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위기와 불교의 대안] 3. 불평등과 관련한 불교 교리(1)
[불평등의 위기와 불교의 대안] 3. 불평등과 관련한 불교 교리(1)
  •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 승인 2021.08.2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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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지상주의에서 사회적 깨달음과 보살행으로

불교 교리는 아직도 붓다의 시대에 맞추어져 있으며 텍스트 해석과 논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21세기 오늘의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불교 경전은 여러 시대에 걸쳐 각기 다른 관점과 주체에 의해 기록되거나 편찬되고 붓다가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가르침을 달리 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하였기에 경전끼리도 견해가 맞서며, 2500년 전 인도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21세기 오늘 중생들이 마주친 현실에 어긋나는 것도 많다. 필자는 세 가지 원칙-첫째, 연기의 원리에 부합되는가, 둘째, 과학적 원리 및 사실과 마주치지 않는가, 셋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목표와 합치하는가-에 따르되, 맥락화와 재맥락화, 곧 경전을 텍스트화하는 것을 지양하여 붓다가 말씀을 설하던 맥락에서 해석한 후에 이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맥락으로 대체하여 양자의 해석을 오고가면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택한다.

깨달음 지상주의에서 사회적 깨달음과 보살행으로

주지하듯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적 인간관의 목표이기도 하다. 붓다를 따르는 이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담론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계종은 간화선을 종지로 한다.

깨달음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초기경전을 보면, <전법륜경>에서 붓다는 (사성제라는 진리를 통해)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라고 말한다. 마성스님이 지적한 대로, 석가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다가 드디어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 sammāsambodhi, 無上正等覺)을 얻어 붓다, 즉 각자(覺者)가 되었으며, 이 사성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에 임승택 교수는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결코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붓다가 이룬 사성제의 깨달음이란 일상에서 출발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실현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단박에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며 또한 성취하고 나면 그만인 그러한 경지도 아니다. 그것은 탐욕과 집착이 남아있는 한에서 끊임없이 닦아나가야 할 과제로 제시되는 그러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마하박가』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라한의 깨달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 의하면,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가 실천되었을 때,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āsava)․유루(有漏, bhavāsavā)․견루(見漏, diṭṭhāsavā)․무명루(無明漏, avijā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설혹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달은 자의 궁극의 목적은 열반의 증득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혜로써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나쁜 욕망을 멈추는 지행(止行), 세계와 타자와 나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는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전제다. 지와 관을 통하여,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 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나의 마음과 몸이 임계점을 넘어 재배열되어 전혀 다른 체계로 거듭나야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승의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해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공(空)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하지만, 연기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연기론은 나와 타인이 서로 원인과 조건으로 작용하고 의존하면서 서로 생성하는 존재로 인식하도록 이끈다. “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서로를 말미암아 생명이 활동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사실의 판단’이라면, 필연적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은 ‘가치의 판단이다.” 한 개인만 생각하면 삼독을 멸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중생의 삼독을 멸하고 함께 깨달음에 이르라고 말한다.

불교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곧 위로는 깨달음을 얻어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세친보살은 『불성론(佛性論)』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범부의 집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이승(二乘)의 집착을 버린다.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지혜로 말미암아 불법을 이루며, 큰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을 성숙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은 늘 솟아나게 한다. 범부가 갖는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므로 이를 지멸(止滅)하지만, 큰 자비가 있기에 이승(二乘)만을 방편으로 삼는 집착 또한 버린다. 열반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없애야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열반에 이르려는 마음 또한 욕망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방편으로서 삼독(三毒)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불법을 이루려 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설혹 불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일에 머문다.

『유마경』의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저의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아프다면, 저 역시 아픕니다. …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아픈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보살이 아픈 것은 큰 자비[大悲]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아픔의 원인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 그리고 대비 때문이다. 중생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 인하여 병을 얻지만, 보살은 중생의 아픔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병이 생긴다. 보살은 중생이 아프면, 보살은 외아들처럼 중생을 사랑하기에 마치 자신의 외아들이 아픈 것과 같이 아프다. 이 아픔 때문에 열반에 이르렀어도 이를 미루고 생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병이 나아야 자신도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

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중생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만의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화탕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무진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선방에서 나홀로 정진하며 평안하면 깨달은 것인가.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편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 부처가 된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서인 <보리도차제론>을 보면, “수행에는 3단계가 있다. 그것은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下士道 中士道 上士道)인데, 마치 3층 건물을 짓는 것과도 같다. 1층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고, 2층이 선정이고, 3층이 반야지혜와 보살행이다.” 1층이 없이는 2층이 있을 수 없는데 지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선정에 이를 수 없다. 또 깨달음에 이르렀더라도 그것은 2층에 머무는 것이다. 보살행을 하여야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자비의 보살행을 행하지 않는 곳에 깨달음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망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지혜를 통하여 모든 존재의 공성과 연기성, 인무아와 법무아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자비의 방편으로 중생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비행을 행하면서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하며 삼독을 멸하여 열반에 이르며, 삼독을 멸하여 열반에 이르고 중생에 대한 자비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의 공성, 연기성, 인무아와 법무아에 대한 지혜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답게 사는 길이다.

그러니 대승의 깨달음이란, 연기와 공, 무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깨달아 거듭난 존재가 세상과 자연과 뭇 생명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선한 욕망과 자유의지,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면서 알라야식의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서 선한 종자들이 타인의 마음속에서도 싹을 틔우게 하여 그들을 부처로 만들고 그로 인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 있는 불성을 드러내며, 이 순간 나 또한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깨달음이란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다. 이때 이 행위가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려면 자기를 비우고 중생을 붓다처럼 섬기며 중생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들과 뒹굴며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삶이자 자타가 열반에 이르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다.

“가난한 생명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 필요”

한마디로 말하여, “부처로 살면 부처이다.(佛行是佛)”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여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모든 집착과 탐욕을 멸하고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해탈, 노동과 창조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연기와 공성을 이해하고 인무아(pudgala-nairātmya, 人無我)와 법무아(dharma-nairātmya, 法無我)를 성취하는 적극적 해탈, 타자를 구제하여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해탈을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자유롭게 하여 내가 깨닫는/자유롭게 되어 열반의 환희심에 이르는 것이다.

생명이 집단적으로 죽어가고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 상황에서는 ‘가난한 자를 위한 편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가톨릭 사회교리서)에 더하여 ‘가난한 생명을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the preferential interpretation and compassionate practice for the poor lives)’이 필요하다.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지적대로,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이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배꼽도, 머리도, 심장도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온 정신이 그리 쏠리고, 백혈구와 산소와 영양분과 복원 세포가 그리로 모여 세균을 퇴치하고 새살이 돋게 하고 결국 몸을 치유한다. 그렇듯,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유가족, 이주노동자가 있는 자리가 내 몸과 이 나라의 중심이다. 그들을 구원할 때 이 나라 또한 건전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목자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때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서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길을 잃으면 그러리라 생각하고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고통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아흔 아홉 사람의 ‘보편적’ 사랑도 받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종교인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가장 ‘중헌’ 화두는 하나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 시대의 잃은 양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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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화쟁사상을 통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종합>,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을 썼고, 틱낫한의 <엄마>를 번역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한국기호학회 회장과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지냈고, 한국시가학회 회장을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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