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 4. 우리 불교사상가들
[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 4. 우리 불교사상가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9.06 10: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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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4)
-한국의 불교사상가들: 휴정과 지눌, 원효

우리 불교사상가들: 휴정과 지눌, 원효를 중심으로

우리 불교를 대표할 만한 불교사상가들은 많다. 한국불교사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원효와 의상, 지눌과 의천, 휴정과 유정, 경허와 용성, 만해, 성철과 법정 등 최소한 10여명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중에서 누구를 고르느냐는 상당히 임의적인 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휴정과 지눌, 원효는 대체로 많이 선택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외된 다른 사상가들의 비중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다른 기준으로 보면 의상과 의천, 보우가 선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세 사상가를, 그것도 우리와 가까운 사상가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우리들의 기준과 의도는 두 가지 정당화 근거를 갖는다. 하나는 현재 한국불교의 특성인 ‘선불교 중심의 통불교’ 전통을 확립하게 하는데 기여한 사상가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의 불교에 살아있는 고전의 저자들이라는 점이다. 휴정의 선가귀감, 지눌의 수심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이 그 대표적인 고전들이다. 더 나아가 이들의 저작은 현재 승가대학의 핵심 교재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공부란 무엇일까?: 휴정에게 우리 교육의 길을 묻다

“배움은 본래 본성을 닦는 것이니
어찌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할 것인가?
도는 본래 삶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세상에 쓰임이 되기를 구하겠는가?“(휴정, <선가귀감> 중에서)

임진왜란을 중심에 두고 그 전후로 생애를 보낸 휴정은 본래 유생이었다. 열 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방황할 때 그 재주를 아깝게 여긴 고을 수령이 수양아들로 서울로 데려가 성균관이 입학시킴으로써 본격적인 공부 길에 들어선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는 15세의 좌절감은 그를 산천유람으로 내몰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불교를 평생의 공부 대상으로 삼으면서 ‘서산휴정’(西山休靜)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흥미로운 것은 명종 때 잠깐 부활한 승과에 33세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실이다. 유교를 기반으로 삼는 과거에는 탈락하고 불교를 기반으로 삼은 승과에는 수석으로 합격함으로써 또 다른 명리를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오래 걷지 않는다. ‘배움이 본래 본성을 닦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도(道) 또한 그에게는 삶을 온전하게 하는 것일 뿐이어서, 세상의 일상적인 쓰임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평생을 공부로서 수행에 몰두하던 중에도 사명과 영규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몸을 일으켜 맞서 싸우는 ‘승병장’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73세 때의 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휴정은 어떤 대화의 상대자가 될 수 있을까? 두 가지 화두를 불러낼 수 있다. 하나는 이 시대 공부와 교육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으로서 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공부가 일상의 쓰임새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불교의 전체적인 폭력에 대한 저항감에도 떨치고 일어나 싸워야 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른바 ‘호국불교’ 전통의 한 축으로서 휴정은 불교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한 물음 앞에서 어떤 망설임을 경험했을까?

오늘은 우리에게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교육에 관한 화두만을 함께 붙들어보기로 하자. 교육으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고통이 쉽게 감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교육은 공부 길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부의 즐거움을 알고 그 방법을 깨우쳐서 평생 이어갈 수 있는 힘과 자세를 갖추어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교육은 이 공부 길을 스스로 감당해내면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제대로 길러주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엄마의 공부라는 말’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는 아이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강요하는 그 ‘공부’의 양은 끝을 모르고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서너 살이 되면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을 위한 공부는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공부 시간을 갖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휴정은 이 문제에 대해 아마도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진짜 공부는 ‘본성을 닦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인격을 함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우리 가정과 학교 상황 속에서 그런 공부의 기회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시민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그 생존을 감당해낼 수 있는 실천적인 역량 또한 인격 속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구분을 제대로 하는 공부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으로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휴정, 지눌, 원효 영정(왼쪽부터)



우리 시대 마음공부와 화쟁(和諍)의 길을 묻다: 지눌과 원효

이 시대 공부 길을 제대로 잡아가는 여정에서 꼭 만나야 하는 과제가 마음공부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그 마음의 흐름이 ‘걸림 없음[無碍]’의 지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는 21세기 한국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거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지니는 원심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신의 삶 자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마음공부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점수(漸修, 지속적으로 닦음)란 무엇인가?
돈오(頓悟, 문득 깨침)를 하여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으나,
시작 없는 과거부터 익혀온 습관을 단박에 제거할 수는 없어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으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공부를 이루는 것이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 어른과 다를 바 없지만,
아직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하여 세월이 지난 후에야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지눌, <수심결> 중에서)

마음공부는 우리 몸과 함께 마음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몸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 그 마음은 뇌세포(뉴런)들 사이의 상호작용[시냅스]으로 관찰되는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훨씬 더 많은 부분은 알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때로는 대상화하기도 하고, 다스리고자 시도하기도 하는 것이 마음공부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동시에 알아차릴 필요성이 부각된다. 오히려 가끔씩 거리를 두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다스려져 있기도 한다.

