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7. 어머니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7. 어머니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2.03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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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서 쇠를 녹여 쇠를 만들듯

뼈를 녹여 뼈를 만들고

피를 갈아 살을 만들어 내고

바람 불면 날아 갈까

비가 오면 떠내려 갈까

날개 밑에 품은 알처럼.

 

#작가의 변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설에도 일해야 하는 일정은 한국에서나 이곳 캐나다에서나 비슷하다. 한국에 호텔에 일할 때 어머니는 남들은 명절에 다 내려오는데 뭔 떼돈을 번다고 남들이 다 쉬는 명절에 일하냐는 원망 어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명절에도 일하느라 고향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많은 중생에게 새해엔 호랑이 기운이 넘쳐나길 기도하며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산중 제왕의 힘으로 더욱 복된 나날이 되시길 빈다.

아래의 글은 30년 전인 1992년 신혼 때 아이를 임신하고 고생하던 아내의 모습을 쓴 노조 회보에 올렸던 글인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같게 하고 글을 보면 당시 서울대병원의 병실 보조 의자에서 쪽잠 자던 나의 모습과 다른 보호자들이 떠오르곤 한다. 다들 많이들 변했을 텐데…. 담당 의사와 담당 간호사들의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그 느낌은 살아 있다.

산부인과 31병동3121호

이 글은 1992년 결혼하고 임신중독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의 병원 이야기이다. 당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다니던 때라 노보에 실었다.

옆지기의 사촌이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해 입원 수속 전 은길상 선생님을 찾으라는 것을 깜박 잊고 그냥 수속하려다 되돌아설 뻔 했지만, 간호사실에서 좀 기다리다 곧바로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곧바로 6명이 쓰는 다인실 3121호 병실로 올라갔다. 입원하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분만실에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아내는 링거를 꽂고 이동용 침대에 실려 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난 마냥 기다리는 시간. 분만실 앞에는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고 썰렁하기조차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집에서 새벽 2시에 나와 길병원에서 진료, 그리고 이곳 서울대 병원까지 오면서의 피로와 배고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저녁 10시가 되어 간단히 라면을 먹고 다시 병실에 돌아와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환자가 병실로 돌아오지 않으니 그냥 자라고 했다. 분만실이 이곳에서는 중환자실처럼 사용된다고 다른 보호자들이 이야길 해줬다. 분만실에는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기에 식사 시간에 잠깐 면회만 하고 나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실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들끼리, 환자와 환자끼리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같은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이라 그런 듯 했다. 그래서 서로가 위로하면서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반찬도 나누어 먹고, 과일 음료수도 나누면서 어려운 이웃끼리 위로해야 돈 쓸데가 없어 특실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보다 덜 추운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일곱 달 만에 아이를 낳은, 도가니탕을 자주 먹어 도가니가 된 도가니 아저씨네 아이는 폐혈증으로 낳자마자 한대에 100만 원짜리 수입 주사를 맞고 인큐베이터에 있고, 남편이 분만실 의사인데 여덟 달째 들어와 입원해 있다. 충남 대천서 올라 온 산모도 여덟 달째였고, 제주도에서 온 산모는 양수 과다로 왔는데 남편이 귤 두 상자를 가져와 나누어 먹기도 했다.

분만실에서 안 천안에서 온 산모는 쌍둥이를 여덟 달 만에 순산했고, 서울대 병원 직원인 또 다른 쌍둥이네, 서산이 집인 젊은 산모, 대구서 올라온 딸만 셋이나 낳아 흐느껴 울던 아줌마, 미아리에서 예정일을 넘기고 와서 간호사에게 혼나던 산모,밤새워 글씨로 쓰고 수화로 간호하던 인정 많던, 둘 다 말을 못하는 농아 부부, 병원 앞에서 산다는 산모, 침대 여섯에 들었다 나가는 산모도 많았다.



노보 소식지

 

용광로에서 쇠를 녹여 쇠를 만들듯

뼈를 녹여 뼈를 만들고

피를 갈아 살을 만들어 내고

바람 불면 날아 갈까

비가 오면 떠내려 갈까

날개 밑에 품은 알처럼.

