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5. 2000년 또 평양에 들어가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5. 2000년 또 평양에 들어가다
  • 이지범/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11.2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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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윤이상의 명성으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민간 교류에서 남북불교계의 몫이 컸다. 1980년대 초기부터 기독교 단체들에 의한 남북교류는 이때부터 민간통일 단체로 확대됐다. 그중에서도 불교계의 등장은 새롭게 주목받았다.

이때까지 남북불교 교류는 정부 차원의 직접교류와 국외에서의 간접교류에 의한 형태가 전부였다. 기독교계는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첫 남북 간의 만남을 가졌다. 즉, ‘글리온회의’를 개최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와 ACRP 등과 연계한 종교교류를 뒀다. 또 민간통일운동 차원에서 높은 교류 욕구와 더불어 추진된 남북 간의 간접교류 역시도 재야통일 단체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추진됐다.

1991년 9월 남북의 UN 동시 가입으로 비롯된 남북 대화와 교류는 북측의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더욱 확대됐다. 1995년 이후, 1999년까지 남북교류에 있어 접촉회수와 방북 등 교류 과정에서 불교계 참여율은 기존 교류단체들과도 비등할 만큼 균형을 이루었다.

6.16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종교 교류가 촉진됨으로써 평양 방문의 회수와 용어의 변화 등 남측 불교계에 대한 북측의 인식 또한 전환됐다. 이때 불교계의 남북교류 참여가 증폭된 배경에는 1995년 11월 타계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영향력이 컸다. 북측과의 교류 위상과 파트너십에 있어 윤이상의 등장으로부터 불교간 교류의 위상이 제고됐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조불련과의 일대일 파트너십에서 탈피하여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등을 포함하는 교류 형태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남북한 직교류가 전개되면서 중국과 미국 등 제3국을 통한 간접교류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간접교류의 중계 역할을 담당해왔던 재외동포와 단체의 기능이 축소된 반면에, 접촉제의 등 통신업무와 제3국에서의 안내, 통역 등을 넘어선 전문적 역할을 맡게 됐다. 이러한 부문은 그간 소개된 바 없듯이 그야말로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의 취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변화된 남북불교 교류에서의 변화된 내용과 더불어 북한불교 변화의 기폭제가 된 평양 광법사의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의 현장, 그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청공 윤이상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2000.11.4. 평양 광법사) 사진=평불협 '하나로'(2000. 12월호)



 



청공 윤이상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 답례인사(2000.11.4. 평양 광법사) 사진=평불협 사진자료



윤이상, 남북불교를 합치다

현대음악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 윤이상의 법명은 ‘청공(靑空)’이다. 1994년에 인천 용화사 송담 선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의 부인 이수자 씨도 그때 함께 ‘문수월(文殊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살아생전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윤이상은 1994년 그의 누이 윤동화 씨의 권유로 서면과 유선으로 수계와 법명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진다. 그때와 그 후에도 송담 선사와 자주 통화하며 위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법명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00년 11월 4일 오후 3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다. 분단 45년, 199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위해 평양을 처음 방문했던 작곡가 윤이상은 1995년 그의 사후에도 1998년과 이듬해 그리고 2000년 11월 평양 광법사에 남북한의 불교를 불러 모았다. 이때 일은 나관중의 《삼국지》에 나오는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사마의 자호)을 물리쳤다.”는 고사처럼 한반도 냉전의 장벽을 녹이는 자양분이 됐다.

