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59. 머루랑 다래랑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59. 머루랑 다래랑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5.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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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산 너머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까?
아버지가 멀리 홍 골 가서 소 꼴 베 올 때 바소쿠리 소 꼴 속에 담아 오신 머루랑 다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꼬마들과 산길 타고 마을 몇 개를 지나고 허리 굽혀야 겨우 지나는 땅굴 같은 일제시대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수로까지 지나면 소재지서 만난 동네 사람들처럼
때론 남이 가지 않는 길 산 넘고 물 건너듯 가다 보면 마주한 추억이 고장 난 망원렌즈 맞은편 커다란 눈동자처럼 내 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뜸 금 없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들어 줄 이도 없음을 안다.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 흥얼대며 일본 징용 끌려가서 살던 얘길 무용담처럼 하던 아버진 그 후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인지 소맷자락 붙잡던 일본 여인이 그리운 것인지 아프고 힘든 얘기는 쏙 빼고 늘 말했다
 

오늘 아침 서늘한 아침 공기처럼 그저 꼴 베어 온 아버지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징글징글하던 아침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창피한 아버지와 함께 걷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걷던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기억 파편을 죄다 잃어버리고 누구세요 하고 묻던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작가의 변
사월도 다 가고 이제 오월이 온다. 아직도 날마다 눈이 온다는 캐나다 북부에 사는 지인의 말처럼 날씨는 미친 듯이 춥다가 좋다가 비 오는 변덕이 죽 끓는 반복을 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그분이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외수 작가님의 작고 소식이 이번 주에 있었다. 감성 마을에서 날마다 찾아오던 후학과 많은 문학인과 각종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생전 선생의 활동들이 생각이 나고 수없이 늘어선 조화가 빼곡한 장례식장의 모습들이 왠지 생전 선생의 모습과는 다른 듯해서 낯설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미국 뉴욕의 9·11사태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고 기내식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것이라는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공허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직원의 절반이 정리 해고되는 상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어 한국 대형 마트가 밴쿠버에 문을 연 초창기 면접을 보고 출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상황은 주말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출근하기로 한 마트에 출근을 늦춰달라고 부탁을 하고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하니 한국행 비행기 표가 밴쿠버 출발은 없다.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중 가장 빠른 월요일 걸로 사서 빈손이지만 아버지의 장례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갔지만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모제 전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삼베로 만든 상복과 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등산복 바지 위에 차는 게이터 같은 아니 교련복 바지 위에 차던 각반 같은 것을 차고 상주의 무장을 마치고 상주의 상징인 지팡이를 짚었더니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장례식장의 그 흔한 국화 한 송이 없는 초라한 망자의 초상화 앞에 그저 눈물이 꽃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곡을 했다. 이외수 작가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가 먼저 떠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그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일 수도 있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니 취지에 맞게 좋은 날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에 이민 온 후론 자주 못 드리는 전화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통화를 비싼 해외 전화를 붙들고 말없이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아 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손위 처남들까지 모두 떠나고 난 지금은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 자주 연락할 필요가 없이 카톡으로 SNS 모임으로 한국에 사는 것처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나는 많은 지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 지게 안에 담아 온 사랑이 듬뿍 든 머루와 다래는 머루 포도와 키위 비슷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절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 기억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억이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로~ 하 우 아유. 파인 쌩큐” 하고 나면 더는 물어볼 말도 관심사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보다는 그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주절주절 포도송이 같이 영글어 가는 대화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이 게임과 자기들만의 인터넷에 빠지듯이 나도 나의 인터넷 세계에 빠진 요즘은 함께 살아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의 공유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교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처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것은 반가운 것이다. “고향이 어디야”, “어느 학교 나왔어?” 하고, 그러다 “군대는 어디서 근무했어” 하는 것은 함께한 시간의 공유 시간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니 지연, 학연, 군대 인연 등으로 엮어 공유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옆지기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향 같은 거다. 해외에 살면서 고국은 그런 거다. 고향, 그리운 고향.