 

#작가의 변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설에도 일해야 하는 일정은 한국에서나 이곳 캐나다에서나 비슷하다. 한국에 호텔에 일할 때 어머니는 남들은 명절에 다 내려오는데 뭔 떼돈을 번다고 남들이 다 쉬는 명절에 일하냐는 원망 어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명절에도 일하느라 고향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많은 중생에게 새해엔 호랑이 기운이 넘쳐나길 기도하며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산중 제왕의 힘으로 더욱 복된 나날이 되시길 빈다.

아래의 글은 30년 전인 1992년 신혼 때 아이를 임신하고 고생하던 아내의 모습을 쓴 노조 회보에 올렸던 글인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같게 하고 글을 보면 당시 서울대병원의 병실 보조 의자에서 쪽잠 자던 나의 모습과 다른 보호자들이 떠오르곤 한다. 다들 많이들 변했을 텐데…. 담당 의사와 담당 간호사들의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그 느낌은 살아 있다.

산부인과 31병동3121호

이 글은 1992년 결혼하고 임신중독과 신우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의 병원 이야기이다. 당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다니던 때라 노보에 실었다.

옆지기의 사촌이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해 입원 수속 전 은길상 선생님을 찾으라는 것을 깜박 잊고 그냥 수속하려다 되돌아설 뻔 했지만, 간호사실에서 좀 기다리다 곧바로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곧바로 6명이 쓰는 다인실 3121호 병실로 올라갔다. 입원하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분만실에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아내는 링거를 꽂고 이동용 침대에 실려 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난 마냥 기다리는 시간. 분만실 앞에는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고 썰렁하기조차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집에서 새벽 2시에 나와 길병원에서 진료, 그리고 이곳 서울대 병원까지 오면서의 피로와 배고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저녁 10시가 되어 간단히 라면을 먹고 다시 병실에 돌아와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환자가 병실로 돌아오지 않으니 그냥 자라고 했다. 분만실이 이곳에서는 중환자실처럼 사용된다고 다른 보호자들이 이야길 해줬다. 분만실에는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기에 식사 시간에 잠깐 면회만 하고 나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실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들끼리, 환자와 환자끼리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같은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이라 그런 듯 했다. 그래서 서로가 위로하면서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반찬도 나누어 먹고, 과일 음료수도 나누면서 어려운 이웃끼리 위로해야 돈 쓸데가 없어 특실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보다 덜 추운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일곱 달 만에 아이를 낳은, 도가니탕을 자주 먹어 도가니가 된 도가니 아저씨네 아이는 폐혈증으로 낳자마자 한대에 100만 원짜리 수입 주사를 맞고 인큐베이터에 있고, 남편이 분만실 의사인데 여덟 달째 들어와 입원해 있다. 충남 대천서 올라 온 산모도 여덟 달째였고, 제주도에서 온 산모는 양수 과다로 왔는데 남편이 귤 두 상자를 가져와 나누어 먹기도 했다.

분만실에서 안 천안에서 온 산모는 쌍둥이를 여덟 달 만에 순산했고, 서울대 병원 직원인 또 다른 쌍둥이네, 서산이 집인 젊은 산모, 대구서 올라온 딸만 셋이나 낳아 흐느껴 울던 아줌마, 미아리에서 예정일을 넘기고 와서 간호사에게 혼나던 산모,밤새워 글씨로 쓰고 수화로 간호하던 인정 많던, 둘 다 말을 못하는 농아 부부, 병원 앞에서 산다는 산모, 침대 여섯에 들었다 나가는 산모도 많았다.

