 밭을 고르던 갈고리를 휘두르며 “이눔이 안 가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화를 내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은 잘 먹이자였다. 지금 아이들이 시어 터진 김치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반찬 없다 투덜댈 것이다. 나조차 그럴 것 같다. 시어 터진 김치를 송송 썰어 볶아 찬밥을 넣고 볶아 먹을 때 남의 살 돼지고기 몇 점이라도 있다면 정말 맛있었을 텐데, 가끔 산에서 싸리버섯을 따다 볶아 먹으면 고기 맛이 났다.
배고파 본 사람만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이나 동남아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이 정말 부처님 시대를 몸소 느끼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걸식은 사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떳떳하게 돈을 내고 먹는 것과 밥을 구걸하는 일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힘든 것처럼 거절당할지 모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손에 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추위는 더욱 어깨에 내려와 앉고, 더위는 몸 안에 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모른다. 밴쿠버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료 금식을 하는 기관은 대부분이 교회 관련 기관이거나 교회에서 주관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곳도 있고 교회 재정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도 천주교 신부님이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비빔밥도 돈을 받고 파는 곳이 늘고 있다. 불교에도 자비와 나눔을 하는 무료 급식을 하는 사찰이 늘어났으면 한다. 사찰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보수하는 일, 진입로 포장 등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찰이 더욱 보기좋다. 사찰 건물에 쓸 자금이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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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바랑엔 쌀이 한 되박 들어가기도 하고 보리쌀, 감자가 들어가기도 했다. 현금!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까….
그런데 상이군인이라며 의수를 한 사람이 현금을 안 준다고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땡깡을 피웠다.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워서 너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다고. 참다 참다 아버지가 열받아 밭을 고르던 갈고리를 휘두르며 “이눔이 안 가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화를 내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은 잘 먹이자였다. 지금 아이들이 시어 터진 김치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반찬 없다 투덜댈 것이다. 나조차 그럴 것 같다. 시어 터진 김치를 송송 썰어 볶아 찬밥을 넣고 볶아 먹을 때 남의 살 돼지고기 몇 점이라도 있다면 정말 맛있었을 텐데, 가끔 산에서 싸리버섯을 따다 볶아 먹으면 고기 맛이 났다.
배고파 본 사람만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이나 동남아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이 정말 부처님 시대를 몸소 느끼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걸식은 사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떳떳하게 돈을 내고 먹는 것과 밥을 구걸하는 일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힘든 것처럼 거절당할지 모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손에 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추위는 더욱 어깨에 내려와 앉고, 더위는 몸 안에 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모른다. 밴쿠버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료 금식을 하는 기관은 대부분이 교회 관련 기관이거나 교회에서 주관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곳도 있고 교회 재정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도 천주교 신부님이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비빔밥도 돈을 받고 파는 곳이 늘고 있다. 불교에도 자비와 나눔을 하는 무료 급식을 하는 사찰이 늘어났으면 한다. 사찰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보수하는 일, 진입로 포장 등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찰이 더욱 보기좋다. 사찰 건물에 쓸 자금이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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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해스팅 거리

콘크리트 건물처럼 굳어진 얼굴들
겨울비 맞은 얼굴처럼 굳어진 표정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뭉친 근육 덩어리처럼
누워 있어도 기대있어도 혼이 나간 얼굴로

살아도 죽은 자처럼
방바닥 같은 보도 블럭 위에 누운 사람들
세상이 밀어내고 도시가 버린 사람들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영혼처럼

비둘기 빵 주워 먹듯
나뒹구는 주사 바늘
뒷골목 널브러진 빨래처럼

나의 손끝조차 닿는 것이 싫은
짧은 순간에도
대낮 밴쿠버 이스트 해스팅 거리
날마다 일상처럼 앰뷸런스에 실린 쓰러진 영혼
검은 장갑을 낀 경찰

한동안 뵈지 않던 중국 할머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면서도 창틀에 며칠 동안 싸 간 음식이 뒹굴었다지

오래되어 익숙하지만 늘 낯설기만 한 이민자의 발걸음은
해스팅을 총총 걸음친다.