나의 이런 마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만나면서 더 복잡해진다. 타자의 마음과의 만남은 행복과 불행 모두의 근원이다. 우리와 같이 21세기 한국 시민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의 부딪침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장벽과 혐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정 사안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가 혐오와 증오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은 불필요한 충돌을 불러일으켜 시민사회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훌쩍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문제가 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원효의 화쟁(和諍)을 불러낼 수 있다. 화쟁은 본래 불교사상사 속에서 나온 붓다의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들 사이의 극심한 충돌을 조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볼 수 없는 커다란 코끼리를 묘사하는 과정의 비유를 통해, 우리 각자는 진리라는 코끼리의 일면[一理]만을 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겸허함을 갖는 것이 화쟁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 먼저 자신의 주장 속에 그 진리의 일단이 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과정[諍]과, 동시에 타자의 주장 속에도 담긴 진리의 일단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聽], 그리고 그 각각의 진리 조각들을 모아 보다 나은 진리로 향하는 과정[和]이 곧 화쟁의 삼단계이다. 우리 학교나 시민사회의 토론과정을 지켜보면 대체로 자신의 주장만이 진리라는 강변이 지배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담긴 진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과정과 함께, 자신의 주장과 타자의 주장에 담긴 진리의 일단을 모아 보다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역량과 자세를 길러주는 일에 학교와 사회의 시민교육을 통해 중점을 둘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길이 열릴 수 있다.

원효는 공부과정에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도반처럼 지내면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있다. 우리에게는 그 중에서 당나라 유학길에 두 번이나 함께했던 후배 의상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안이라는 이름의 도반이자 스승도 있었다. 괴상한 용모에 장터를 떠돌아다니면서 ‘대안이요 대안’이라고 외쳤다고 해서 법명까지 대안이 된 스님인데, 신라에 새로 들어온 <금강삼매경>이라는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원효가 더 적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사라지는 겸양과 우정의 모형을 보여준다.

어느 날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대안에게 원효가 갔을 때 그는 새끼너구리 몇 마리와 지내고 있었다.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들을 스스로 거두고 있는 중에 원효가 오자 맡겨놓고 저잣거리로 젖을 구하려 나갔다. 돌아와 보니 원효가 죽은 새끼 한 마리는 앞에 놓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대안은 새끼너구리가 그 염불을 알아듣겠느냐고 말하면서 ‘너구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법문’을 하겠다고 나선다. 그러고는 얻어온 젖을 살아남은 새끼들에게 주면서 바로 이것이 너구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법문이라고 말한다. …원효의 무애행과 중생을 향한 평생의 자비행은 바로 이 지점의 깨달음에서 왔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불교는 이런 지난한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의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의미를 제시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는 고답적인 법문에 그치거나 최소한의 도덕성마저 보여주지 못해 ‘시민사회의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의 현실임을 절실하게 자각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한국불교에 미래가 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시절 인연 속에서 깨달음과 일상의 경계를 걸림 없이 넘나들고자 했던 우리 불교사상가들은 훌륭한 대화상대자로 나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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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 지눌, 원효 영정(왼쪽부터)

우리 시대 마음공부와 화쟁(和諍)의 길을 묻다: 지눌과 원효

이 시대 공부 길을 제대로 잡아가는 여정에서 꼭 만나야 하는 과제가 마음공부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그 마음의 흐름이 ‘걸림 없음[無碍]’의 지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는 21세기 한국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거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지니는 원심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신의 삶 자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마음공부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점수(漸修, 지속적으로 닦음)란 무엇인가?
돈오(頓悟, 문득 깨침)를 하여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으나,
시작 없는 과거부터 익혀온 습관을 단박에 제거할 수는 없어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으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공부를 이루는 것이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 어른과 다를 바 없지만,
아직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하여 세월이 지난 후에야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지눌, <수심결> 중에서)

마음공부는 우리 몸과 함께 마음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몸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 그 마음은 뇌세포(뉴런)들 사이의 상호작용[시냅스]으로 관찰되는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훨씬 더 많은 부분은 알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때로는 대상화하기도 하고, 다스리고자 시도하기도 하는 것이 마음공부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동시에 알아차릴 필요성이 부각된다. 오히려 가끔씩 거리를 두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다스려져 있기도 한다.

