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6. 불빛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6. 불빛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1.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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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처럼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너와 나의 거리

어두운 밤

새어 나온 불빛

바라만 보아도 따스하기만 한데

내 어깨에 내린 시린 서리처럼
 

#작가의 변
어린 시절 아파서 누워 일주일을 넘게 일어나지 못한 적도 없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일주일을 넘게 누워있다 보니 나중엔 일어나기도 힘들고 변소를 가는 것도 힘들었다. 예전엔 문턱을 넘어 마루를 지나 봉당을 내려가 마당을 가로질러 소 외양간 옆에 있는 변소 ,잘못 발을 디디면 똥통에 빠질 수 있기에 늘 조심해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물론 소변을 보러 변소에 들어가지 않는다. 외양간을 치운 거름과 퇴비를 썩히는 요즘으로 치자면 오가닉 퇴비 쌓아 두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곳에 볼일을 봤다.
일주일을 넘기자 속상해서 애를 끓이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워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눔의 시끼’ 먹는 것도 안 먹고 누워만 있냐! 그렇게 안 먹고 버티려면 차라리 죽어라.” 물론 진심은 아니셨을 것이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수수로 만든 빗자루 폭력 세례에 얼결에 일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한 게 그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는데 매가 약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아파도 약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쓰지도 못했다. 배가 아파 설사를 자주 했는데 배가 아프면 개울가의 익모초를 짖이겨 즙을 내서 먹였다. 깅게락 같다고 정말로 쓰다고 입을 안 벌리면 소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이듯 강제로 입을 벌려서 먹였다. 감기가 폐렴이 되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은 적도 있지만 뭐 나만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홑껍데기를 입고 다녔으니 바지를 갑자기 끌어 내려 고추를 보며 놀리는 놀이가 유행했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도 개울에서 첨벙거리다 검정 고무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해마다 한 번 쌀을 이고 절에 다녀오시는 어머니는 늘 같은 주의사항, 높은데 가지 말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주의 주셨는데, 홍골 연못에 빠져서 두 번을 가자 앉고 세 번째 떠오를 때 나를 구해준 무지골의 동네 형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지만 표현을 하지 못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말이다. 그때는 어차피 감기약이나 소화제조차 구하기 힘들고 약국도 2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먹는 것이 약이어야 했다. 겨울에 아삭아삭한 사과를 먹으면 아픈 것이 나을 것 같던 그 느낌 중에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사과를 끊어서 내게 퍼먹여 주셨다. 지금도 푸석한 사과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 편이다.
집집마다 호롱불이 창호지 문에 비치면 밖에서 보는 느낌은 평화로운 집이라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밖의 기온이 집안보다 더 추운 이유도 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부족하고 불편한 것 투성이였던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큰 이유는 다들 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부자라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는 때가 아닌 다들 약조차 제대로 못 사먹는 삶이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밴쿠버의 하우스 가격은 세계정상급이다. 이민 초에 5%만 다운페이하고 아파트를 구입 했었다. 그리고 모기지를 다 갚을 때 쯤에 하던 비지니스가 상황이 나빠 아파트를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비지니스도 정리했다. 빚 없이 속편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밴쿠버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올라 이젠 밴쿠버에서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꿈이 되었다. 그게 작고 허름한 아파트일지라도. 단독주택은 백만 불에서 이백만 불, 아파트는 사십만 불에서 팔십만 불이 넘는 것도 있다. 물론 방 개수에 따라, 아파트는 고층이냐 저층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고, 밴쿠버 도심이냐 외곽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밴쿠버 아일랜드 나나이모도 팔십만 불이 넘는 하우스 가격. 요즘 옆지기가 아파트 노랠 부른다. 뭔가 사야 하지 않냐는 것과 천정부지로 오르는 렌트비와 물가, 그러니 뭔가 비빌 언덕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불안정한 건강과 직장, 은퇴를 앞둔 나이. 모아둔 돈도 없는데 은퇴는 무슨, 맞다. 은퇴는 무슨, 계속 일해도 렌트비 내고 살기 버거운데. 그렇다고 25년 상환의 아파트를 융자로 대부분 자금을 마련해 산다는 것은 은퇴 후에도 죽을 때까지 일 다녀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코로나 같은 변수에 직장 구하기는 쉬울까. 나이 들수록 몸도 마음도 직장생활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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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처럼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너와 나의 거리