 







#작가의 변
한국에도 요즘 길거리에서 밥을 주는 밥 차가 많이 다니는 듯하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요즘엔 맥도널드조차 10불 이상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집을 나와 서성거리다 밥때가 되어 뭘 먹긴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은 눈에 안 띄고 가격만 눈에 들어온다. 한 끼를 때운다. 반면 식사를 즐기는 맛집 탐방의 차이는 아주 크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초대받은 집에 한국식 밑반찬이 많으면 부럽다. “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처럼 먹고 사네요” 하면 “웬걸요. 평소엔 우리도 다른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밑반찬이 풍성하면 밑반찬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한국 식품점 가면 웬만한 한국 밑반찬 다 있지만, 가격이 선뜻 들게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늘 사던 콩나물, 두부, 시금치, 풋 배추 등이 2단에 5불, 콩나물 한 봉지에 3불, 무 한 개에 4불 등 쇼핑에도 기 눌리는 기분이다. 물론 한국 식품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코스코는 한 아이템이 보통 10불 단위다.

어릴 때 시골집엔 보따리상, 생선 장수, 자칭 상이군인, 스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대청 마루에 앉아 물건을 보여 주고, 때가 되면 우리 먹는 그대로 찬밥에 상추 쌈, 쌈장을 먹거나 담장에 길게 늘어선 호박잎을 밥 위에 쪄서 싸 먹거나 애호박에 풋고추 감자 썰어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기도 했다. 생선전 같은 것은 제사 때나 먹는 것이고 육계장이든 돼지국밥이든 동네 큰일이 있는 집이라도 있으면 일 도와주는 엄마를 졸졸 따라가 챙겨 주는 대로 냉 냉큼 잘도 받아먹었다. 모내기하는 날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국수 점심으로 나온 고추가루 뻘건 콩나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날마다 풀밭인 밥상은 생선 장수가 다녀가면 그 짭짤하게 소금에 절인 고등어나 꽁치, 운이 좋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면수가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두부도 한참 나가 구멍가게에 가서 사 와야 하니 두부 넣은 된장찌개는 손님이 오면 먹던 별식이었다. 보따리상이든 생선 장수든 그렇게 우리 먹는 것을 같이 먹고 보냈다. 밭에서 따온 오이밖에 없어 무침을 하거나 쌈장에 찍어 먹거나, 냉장고가 없으니 밥이 쉴 때가 많았고 된장에도 꼴까지가 끼거나 굼벵이 같은 벌레가 기어가기도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가서 밤늦게까지 놀면 친구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오기도 했다. 때론 체면 차린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먹었다고 말하면 알아서 차려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픈 설움을 아니까?
 







스님 바랑엔 쌀이 한 되박 들어가기도 하고 보리쌀, 감자가 들어가기도 했다. 현금!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까….
그런데 상이군인이라며 의수를 한 사람이 현금을 안 준다고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땡깡을 피웠다.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워서 너희가 이렇게 평화로이 살 수 있다고. 참다 참다 아버지가 열받아 밭을 고르던 갈고리를 휘두르며 “이눔이 안 가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화를 내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은 잘 먹이자였다. 지금 아이들이 시어 터진 김치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반찬 없다 투덜댈 것이다. 나조차 그럴 것 같다. 시어 터진 김치를 송송 썰어 볶아 찬밥을 넣고 볶아 먹을 때 남의 살 돼지고기 몇 점이라도 있다면 정말 맛있었을 텐데, 가끔 산에서 싸리버섯을 따다 볶아 먹으면 고기 맛이 났다.
배고파 본 사람만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이나 동남아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이 정말 부처님 시대를 몸소 느끼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걸식은 사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떳떳하게 돈을 내고 먹는 것과 밥을 구걸하는 일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이 힘든 것처럼 거절당할지 모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손에 돈이 있으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추위는 더욱 어깨에 내려와 앉고, 더위는 몸 안에 자리를 펴고 떠날 줄을 모른다. 밴쿠버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료 금식을 하는 기관은 대부분이 교회 관련 기관이거나 교회에서 주관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곳도 있고 교회 재정으로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도 천주교 신부님이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오신날 비빔밥도 돈을 받고 파는 곳이 늘고 있다. 불교에도 자비와 나눔을 하는 무료 급식을 하는 사찰이 늘어났으면 한다. 사찰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보수하는 일, 진입로 포장 등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찰이 더욱 보기좋다. 사찰 건물에 쓸 자금이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무료 배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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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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