캐나다에선 오월에 어머니 날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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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산 너머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까?
아버지가 멀리 홍 골 가서 소 꼴 베 올 때 바소쿠리 소 꼴 속에 담아 오신 머루랑 다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꼬마들과 산길 타고 마을 몇 개를 지나고 허리 굽혀야 겨우 지나는 땅굴 같은 일제시대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수로까지 지나면 소재지서 만난 동네 사람들처럼
때론 남이 가지 않는 길 산 넘고 물 건너듯 가다 보면 마주한 추억이 고장 난 망원렌즈 맞은편 커다란 눈동자처럼 내 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뜸 금 없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들어 줄 이도 없음을 안다.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 흥얼대며 일본 징용 끌려가서 살던 얘길 무용담처럼 하던 아버진 그 후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인지 소맷자락 붙잡던 일본 여인이 그리운 것인지 아프고 힘든 얘기는 쏙 빼고 늘 말했다
 

오늘 아침 서늘한 아침 공기처럼 그저 꼴 베어 온 아버지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징글징글하던 아침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창피한 아버지와 함께 걷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걷던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기억 파편을 죄다 잃어버리고 누구세요 하고 묻던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작가의 변
사월도 다 가고 이제 오월이 온다. 아직도 날마다 눈이 온다는 캐나다 북부에 사는 지인의 말처럼 날씨는 미친 듯이 춥다가 좋다가 비 오는 변덕이 죽 끓는 반복을 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그분이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외수 작가님의 작고 소식이 이번 주에 있었다. 감성 마을에서 날마다 찾아오던 후학과 많은 문학인과 각종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생전 선생의 활동들이 생각이 나고 수없이 늘어선 조화가 빼곡한 장례식장의 모습들이 왠지 생전 선생의 모습과는 다른 듯해서 낯설기도 하다.





어릴 적 산 너머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까?
아버지가 멀리 홍 골 가서 소 꼴 베 올 때 바소쿠리 소 꼴 속에 담아 오신 머루랑 다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꼬마들과 산길 타고 마을 몇 개를 지나고 허리 굽혀야 겨우 지나는 땅굴 같은 일제시대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수로까지 지나면 소재지서 만난 동네 사람들처럼
때론 남이 가지 않는 길 산 넘고 물 건너듯 가다 보면 마주한 추억이 고장 난 망원렌즈 맞은편 커다란 눈동자처럼 내 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뜸 금 없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들어 줄 이도 없음을 안다.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 흥얼대며 일본 징용 끌려가서 살던 얘길 무용담처럼 하던 아버진 그 후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인지 소맷자락 붙잡던 일본 여인이 그리운 것인지 아프고 힘든 얘기는 쏙 빼고 늘 말했다
 