어두운 밤

새어 나온 불빛

바라만 보아도 따스하기만 한데

내 어깨에 내린 시린 서리처럼
 

#작가의 변
어린 시절 아파서 누워 일주일을 넘게 일어나지 못한 적도 없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일주일을 넘게 누워있다 보니 나중엔 일어나기도 힘들고 변소를 가는 것도 힘들었다. 예전엔 문턱을 넘어 마루를 지나 봉당을 내려가 마당을 가로질러 소 외양간 옆에 있는 변소 ,잘못 발을 디디면 똥통에 빠질 수 있기에 늘 조심해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물론 소변을 보러 변소에 들어가지 않는다. 외양간을 치운 거름과 퇴비를 썩히는 요즘으로 치자면 오가닉 퇴비 쌓아 두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곳에 볼일을 봤다.
일주일을 넘기자 속상해서 애를 끓이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워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눔의 시끼’ 먹는 것도 안 먹고 누워만 있냐! 그렇게 안 먹고 버티려면 차라리 죽어라.” 물론 진심은 아니셨을 것이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수수로 만든 빗자루 폭력 세례에 얼결에 일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한 게 그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는데 매가 약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아파도 약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쓰지도 못했다. 배가 아파 설사를 자주 했는데 배가 아프면 개울가의 익모초를 짖이겨 즙을 내서 먹였다. 깅게락 같다고 정말로 쓰다고 입을 안 벌리면 소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이듯 강제로 입을 벌려서 먹였다. 감기가 폐렴이 되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은 적도 있지만 뭐 나만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홑껍데기를 입고 다녔으니 바지를 갑자기 끌어 내려 고추를 보며 놀리는 놀이가 유행했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도 개울에서 첨벙거리다 검정 고무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해마다 한 번 쌀을 이고 절에 다녀오시는 어머니는 늘 같은 주의사항, 높은데 가지 말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주의 주셨는데, 홍골 연못에 빠져서 두 번을 가자 앉고 세 번째 떠오를 때 나를 구해준 무지골의 동네 형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지만 표현을 하지 못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말이다. 그때는 어차피 감기약이나 소화제조차 구하기 힘들고 약국도 2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먹는 것이 약이어야 했다. 겨울에 아삭아삭한 사과를 먹으면 아픈 것이 나을 것 같던 그 느낌 중에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사과를 끊어서 내게 퍼먹여 주셨다. 지금도 푸석한 사과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 편이다.
집집마다 호롱불이 창호지 문에 비치면 밖에서 보는 느낌은 평화로운 집이라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밖의 기온이 집안보다 더 추운 이유도 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부족하고 불편한 것 투성이였던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큰 이유는 다들 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부자라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는 때가 아닌 다들 약조차 제대로 못 사먹는 삶이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밴쿠버의 하우스 가격은 세계정상급이다. 이민 초에 5%만 다운페이하고 아파트를 구입 했었다. 그리고 모기지를 다 갚을 때 쯤에 하던 비지니스가 상황이 나빠 아파트를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비지니스도 정리했다. 빚 없이 속편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밴쿠버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올라 이젠 밴쿠버에서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꿈이 되었다. 그게 작고 허름한 아파트일지라도. 단독주택은 백만 불에서 이백만 불, 아파트는 사십만 불에서 팔십만 불이 넘는 것도 있다. 물론 방 개수에 따라, 아파트는 고층이냐 저층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고, 밴쿠버 도심이냐 외곽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밴쿠버 아일랜드 나나이모도 팔십만 불이 넘는 하우스 가격. 요즘 옆지기가 아파트 노랠 부른다. 뭔가 사야 하지 않냐는 것과 천정부지로 오르는 렌트비와 물가, 그러니 뭔가 비빌 언덕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불안정한 건강과 직장, 은퇴를 앞둔 나이. 모아둔 돈도 없는데 은퇴는 무슨, 맞다. 은퇴는 무슨, 계속 일해도 렌트비 내고 살기 버거운데. 그렇다고 25년 상환의 아파트를 융자로 대부분 자금을 마련해 산다는 것은 은퇴 후에도 죽을 때까지 일 다녀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코로나 같은 변수에 직장 구하기는 쉬울까. 나이 들수록 몸도 마음도 직장생활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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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처럼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너와 나의 거리