평양 광법사에서 열린 ‘청공 윤이상 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는 북측 조불련이 요청하고, 만수대창작사에서 만든 펼침막에 등장하듯이 법명과 거사 그리고 열반, 추모, 법회라는 용어가 북녘 땅에서 처음 사용된 날이다. 북측의 사찰에서 어떤 사람을 추모하는 법회 형식의 행사가 열린 것도 1998년부터 윤이상 작곡가가 처음일 뿐 아니라 북측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불교 용어가 처음 쓰인 법회이자 행사였다. 특정 종교적인 낱말을 사용한 것은 당국 승인에 의한 공식행사였지만, 지금까지도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공 윤이상의 명성으로 남북불교가 한자리에 모였던 2000년 11월 4일 평양 광법사의 합동추모법회는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타계 5돌을 맞이하여 유족의 요청에 따라 개최됐다. 조불련과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평양 광법사 주관으로 남측의 평불협 방북단이 참관했다.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과 그의 따님 윤정, 최창일 윤이상음악연구소 소장이 참가한 가운데, 조불련 중앙위원회 황병준 부위원장과 심상진 서기장, 류인명・리규룡・리영호 책임부원 등 중앙임원과 광법사 주지와 부전, 법운암 주지, 정릉사 주지와 부전, 조불련 평양시 신도, 남측의 신법타 평불협 회장, 장용철 부회장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그날 오후 3시부터 1시간에 걸쳐 진행된 광법사 추모법회는 청담 류인명 책임부원의 사회로, 연암 리규룡 책임부원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추모 묵념을 했다. 이어 금산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이 영전에 술잔을 올린 다음, 두 번의 큰절과 추모사를 낭독했다. 이어 유족을 대표하여 따님 윤정 씨가 술잔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이어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축원과 추도사를 가졌다. 마지막 순서로 이수자 명예회장의 답례 인사가 있은 후, 대웅전 돌계단에서 다 같이 기념 촬영을 했다.

이날 추모법회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즉석 제안으로 “그간 북녘사찰을 참배하고 순례한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을 조불련 신도회의 명예회장으로 모시는 것이 앞으로 추모사업과 남북불교 교류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발언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수자 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은 이때 조불련의 명예신도회장이란 닉네임이 처음 붙여졌으며, 이어 2003년 조불련 전국신도회 결성에도 적잖은 동기부여를 했다.

평양 광법사 합동추모법회에 앞서 평불협 방북단은 그해 11월 1일~7일까지 일정에서 11월 2일 오전 11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 1차 공연을 관람하고, 이어 조불련 청사를 방문, 박태화 위원장을 비롯한 조불련 임원들과 환담을 가졌으며, 저녁에는 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했다. 11월 3일 오전 11시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 2차 공연을 관람했으며, 오후 3시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토론회에 참가했다. 11월 4일 오전 11시 음악회 4차 공연 관람과 오후 합동추모법회, 저녁에는 평양 국제문화회관에서 북측 문화성 주최의 초청연회를 가졌다, 11월 5일에는 평양과 평성시 안국사, 보현사 참배에 이어 6일에는 황북 사리원의 금강국수공장을 방문, 모니터링하고 이어 윤이상음악연구소 임원들과 정방산 성불사를 참배했다.

2000년 이후, 북한불교 변화의 기폭제가 된 평양 광법사의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를 비롯한 이수자 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의 북녘사찰 순례는 2003년 10월 26일 갑자기 사망한 김용순 조선로동당 비서의 적극적인 후원과 당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계기로 전국 사찰에서의 승려와 관리인 배치, 사찰 법당 내의 불기(佛器) 설치 등의 변화가 많아졌다. 또한 작곡가 윤이상의 명성에 힘입어 불교계의 교류가 그간 조불련과 일대일 교류에서 벗어나 윤이상음악연구소,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등을 포함하는 형태로 교류의 확대를 가지게 됐다. 그 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는 2002년 6월 인천-남포항을 경유해서 윤이상음악연구소에 악기 지원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은 2003년 10월 3일 평양 단군릉 개천절 기념행사에 초빙 인사로 예우를 받았을 만큼, 남북불교 교류에 많이 기여했다.



평양 단군릉 개천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수자 명예회장(2007.10.3.) 사진=《등대》 327호(2007년).



남북불교 교류의 기록과 기억

기록과 기억은 차이가 있다. 기록은 후대에 근거가 될 수 있으나, 과대과소될 가능성도 크다. 기억은 자유롭지만, 점차 희미해지고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장단점이 있다.

남북불교 교류사에서의 기록은 그간 정리되어 인쇄된 자료와 사진 등을 바탕으로, 기억은 당시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적었다. 비록 소수가 접한 기억과 경험일 수 있지만, 불교 교류사에 의미가 있으므로 다시 기록한 것이다.