나의 이런 마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만나면서 더 복잡해진다. 타자의 마음과의 만남은 행복과 불행 모두의 근원이다. 우리와 같이 21세기 한국 시민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의 부딪침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장벽과 혐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정 사안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가 혐오와 증오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은 불필요한 충돌을 불러일으켜 시민사회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훌쩍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문제가 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원효의 화쟁(和諍)을 불러낼 수 있다. 화쟁은 본래 불교사상사 속에서 나온 붓다의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들 사이의 극심한 충돌을 조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볼 수 없는 커다란 코끼리를 묘사하는 과정의 비유를 통해, 우리 각자는 진리라는 코끼리의 일면[一理]만을 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겸허함을 갖는 것이 화쟁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 먼저 자신의 주장 속에 그 진리의 일단이 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과정[諍]과, 동시에 타자의 주장 속에도 담긴 진리의 일단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聽], 그리고 그 각각의 진리 조각들을 모아 보다 나은 진리로 향하는 과정[和]이 곧 화쟁의 삼단계이다. 우리 학교나 시민사회의 토론과정을 지켜보면 대체로 자신의 주장만이 진리라는 강변이 지배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담긴 진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과정과 함께, 자신의 주장과 타자의 주장에 담긴 진리의 일단을 모아 보다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역량과 자세를 길러주는 일에 학교와 사회의 시민교육을 통해 중점을 둘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길이 열릴 수 있다.

원효는 공부과정에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도반처럼 지내면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있다. 우리에게는 그 중에서 당나라 유학길에 두 번이나 함께했던 후배 의상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안이라는 이름의 도반이자 스승도 있었다. 괴상한 용모에 장터를 떠돌아다니면서 ‘대안이요 대안’이라고 외쳤다고 해서 법명까지 대안이 된 스님인데, 신라에 새로 들어온 <금강삼매경>이라는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원효가 더 적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사라지는 겸양과 우정의 모형을 보여준다.

어느 날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대안에게 원효가 갔을 때 그는 새끼너구리 몇 마리와 지내고 있었다.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들을 스스로 거두고 있는 중에 원효가 오자 맡겨놓고 저잣거리로 젖을 구하려 나갔다. 돌아와 보니 원효가 죽은 새끼 한 마리는 앞에 놓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대안은 새끼너구리가 그 염불을 알아듣겠느냐고 말하면서 ‘너구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법문’을 하겠다고 나선다. 그러고는 얻어온 젖을 살아남은 새끼들에게 주면서 바로 이것이 너구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법문이라고 말한다. …원효의 무애행과 중생을 향한 평생의 자비행은 바로 이 지점의 깨달음에서 왔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불교는 이런 지난한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의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의미를 제시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는 고답적인 법문에 그치거나 최소한의 도덕성마저 보여주지 못해 ‘시민사회의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의 현실임을 절실하게 자각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한국불교에 미래가 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시절 인연 속에서 깨달음과 일상의 경계를 걸림 없이 넘나들고자 했던 우리 불교사상가들은 훌륭한 대화상대자로 나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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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생명윤리교육평가전문위원회 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 2015 초· 중·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과 도덕교육 1·2》(공저)《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직업과 윤리》. 《아동인격교육론》, 《도덕심리학의 전통과 새로운 동향》,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문광부우수학술도서),《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딸과 함께 철학자의 길을 걷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등이 있다. 역서로 《철학의 과업》(공역), 《도덕철학과 도덕심리학》(공역), 《보살의 뇌》(공역), 《윤리적 자연주의》(공역), 《도덕적 감정과 직관》(공역)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이자 종합교육연수원장을 맡고 있으며,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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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젖 2021-09-12 12:29:19
원효와 대안스님의 너구리 이야기 재밋게 보았어요
그때 우유도 없고. 또 대형마트도 없고 했는데 너구리 젓을 무엇? 어떻게? 구했을까요?
울 나라에 그때 젖 소도 없었을낀데 ㆍㆍ 햐 ㅎ ㅎ
스님들 제주도 좋으시다
그니깐 굳이 생각해보면 새끼 갓 낳은 어미개의 젓? 정도 이지 않을까요?

좋은말씀감사합니다 2021-09-06 14:03:56
책을 읽으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요즘입니다. 공부란 본래 본성을 닦는 일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머리가 좀 개운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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