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25. 중생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25. 중생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1.08.30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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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것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것을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미로 헤메 돌다
백골이 되어도.



#작가의 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내게로 달려와서 꽃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아니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로 남는 이름이 되고 싶다. 누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땐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3년을 내리 문예반 반장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는 대외적으로 글짓기 행사 등이 있으면 모두 참가했다.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데 문예반을 담당하던 국어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와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꿈결에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무렵 옆에 있던 급우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부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 나는 데 내 눈에 아담 사이즈의 국어 선생님 모습이 들어왔다.
듣고, 보고 느끼기까지 한 것이다. 선생님은 제천 시내 중앙공원에서 하는 백일장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다정하게 둘이서 제천 시내까지 가기 위해 학교건물을 나서서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렀다.
아이들이 모두 창가에 붙어서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라 남자 아이들의 굵직한 목소리와 여자아이들의 하이톤이 합창을 하니 학교 앞 산에 울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 왔다.
난생 처음 참가한 백일장 수상을 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장원을 꿈꿨는지 모른다. 백일장이 끝난 후에 선생님이 “뭐 사줄까?” 하고 묻는다. 출출하기도 했고 선생님이 사준다는 소리에 “예”하고 빵집에 갔다.
빵집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에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그 중딩 동창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너 여자친구 되게 이쁘다.", "야, 여자 친구 아니야,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셔." 그 친구가 입을 꾹 닫았다.
처음 이민 와서 호텔에서 캐주얼잡으로 두 번째 잡을 뛸 때, 학교에서 실습 나온 학생이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전재민이라고 하니 계속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다. 한참 어린놈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니 왠지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나에게 너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묻는다. 자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에 다시 마음이 흐뭇해진다. 짜증나던 생각은 없어진다. 그래서 서른이 넘었다고 하니 그 학생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한다. 한국에선 직장에서 대부분이 직책을 부르지만 캐나다에선 이름을 부른다. 그게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들보다도 어린 친구가 이름을 부르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영어 이름을 쓰게 되었다. 영어 이름도 나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한국이름을 부를 때 불쾌함은 느끼지 못한다. 둘 다 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영어 이름은 마음에서 동요하지 않았다. 사찰인 서광사에 가면 대부분 모모 처사님, 모모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처사와 보살님 그리고 스님만 있는 청정구역이다. 하지만 그 처사님과 보살님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세상의 찌든 내음이 물씬 풍긴다. 가끔은 자식자랑에 푹 빠진 보살님, 지나간 과거의 자랑에 푹 빠진 처사님도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엔 반응하지 않는 물건처럼 각자가 생활하다가 이름을 불러주면 그제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꽃밭에 사람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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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것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것을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미로 헤메 돌다
백골이 되어도.