오늘 아침 서늘한 아침 공기처럼 그저 꼴 베어 온 아버지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징글징글하던 아침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창피한 아버지와 함께 걷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걷던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기억 파편을 죄다 잃어버리고 누구세요 하고 묻던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작가의 변
사월도 다 가고 이제 오월이 온다. 아직도 날마다 눈이 온다는 캐나다 북부에 사는 지인의 말처럼 날씨는 미친 듯이 춥다가 좋다가 비 오는 변덕이 죽 끓는 반복을 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그분이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외수 작가님의 작고 소식이 이번 주에 있었다. 감성 마을에서 날마다 찾아오던 후학과 많은 문학인과 각종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생전 선생의 활동들이 생각이 나고 수없이 늘어선 조화가 빼곡한 장례식장의 모습들이 왠지 생전 선생의 모습과는 다른 듯해서 낯설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미국 뉴욕의 9·11사태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고 기내식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것이라는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공허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직원의 절반이 정리 해고되는 상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어 한국 대형 마트가 밴쿠버에 문을 연 초창기 면접을 보고 출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상황은 주말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출근하기로 한 마트에 출근을 늦춰달라고 부탁을 하고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하니 한국행 비행기 표가 밴쿠버 출발은 없다.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중 가장 빠른 월요일 걸로 사서 빈손이지만 아버지의 장례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갔지만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모제 전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삼베로 만든 상복과 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등산복 바지 위에 차는 게이터 같은 아니 교련복 바지 위에 차던 각반 같은 것을 차고 상주의 무장을 마치고 상주의 상징인 지팡이를 짚었더니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장례식장의 그 흔한 국화 한 송이 없는 초라한 망자의 초상화 앞에 그저 눈물이 꽃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곡을 했다. 이외수 작가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가 먼저 떠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그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일 수도 있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니 취지에 맞게 좋은 날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에 이민 온 후론 자주 못 드리는 전화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통화를 비싼 해외 전화를 붙들고 말없이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아 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손위 처남들까지 모두 떠나고 난 지금은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 자주 연락할 필요가 없이 카톡으로 SNS 모임으로 한국에 사는 것처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나는 많은 지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 지게 안에 담아 온 사랑이 듬뿍 든 머루와 다래는 머루 포도와 키위 비슷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절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 기억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억이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로~ 하 우 아유. 파인 쌩큐” 하고 나면 더는 물어볼 말도 관심사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보다는 그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주절주절 포도송이 같이 영글어 가는 대화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이 게임과 자기들만의 인터넷에 빠지듯이 나도 나의 인터넷 세계에 빠진 요즘은 함께 살아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의 공유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교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처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것은 반가운 것이다. “고향이 어디야”, “어느 학교 나왔어?” 하고, 그러다 “군대는 어디서 근무했어” 하는 것은 함께한 시간의 공유 시간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니 지연, 학연, 군대 인연 등으로 엮어 공유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옆지기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향 같은 거다. 해외에 살면서 고국은 그런 거다. 고향, 그리운 고향.

캐나다에선 오월에 어머니 날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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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미국 뉴욕의 9·11사태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고 기내식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것이라는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공허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직원의 절반이 정리 해고되는 상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어 한국 대형 마트가 밴쿠버에 문을 연 초창기 면접을 보고 출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상황은 주말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출근하기로 한 마트에 출근을 늦춰달라고 부탁을 하고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하니 한국행 비행기 표가 밴쿠버 출발은 없다.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중 가장 빠른 월요일 걸로 사서 빈손이지만 아버지의 장례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갔지만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모제 전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삼베로 만든 상복과 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등산복 바지 위에 차는 게이터 같은 아니 교련복 바지 위에 차던 각반 같은 것을 차고 상주의 무장을 마치고 상주의 상징인 지팡이를 짚었더니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장례식장의 그 흔한 국화 한 송이 없는 초라한 망자의 초상화 앞에 그저 눈물이 꽃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곡을 했다. 이외수 작가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가 먼저 떠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그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산 너머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까?
아버지가 멀리 홍 골 가서 소 꼴 베 올 때 바소쿠리 소 꼴 속에 담아 오신 머루랑 다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꼬마들과 산길 타고 마을 몇 개를 지나고 허리 굽혀야 겨우 지나는 땅굴 같은 일제시대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수로까지 지나면 소재지서 만난 동네 사람들처럼
때론 남이 가지 않는 길 산 넘고 물 건너듯 가다 보면 마주한 추억이 고장 난 망원렌즈 맞은편 커다란 눈동자처럼 내 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뜸 금 없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들어 줄 이도 없음을 안다.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 흥얼대며 일본 징용 끌려가서 살던 얘길 무용담처럼 하던 아버진 그 후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인지 소맷자락 붙잡던 일본 여인이 그리운 것인지 아프고 힘든 얘기는 쏙 빼고 늘 말했다
 