어두운 밤

새어 나온 불빛

바라만 보아도 따스하기만 한데

내 어깨에 내린 시린 서리처럼
 

#작가의 변
어린 시절 아파서 누워 일주일을 넘게 일어나지 못한 적도 없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일주일을 넘게 누워있다 보니 나중엔 일어나기도 힘들고 변소를 가는 것도 힘들었다. 예전엔 문턱을 넘어 마루를 지나 봉당을 내려가 마당을 가로질러 소 외양간 옆에 있는 변소 ,잘못 발을 디디면 똥통에 빠질 수 있기에 늘 조심해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물론 소변을 보러 변소에 들어가지 않는다. 외양간을 치운 거름과 퇴비를 썩히는 요즘으로 치자면 오가닉 퇴비 쌓아 두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곳에 볼일을 봤다.
일주일을 넘기자 속상해서 애를 끓이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워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눔의 시끼’ 먹는 것도 안 먹고 누워만 있냐! 그렇게 안 먹고 버티려면 차라리 죽어라.” 물론 진심은 아니셨을 것이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수수로 만든 빗자루 폭력 세례에 얼결에 일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한 게 그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는데 매가 약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아파도 약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쓰지도 못했다. 배가 아파 설사를 자주 했는데 배가 아프면 개울가의 익모초를 짖이겨 즙을 내서 먹였다. 깅게락 같다고 정말로 쓰다고 입을 안 벌리면 소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이듯 강제로 입을 벌려서 먹였다. 감기가 폐렴이 되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은 적도 있지만 뭐 나만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홑껍데기를 입고 다녔으니 바지를 갑자기 끌어 내려 고추를 보며 놀리는 놀이가 유행했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도 개울에서 첨벙거리다 검정 고무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해마다 한 번 쌀을 이고 절에 다녀오시는 어머니는 늘 같은 주의사항, 높은데 가지 말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주의 주셨는데, 홍골 연못에 빠져서 두 번을 가자 앉고 세 번째 떠오를 때 나를 구해준 무지골의 동네 형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지만 표현을 하지 못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말이다. 그때는 어차피 감기약이나 소화제조차 구하기 힘들고 약국도 2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먹는 것이 약이어야 했다. 겨울에 아삭아삭한 사과를 먹으면 아픈 것이 나을 것 같던 그 느낌 중에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사과를 끊어서 내게 퍼먹여 주셨다. 지금도 푸석한 사과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 편이다.
집집마다 호롱불이 창호지 문에 비치면 밖에서 보는 느낌은 평화로운 집이라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밖의 기온이 집안보다 더 추운 이유도 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부족하고 불편한 것 투성이였던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큰 이유는 다들 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부자라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는 때가 아닌 다들 약조차 제대로 못 사먹는 삶이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밴쿠버의 하우스 가격은 세계정상급이다. 이민 초에 5%만 다운페이하고 아파트를 구입 했었다. 그리고 모기지를 다 갚을 때 쯤에 하던 비지니스가 상황이 나빠 아파트를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비지니스도 정리했다. 빚 없이 속편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밴쿠버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올라 이젠 밴쿠버에서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꿈이 되었다. 그게 작고 허름한 아파트일지라도. 단독주택은 백만 불에서 이백만 불, 아파트는 사십만 불에서 팔십만 불이 넘는 것도 있다. 물론 방 개수에 따라, 아파트는 고층이냐 저층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고, 밴쿠버 도심이냐 외곽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밴쿠버 아일랜드 나나이모도 팔십만 불이 넘는 하우스 가격. 요즘 옆지기가 아파트 노랠 부른다. 뭔가 사야 하지 않냐는 것과 천정부지로 오르는 렌트비와 물가, 그러니 뭔가 비빌 언덕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불안정한 건강과 직장, 은퇴를 앞둔 나이. 모아둔 돈도 없는데 은퇴는 무슨, 맞다. 은퇴는 무슨, 계속 일해도 렌트비 내고 살기 버거운데. 그렇다고 25년 상환의 아파트를 융자로 대부분 자금을 마련해 산다는 것은 은퇴 후에도 죽을 때까지 일 다녀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코로나 같은 변수에 직장 구하기는 쉬울까. 나이 들수록 몸도 마음도 직장생활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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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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