2000년 6월을 기점으로 남북불교 교류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 민간단체 등과 마찬가지로 평양 방문을 비롯한 제3국에서의 접촉 등 활발한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불교 용어에 대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98년 6월 8일 북측에서 8.15 통일대축전 제의(6.10)에 앞서 결성한 민족화해협의회의 김령성 부위원장은 2000년 10월 14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이제, 법타 선생을 법타 스님으로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란 대화가 오갔다.

이 대화 내용은 신법타 회장과 필자만의 기억 속의 기록이며, 증언이다. 그간 ‘중선생’ 등으로 불린 용어가 당시에 미스터 쾌남으로 불린 김령성 민화협 부위원장에 의해 ‘스님’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그로부터 공식회의와 행사에서 남측 승려에 대해 ○○스님으로 부르고, 조불련 승려들의 법명이 사용됐다. 또 법당에서 지낸 제사가 북한식으로 공식화된 것은 ‘윤이상 천도재’이며, 종교적 수용을 보여준 첫 사례이다.

둘째, 조불련 전국신도회의 결성에 기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2000년 11월 평양 광법사에서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에게 호칭한 북한불교의 신도 명예회장이란 이름이 처음 거명됨으로써 조불련 전국신도회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배경에는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일행이 1998년 한 해 동안 전국 사찰을 순례하면서 사찰문화와 불교용품에 관한 개선을 당국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셋째로는 2008년 교류가 중단되기 전까지 직간접 교류에 관여한 제외동포와 단체의 기록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협조한 분들과 단체의 역할은 2000년을 기점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2003년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명의로 남북불교 교류에 따른 연락사무소를 중국 베이징에 설치했다가 철수하고, 2006년 선양(瀋陽)에 다시 연락사무소 설치와 소장 직함을 남북불교가 공히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간 협력하고 고생한 분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남북불교 교류의 동지로서 진솔하게 맞이하지 않았던 과정은 다시 제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간 알게 모르게 시원섭섭함을 토로했던 재외동포 즉, 제3국 중계인들에 대한 감사의 기록이다. 그들을 단순 이용자로, 그때마다 수고비 몇 푼 손에 쥐여 주는 정도로 인식했던 불교교류 인사들의 안일한 자세에 대한 자발적 반성문이다. 이때까지 참여한 재외동포들은 남북불교 교류를 함께 일구었던 소중한 일꾼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이었음을 처음 기록한다. 지난 10년간 보수정권으로부터 교류의 단절 과정에서 다시 그들을 찾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간 불교 언론을 비롯한 종단에서는 제3국 중계인들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북교류의 동반자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일종의 과거사로 남게 됐다.

이 모든 일은 작곡가 윤이상을 필두로 많은 분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과거사를 불교계가 재평가하고, 개선하는 측면과 아울러 하루빨리 남북한의 왕래가 시작되기를 기원해 본다.

# 다음 편은 ‘2001년 금강산 6.15민족대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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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윤이상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2000.11.4. 평양 광법사) 사진=평불협 '하나로'(2000. 12월호)

 

청공 윤이상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 답례인사(2000.11.4. 평양 광법사) 사진=평불협 사진자료
청공 윤이상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 답례인사(2000.11.4. 평양 광법사) 사진=평불협 사진자료

윤이상, 남북불교를 합치다

현대음악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 윤이상의 법명은 ‘청공(靑空)’이다. 1994년에 인천 용화사 송담 선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의 부인 이수자 씨도 그때 함께 ‘문수월(文殊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살아생전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윤이상은 1994년 그의 누이 윤동화 씨의 권유로 서면과 유선으로 수계와 법명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진다. 그때와 그 후에도 송담 선사와 자주 통화하며 위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법명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00년 11월 4일 오후 3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다. 분단 45년, 199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위해 평양을 처음 방문했던 작곡가 윤이상은 1995년 그의 사후에도 1998년과 이듬해 그리고 2000년 11월 평양 광법사에 남북한의 불교를 불러 모았다. 이때 일은 나관중의 《삼국지》에 나오는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사마의 자호)을 물리쳤다.”는 고사처럼 한반도 냉전의 장벽을 녹이는 자양분이 됐다.