오늘 아침 서늘한 아침 공기처럼 그저 꼴 베어 온 아버지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징글징글하던 아침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창피한 아버지와 함께 걷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걷던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기억 파편을 죄다 잃어버리고 누구세요 하고 묻던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작가의 변
사월도 다 가고 이제 오월이 온다. 아직도 날마다 눈이 온다는 캐나다 북부에 사는 지인의 말처럼 날씨는 미친 듯이 춥다가 좋다가 비 오는 변덕이 죽 끓는 반복을 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그분이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외수 작가님의 작고 소식이 이번 주에 있었다. 감성 마을에서 날마다 찾아오던 후학과 많은 문학인과 각종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생전 선생의 활동들이 생각이 나고 수없이 늘어선 조화가 빼곡한 장례식장의 모습들이 왠지 생전 선생의 모습과는 다른 듯해서 낯설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미국 뉴욕의 9·11사태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고 기내식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것이라는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공허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직원의 절반이 정리 해고되는 상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어 한국 대형 마트가 밴쿠버에 문을 연 초창기 면접을 보고 출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상황은 주말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출근하기로 한 마트에 출근을 늦춰달라고 부탁을 하고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하니 한국행 비행기 표가 밴쿠버 출발은 없다.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중 가장 빠른 월요일 걸로 사서 빈손이지만 아버지의 장례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갔지만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모제 전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삼베로 만든 상복과 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등산복 바지 위에 차는 게이터 같은 아니 교련복 바지 위에 차던 각반 같은 것을 차고 상주의 무장을 마치고 상주의 상징인 지팡이를 짚었더니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장례식장의 그 흔한 국화 한 송이 없는 초라한 망자의 초상화 앞에 그저 눈물이 꽃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곡을 했다. 이외수 작가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가 먼저 떠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그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일 수도 있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니 취지에 맞게 좋은 날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에 이민 온 후론 자주 못 드리는 전화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통화를 비싼 해외 전화를 붙들고 말없이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아 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손위 처남들까지 모두 떠나고 난 지금은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 자주 연락할 필요가 없이 카톡으로 SNS 모임으로 한국에 사는 것처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나는 많은 지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 지게 안에 담아 온 사랑이 듬뿍 든 머루와 다래는 머루 포도와 키위 비슷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절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 기억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억이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로~ 하 우 아유. 파인 쌩큐” 하고 나면 더는 물어볼 말도 관심사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보다는 그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주절주절 포도송이 같이 영글어 가는 대화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이 게임과 자기들만의 인터넷에 빠지듯이 나도 나의 인터넷 세계에 빠진 요즘은 함께 살아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의 공유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교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처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것은 반가운 것이다. “고향이 어디야”, “어느 학교 나왔어?” 하고, 그러다 “군대는 어디서 근무했어” 하는 것은 함께한 시간의 공유 시간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니 지연, 학연, 군대 인연 등으로 엮어 공유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옆지기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향 같은 거다. 해외에 살면서 고국은 그런 거다. 고향, 그리운 고향.

캐나다에선 오월에 어머니 날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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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니 취지에 맞게 좋은 날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에 이민 온 후론 자주 못 드리는 전화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통화를 비싼 해외 전화를 붙들고 말없이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아 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손위 처남들까지 모두 떠나고 난 지금은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 자주 연락할 필요가 없이 카톡으로 SNS 모임으로 한국에 사는 것처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나는 많은 지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 지게 안에 담아 온 사랑이 듬뿍 든 머루와 다래는 머루 포도와 키위 비슷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절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 기억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억이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로~ 하 우 아유. 파인 쌩큐” 하고 나면 더는 물어볼 말도 관심사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보다는 그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주절주절 포도송이 같이 영글어 가는 대화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이 게임과 자기들만의 인터넷에 빠지듯이 나도 나의 인터넷 세계에 빠진 요즘은 함께 살아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의 공유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교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처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것은 반가운 것이다. “고향이 어디야”, “어느 학교 나왔어?” 하고, 그러다 “군대는 어디서 근무했어” 하는 것은 함께한 시간의 공유 시간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니 지연, 학연, 군대 인연 등으로 엮어 공유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옆지기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향 같은 거다. 해외에 살면서 고국은 그런 거다. 고향, 그리운 고향.