노보 소식지
노보 소식지

아내는 일주일 후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나와서 치료하게 되었고 난 더욱 바빠졌다. 휴가를 다 사용하여 낮엔 직장 출근하고 밤에 간호하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낮엔 장모님이 간호하셨는데, 장모님이 힘들어하시니까 집사람은 더욱 불편했었나 보다. 그래서 퇴근한 나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하루 항생제 4대, 피검사, 링거 주입, 식염수 주사, 뱃속 태아 체크, 소·대변양 체크와 검사 기록, 아내의 하루는 검사와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인사는 “오늘 소변 어때요.” 대변은요?” 이었다. 하혈은 그치지 않았고 아내는 부어서 몸무게가 무려 15킬로그램이 늘었다. 부은 발은 터질 것 같았고 얼굴도 딴 사람 얼굴이 되었다. 혼자서는 눕지도 일어나지도 돌아눕지도 못하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소·대변을 받아 내고 나서 창밖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나오는 병원 진료비 고지서는 검사비 특진료 등이 많아 회사 보험 혜택을 받아도 엄청났다. 처남이 돈을 구하러 다니고 난 출근하는 것과 아내를 간호하는 것 외에 할 능력이 없었다. 내가 그토록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낮에 출근하고 밤에 간호하는 일과가 늘어 가면서 난 피로가 겹쳐지면서 아내가 밤에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 갔다. 때 아내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베개를 던져 보조 침대에 누운 나를 깨우기도 했다. 회사에선 우리 부서원들이 정성 어린 성금을 모아 주었고 다들 배려해 주는 덕분에 근무 중에도 조금씩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아내는 계속 한약 먹기를 고집했고 급성 신장염에 임신중독이란 판정이 나오자 아는 형인 신라 한의원원장이 한약을 만들어 병원에 와주었고 창턱에 숨겨두고 병원 몰래 10일 치 한약을 복용한 지 4일 후 하혈이 점차 줄고 5일째 하혈이 거의 멎었다. 물론 몰래 한약 냄새도 안 나게 한다고 차가운 약을 복용하고, 그릇도 마시자마자 바로 씻고 눈치 보는 것도 힘들었다. 걸리면 병원에서 쫓겨날 테니까? 창가에 커튼 뒤에 한약을 숨겨두고 날마다 도둑고양이처럼 먹은 한약이 효과를 본 것이다.

11월 11일 오전 9시로 아내의 출산 수술 날이 잡혔다. 아내의 소변에 하혈이 멈췄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내의 신장염이 쾌유한 덕택이기도 했고 아이들 또한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청진기로 체크하고 초음파로 검사해 임신 중인 아기의 몸무게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을 낳고 산모를 완치하기 위해 예정일보다 한 달을 앞당겨 오전 8시 수술실로 들어간 아내는 12시가 돼서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았다. 아들 2.12킬로그램, 딸 2.54킬로그램 인데, 딸은 입안에 이상이 있었다. 응급환자가 오는 바람에 예정된 수술 시간인 9시보다 늦은 11시가 넘어 12시가 거의 되어서야 수술을 끝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과의 예정된 만남도 그만큼 늦어지게 된 것이다.

나의 당신
등잔 밑은 항상
어둠이듯이
내조하는 당신은
항상 그늘이었네

생일에 생일 케잌 하나
사주지 못해도 날 사랑하고
쉬는 날이면 잠만 자는
나를 사랑하고
큰 애기처럼 투정부려도
날 사랑하고
병상에 누운 당신을
그 언제보다 사랑합니다

잠을 한 잠 못자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어도
돌아서면 그립고
한밤중에
당신을 부축하여 화장실 가면서
때론 투정도 부려보지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아직도 날 사랑하냐고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 위해
오늘을 이겨내야지

가끔은 당신이 열이 올라 사경을 헤매고
가끔은 당신이 숨이 막혀
간호실에 쫓아가기도 했지만
날마다 풍선처럼 변한 몸이 당신을 더 눕게 하고
하혈은 여전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12월 18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우여곡절 끝에 퇴원은 하는데 둘째 아이 데리고 방배동 김재찬 의원을 들렀다 가야 한다. 서울대병원 협력기관이 있는 방배동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 수술 준비를 하고 퇴원한 지 이틀 만에 서울대병원에 딸아이는 다시 입원했다. 태어난 지 8일째인데 링거 주사 바늘을 꽃을 땐 내 가슴이 저려 왔다. 그리고 아들은 심장 정밀검사를 하고 딸은 퇴원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방배동 의원에 다닌다. 2차 수술은 2월쯤 될듯한데 아무 일이 없었으면 하고 빈다.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이제 두 달이 됐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아시고 노동조합에서도 성금을 모아 주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터라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 딸이 수술이 잘되고 아들의 심장도 정상으로 돌아오길 비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든 염려하시는 분들 덕택에 이만큼 버텨나간다고 생각하니 재삼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신라한의원 재석이 형, 쌍둥이 이름 지어준 철학하는 태훈 씨, 그리고 우리 가족, 노조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어느덧 신정도 지나고 구정도 얼마 남지 않은 대목 때인데 시골에 부모님께 안부라도 여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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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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