평양 광법사에서 열린 ‘청공 윤이상 거사 열반 5돌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는 북측 조불련이 요청하고, 만수대창작사에서 만든 펼침막에 등장하듯이 법명과 거사 그리고 열반, 추모, 법회라는 용어가 북녘 땅에서 처음 사용된 날이다. 북측의 사찰에서 어떤 사람을 추모하는 법회 형식의 행사가 열린 것도 1998년부터 윤이상 작곡가가 처음일 뿐 아니라 북측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불교 용어가 처음 쓰인 법회이자 행사였다. 특정 종교적인 낱말을 사용한 것은 당국 승인에 의한 공식행사였지만, 지금까지도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공 윤이상의 명성으로 남북불교가 한자리에 모였던 2000년 11월 4일 평양 광법사의 합동추모법회는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타계 5돌을 맞이하여 유족의 요청에 따라 개최됐다. 조불련과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평양 광법사 주관으로 남측의 평불협 방북단이 참관했다.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과 그의 따님 윤정, 최창일 윤이상음악연구소 소장이 참가한 가운데, 조불련 중앙위원회 황병준 부위원장과 심상진 서기장, 류인명・리규룡・리영호 책임부원 등 중앙임원과 광법사 주지와 부전, 법운암 주지, 정릉사 주지와 부전, 조불련 평양시 신도, 남측의 신법타 평불협 회장, 장용철 부회장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그날 오후 3시부터 1시간에 걸쳐 진행된 광법사 추모법회는 청담 류인명 책임부원의 사회로, 연암 리규룡 책임부원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추모 묵념을 했다. 이어 금산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이 영전에 술잔을 올린 다음, 두 번의 큰절과 추모사를 낭독했다. 이어 유족을 대표하여 따님 윤정 씨가 술잔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이어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축원과 추도사를 가졌다. 마지막 순서로 이수자 명예회장의 답례 인사가 있은 후, 대웅전 돌계단에서 다 같이 기념 촬영을 했다.

이날 추모법회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의 즉석 제안으로 “그간 북녘사찰을 참배하고 순례한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을 조불련 신도회의 명예회장으로 모시는 것이 앞으로 추모사업과 남북불교 교류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발언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수자 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은 이때 조불련의 명예신도회장이란 닉네임이 처음 붙여졌으며, 이어 2003년 조불련 전국신도회 결성에도 적잖은 동기부여를 했다.

평양 광법사 합동추모법회에 앞서 평불협 방북단은 그해 11월 1일~7일까지 일정에서 11월 2일 오전 11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 1차 공연을 관람하고, 이어 조불련 청사를 방문, 박태화 위원장을 비롯한 조불련 임원들과 환담을 가졌으며, 저녁에는 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했다. 11월 3일 오전 11시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 2차 공연을 관람했으며, 오후 3시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토론회에 참가했다. 11월 4일 오전 11시 음악회 4차 공연 관람과 오후 합동추모법회, 저녁에는 평양 국제문화회관에서 북측 문화성 주최의 초청연회를 가졌다, 11월 5일에는 평양과 평성시 안국사, 보현사 참배에 이어 6일에는 황북 사리원의 금강국수공장을 방문, 모니터링하고 이어 윤이상음악연구소 임원들과 정방산 성불사를 참배했다.

2000년 이후, 북한불교 변화의 기폭제가 된 평양 광법사의 ‘북남불교도 합동추모법회’를 비롯한 이수자 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의 북녘사찰 순례는 2003년 10월 26일 갑자기 사망한 김용순 조선로동당 비서의 적극적인 후원과 당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계기로 전국 사찰에서의 승려와 관리인 배치, 사찰 법당 내의 불기(佛器) 설치 등의 변화가 많아졌다. 또한 작곡가 윤이상의 명성에 힘입어 불교계의 교류가 그간 조불련과 일대일 교류에서 벗어나 윤이상음악연구소,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등을 포함하는 형태로 교류의 확대를 가지게 됐다. 그 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는 2002년 6월 인천-남포항을 경유해서 윤이상음악연구소에 악기 지원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은 2003년 10월 3일 평양 단군릉 개천절 기념행사에 초빙 인사로 예우를 받았을 만큼, 남북불교 교류에 많이 기여했다.