#작가의 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내게로 달려와서 꽃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아니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로 남는 이름이 되고 싶다. 누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땐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3년을 내리 문예반 반장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는 대외적으로 글짓기 행사 등이 있으면 모두 참가했다.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데 문예반을 담당하던 국어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와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꿈결에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무렵 옆에 있던 급우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부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 나는 데 내 눈에 아담 사이즈의 국어 선생님 모습이 들어왔다.
듣고, 보고 느끼기까지 한 것이다. 선생님은 제천 시내 중앙공원에서 하는 백일장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다정하게 둘이서 제천 시내까지 가기 위해 학교건물을 나서서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렀다.
아이들이 모두 창가에 붙어서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라 남자 아이들의 굵직한 목소리와 여자아이들의 하이톤이 합창을 하니 학교 앞 산에 울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 왔다.
난생 처음 참가한 백일장 수상을 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장원을 꿈꿨는지 모른다. 백일장이 끝난 후에 선생님이 “뭐 사줄까?” 하고 묻는다. 출출하기도 했고 선생님이 사준다는 소리에 “예”하고 빵집에 갔다.
빵집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에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그 중딩 동창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너 여자친구 되게 이쁘다.", "야, 여자 친구 아니야,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셔." 그 친구가 입을 꾹 닫았다.
처음 이민 와서 호텔에서 캐주얼잡으로 두 번째 잡을 뛸 때, 학교에서 실습 나온 학생이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전재민이라고 하니 계속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다. 한참 어린놈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니 왠지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나에게 너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묻는다. 자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에 다시 마음이 흐뭇해진다. 짜증나던 생각은 없어진다. 그래서 서른이 넘었다고 하니 그 학생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한다. 한국에선 직장에서 대부분이 직책을 부르지만 캐나다에선 이름을 부른다. 그게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들보다도 어린 친구가 이름을 부르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영어 이름을 쓰게 되었다. 영어 이름도 나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한국이름을 부를 때 불쾌함은 느끼지 못한다. 둘 다 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영어 이름은 마음에서 동요하지 않았다. 사찰인 서광사에 가면 대부분 모모 처사님, 모모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처사와 보살님 그리고 스님만 있는 청정구역이다. 하지만 그 처사님과 보살님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세상의 찌든 내음이 물씬 풍긴다. 가끔은 자식자랑에 푹 빠진 보살님, 지나간 과거의 자랑에 푹 빠진 처사님도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엔 반응하지 않는 물건처럼 각자가 생활하다가 이름을 불러주면 그제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꽃밭에 사람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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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것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것을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미로 헤메 돌다
백골이 되어도.



#작가의 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내게로 달려와서 꽃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아니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로 남는 이름이 되고 싶다. 누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땐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3년을 내리 문예반 반장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는 대외적으로 글짓기 행사 등이 있으면 모두 참가했다.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데 문예반을 담당하던 국어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와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꿈결에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무렵 옆에 있던 급우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부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 나는 데 내 눈에 아담 사이즈의 국어 선생님 모습이 들어왔다.
듣고, 보고 느끼기까지 한 것이다. 선생님은 제천 시내 중앙공원에서 하는 백일장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다정하게 둘이서 제천 시내까지 가기 위해 학교건물을 나서서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렀다.
아이들이 모두 창가에 붙어서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라 남자 아이들의 굵직한 목소리와 여자아이들의 하이톤이 합창을 하니 학교 앞 산에 울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 왔다.
난생 처음 참가한 백일장 수상을 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장원을 꿈꿨는지 모른다. 백일장이 끝난 후에 선생님이 “뭐 사줄까?” 하고 묻는다. 출출하기도 했고 선생님이 사준다는 소리에 “예”하고 빵집에 갔다.
빵집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에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그 중딩 동창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너 여자친구 되게 이쁘다.", "야, 여자 친구 아니야,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셔." 그 친구가 입을 꾹 닫았다.
처음 이민 와서 호텔에서 캐주얼잡으로 두 번째 잡을 뛸 때, 학교에서 실습 나온 학생이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전재민이라고 하니 계속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다. 한참 어린놈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니 왠지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나에게 너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묻는다. 자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에 다시 마음이 흐뭇해진다. 짜증나던 생각은 없어진다. 그래서 서른이 넘었다고 하니 그 학생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한다. 한국에선 직장에서 대부분이 직책을 부르지만 캐나다에선 이름을 부른다. 그게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들보다도 어린 친구가 이름을 부르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영어 이름을 쓰게 되었다. 영어 이름도 나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한국이름을 부를 때 불쾌함은 느끼지 못한다. 둘 다 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영어 이름은 마음에서 동요하지 않았다. 사찰인 서광사에 가면 대부분 모모 처사님, 모모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처사와 보살님 그리고 스님만 있는 청정구역이다. 하지만 그 처사님과 보살님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세상의 찌든 내음이 물씬 풍긴다. 가끔은 자식자랑에 푹 빠진 보살님, 지나간 과거의 자랑에 푹 빠진 처사님도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엔 반응하지 않는 물건처럼 각자가 생활하다가 이름을 불러주면 그제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꽃밭에 사람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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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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