캐나다에선 오월에 어머니 날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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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산 너머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까?
아버지가 멀리 홍 골 가서 소 꼴 베 올 때 바소쿠리 소 꼴 속에 담아 오신 머루랑 다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꼬마들과 산길 타고 마을 몇 개를 지나고 허리 굽혀야 겨우 지나는 땅굴 같은 일제시대 만들어졌다는 콘크리트 수로까지 지나면 소재지서 만난 동네 사람들처럼
때론 남이 가지 않는 길 산 넘고 물 건너듯 가다 보면 마주한 추억이 고장 난 망원렌즈 맞은편 커다란 눈동자처럼 내 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뜸 금 없이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들어 줄 이도 없음을 안다.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 흥얼대며 일본 징용 끌려가서 살던 얘길 무용담처럼 하던 아버진 그 후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응어리가 남은 것인지 소맷자락 붙잡던 일본 여인이 그리운 것인지 아프고 힘든 얘기는 쏙 빼고 늘 말했다
 

오늘 아침 서늘한 아침 공기처럼 그저 꼴 베어 온 아버지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징글징글하던 아침 기침 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창피한 아버지와 함께 걷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걷던 시간이 그리울 뿐이다
기억 파편을 죄다 잃어버리고 누구세요 하고 묻던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다


#작가의 변
사월도 다 가고 이제 오월이 온다. 아직도 날마다 눈이 온다는 캐나다 북부에 사는 지인의 말처럼 날씨는 미친 듯이 춥다가 좋다가 비 오는 변덕이 죽 끓는 반복을 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그분이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외수 작가님의 작고 소식이 이번 주에 있었다. 감성 마을에서 날마다 찾아오던 후학과 많은 문학인과 각종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생전 선생의 활동들이 생각이 나고 수없이 늘어선 조화가 빼곡한 장례식장의 모습들이 왠지 생전 선생의 모습과는 다른 듯해서 낯설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미국 뉴욕의 9·11사태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고 기내식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것이라는 호기롭게 내뱉은 말은 공허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직원의 절반이 정리 해고되는 상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어 한국 대형 마트가 밴쿠버에 문을 연 초창기 면접을 보고 출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상황은 주말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출근하기로 한 마트에 출근을 늦춰달라고 부탁을 하고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하니 한국행 비행기 표가 밴쿠버 출발은 없다.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중 가장 빠른 월요일 걸로 사서 빈손이지만 아버지의 장례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갔지만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모제 전날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삼베로 만든 상복과 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등산복 바지 위에 차는 게이터 같은 아니 교련복 바지 위에 차던 각반 같은 것을 차고 상주의 무장을 마치고 상주의 상징인 지팡이를 짚었더니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장례식장의 그 흔한 국화 한 송이 없는 초라한 망자의 초상화 앞에 그저 눈물이 꽃이 되었을 뿐이다.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곡을 했다. 이외수 작가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고 왜 아버지가 먼저 떠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그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잔치일 수도 있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니 취지에 맞게 좋은 날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에 이민 온 후론 자주 못 드리는 전화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통화를 비싼 해외 전화를 붙들고 말없이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아 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손위 처남들까지 모두 떠나고 난 지금은 한국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 자주 연락할 필요가 없이 카톡으로 SNS 모임으로 한국에 사는 것처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나는 많은 지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 지게 안에 담아 온 사랑이 듬뿍 든 머루와 다래는 머루 포도와 키위 비슷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절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 기억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억이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로~ 하 우 아유. 파인 쌩큐” 하고 나면 더는 물어볼 말도 관심사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보다는 그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주절주절 포도송이 같이 영글어 가는 대화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이 게임과 자기들만의 인터넷에 빠지듯이 나도 나의 인터넷 세계에 빠진 요즘은 함께 살아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의 공유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교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처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것은 반가운 것이다. “고향이 어디야”, “어느 학교 나왔어?” 하고, 그러다 “군대는 어디서 근무했어” 하는 것은 함께한 시간의 공유 시간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니 지연, 학연, 군대 인연 등으로 엮어 공유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옆지기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향 같은 거다. 해외에 살면서 고국은 그런 거다. 고향, 그리운 고향.

캐나다에선 오월에 어머니 날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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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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