평양 단군릉 개천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수자 명예회장(2007.10.3.) 사진=《등대》 327호(2007년).
평양 단군릉 개천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수자 명예회장(2007.10.3.) 사진=《등대》 327호(2007년).

남북불교 교류의 기록과 기억

기록과 기억은 차이가 있다. 기록은 후대에 근거가 될 수 있으나, 과대과소될 가능성도 크다. 기억은 자유롭지만, 점차 희미해지고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장단점이 있다.

남북불교 교류사에서의 기록은 그간 정리되어 인쇄된 자료와 사진 등을 바탕으로, 기억은 당시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적었다. 비록 소수가 접한 기억과 경험일 수 있지만, 불교 교류사에 의미가 있으므로 다시 기록한 것이다.

2000년 6월을 기점으로 남북불교 교류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 민간단체 등과 마찬가지로 평양 방문을 비롯한 제3국에서의 접촉 등 활발한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불교 용어에 대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98년 6월 8일 북측에서 8.15 통일대축전 제의(6.10)에 앞서 결성한 민족화해협의회의 김령성 부위원장은 2000년 10월 14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이제, 법타 선생을 법타 스님으로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란 대화가 오갔다.

이 대화 내용은 신법타 회장과 필자만의 기억 속의 기록이며, 증언이다. 그간 ‘중선생’ 등으로 불린 용어가 당시에 미스터 쾌남으로 불린 김령성 민화협 부위원장에 의해 ‘스님’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그로부터 공식회의와 행사에서 남측 승려에 대해 ○○스님으로 부르고, 조불련 승려들의 법명이 사용됐다. 또 법당에서 지낸 제사가 북한식으로 공식화된 것은 ‘윤이상 천도재’이며, 종교적 수용을 보여준 첫 사례이다.

둘째, 조불련 전국신도회의 결성에 기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2000년 11월 평양 광법사에서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회장에게 호칭한 북한불교의 신도 명예회장이란 이름이 처음 거명됨으로써 조불련 전국신도회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배경에는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일행이 1998년 한 해 동안 전국 사찰을 순례하면서 사찰문화와 불교용품에 관한 개선을 당국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셋째로는 2008년 교류가 중단되기 전까지 직간접 교류에 관여한 제외동포와 단체의 기록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협조한 분들과 단체의 역할은 2000년을 기점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2003년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명의로 남북불교 교류에 따른 연락사무소를 중국 베이징에 설치했다가 철수하고, 2006년 선양(瀋陽)에 다시 연락사무소 설치와 소장 직함을 남북불교가 공히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간 협력하고 고생한 분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남북불교 교류의 동지로서 진솔하게 맞이하지 않았던 과정은 다시 제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간 알게 모르게 시원섭섭함을 토로했던 재외동포 즉, 제3국 중계인들에 대한 감사의 기록이다. 그들을 단순 이용자로, 그때마다 수고비 몇 푼 손에 쥐여 주는 정도로 인식했던 불교교류 인사들의 안일한 자세에 대한 자발적 반성문이다. 이때까지 참여한 재외동포들은 남북불교 교류를 함께 일구었던 소중한 일꾼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이었음을 처음 기록한다. 지난 10년간 보수정권으로부터 교류의 단절 과정에서 다시 그들을 찾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간 불교 언론을 비롯한 종단에서는 제3국 중계인들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북교류의 동반자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일종의 과거사로 남게 됐다.

이 모든 일은 작곡가 윤이상을 필두로 많은 분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과거사를 불교계가 재평가하고, 개선하는 측면과 아울러 하루빨리 남북한의 왕래가 시작되기를 기원해 본다.

# 다음 편은 ‘2001년 금강산 6.15민족대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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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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