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 2. 우리는 이 스승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 2. 우리는 이 스승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8.25 11: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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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2)
동양철학의 스승들: 석가와 노장, 공맹

우리는 이 스승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대체로 철학공부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철학사의 지식을 습득해가는 철학사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 원인과 배경, 해결책 등을 물어가는 철학함의 방법이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이고, 이 방법 또한 일정한 지식과 공부가 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철학함의 방법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철학사적 지식에 대한 접근이 양적으로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여러 벽들이 존재하고 있어 넘어서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이른바 ‘철학사적 지식에 대한 열등감’만 가지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동양철학의 경우는 한문을 넘어서기 어렵고, 서양철학의 경우에는 형식논리와 개념이라는 벽에 부딪쳐 넘어지곤 한다.

독일 근대철학자 헤겔이 고등학교 철학교사를 여러 해 한 후에 대학으로 옮기면서, ‘고등학생들에게 철학 함부로 가르치지 마라. 자칫 철학에 대한 혐오감만 심어줄 수 있다.’라고 경고했던 것도 학생들의 그런 벽들을 교사로서 체험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철학함의 과정을 통해 철학사적 지식에도 접근하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철학함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살아가다가 어떤 난관에 직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난관이 실질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성취를 얻은 후에 찾아오는 실망감과 지루함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실존철학자들이 삶의 부조리라고 표현했던, 근원적인 한계 상황의 인식에서 오는 가벼운 절망감일 수도 있다.

그런 난관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잠시 멈칫하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휩싸이게 될 수 있다. 그럴 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는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순간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철학함의 과정에 동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로는 그것으로 끝이다. ‘다른 그렇게 사는 것이겠지’ 정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상으로 복귀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 과정을 조금 더 붙들고 심화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의 심연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철학함의 순간

오늘 우리의 만남도 그런 철학함의 심화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어쩌면 이 순간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서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함의 심화과정에 들어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동양철학의 스승들과 어떤 만남을 가져볼 수 있을까? 우선 인연의 소중함과 그 인연을 바탕으로 삶의 끝없는 흐름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석가모니로부터 도움을 받아 마련할 수 있다. 우리의 이 만남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일 수 있지만, 삶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서 타자와의 만남은 나의 의지와 알 수 없는 연기적 고리들이 어우러져 이루어진다. 알 수 없는 연기적 고리를 우리는 흔히 우연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우연은 곧 필연이기도 하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순간의 만남에 몰입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가끔씩은 이해관계가 없는 만남을 위한 의지와 노력도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 삶은 ‘의미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보다 넓은 범위의 만남을 통해 전개되기도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전개되는 21세기 초반의 사회 속에서는 후자의 중요성이 더 큰 지도 모른다. 그랬을 때 그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야 하는지가 삶의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된다. 나와 가까운 타자와 비교적 먼 거리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사상가는 공자와 맹자이다. 그들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인(仁)을 바탕으로 해서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이상론자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인(仁)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문자 자체로 보면 두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우선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의(義)와 예(禮)가 되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지혜[智]가 요청된다. 어짊은 의로움과 함께 가야하고, 지혜를 바탕으로 일상 속에서 훈련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절의 습관화이다. 마이클 푸엣이라는 미국 하버드대학 동양사학자는 그런 점에 주목하여 공자의 예를 ‘일상 속에서 잠시 다른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켜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크리스틴 그로스 로·마이클 푸엣, 이창신 옮김, 《더 패스》, 김영사. 2016)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해보는 것이 바로 예이고,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진 자신을 경험하게 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다르게 경험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세상을 바라 볼 나름의 창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들은 물론 자연과도 어울려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름의 창(窓)을 가져야만 한다.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그것을 노자는 이름[名]이라고 칭한다. 그 이름은 나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기도 하고, 세상이 나를 바라보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일 뿐임에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세상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창이 고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세상의 진실과 멀어지게 되는 순간이 되고, 그 창에 대한 집착은 우리 생각은 물론 삶 자체를 고정시켜 꼼짝달싹 못하게 해버린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해도 실패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노자는 진리까지도 진리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착오에 빠진다고 말하고, 장자는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로 경고하고자 한다.

동양철학의 스승들이 남겨놓은 철학사적 지식들을 단순히 알아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남들에게 아는 척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정도의 효용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함의 과정 속에서 그 지식들을 불러내면서 나아가 그 철학자를 대화의 상대자로 불러낼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앎으로 전환된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읊조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가 사실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앎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중시하는 상(相)도 마찬가지다. 한문으로 금강경의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자랑스럽게 펼치는 일은 자칫 우스꽝스런 몸짓이 될 수 있지만, 그 상을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세계관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의 형성과 한계를 인식하여 아상(我相)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면 진정한 공부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스승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한 가지 더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스승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에는 각각의 생각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각 사상의 내용과 초점을 다르게 만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끊어진 공맹의 맥을 잇고자 했던 북송의 다섯 사상가와 그들의 제자인 주희의 생각 속에는 불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선불교는 노장의 영향이 없었다면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장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 특유의 종교인 도교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재에 이른 동양사상 또는 철학은 200년 이상의 역사를 축적해온 우리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거쳤고, 서양철학의 절대적 우위를 전제로 하는 만남을 한 세기 이상 견디며 겨우 살아남았다. 지금 나의 삶과 사상 속에는 이런 만남들의 흔적이 각자의 방식으로 새겨져 있고, 그것을 어떻게 오늘의 상황에 맞게 불러내 재구성해 철학함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우리는 부여받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삼아 한국불교의 세 봉우리인 원효와 지눌, 휴정과의 현재적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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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생명윤리교육평가전문위원회 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 2015 초· 중·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과 도덕교육 1·2》(공저)《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직업과 윤리》. 《아동인격교육론》, 《도덕심리학의 전통과 새로운 동향》,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문광부우수학술도서),《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딸과 함께 철학자의 길을 걷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등이 있다. 역서로 《철학의 과업》(공역), 《도덕철학과 도덕심리학》(공역), 《보살의 뇌》(공역), 《윤리적 자연주의》(공역), 《도덕적 감정과 직관》(공역)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이자 종합교육연수원장을 맡고 있으며,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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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의 길 2021-08-25 14:34:08
제목 거창하지만 저는 심각한 댓글 쓸 의도도 없고. 글재주도 없어요
이글 약 간 어려워
법정스님 은 글. 말. 행동 이세가지 일치했다고 함
지금 시대의 최고의 스승 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일반인들 중 에 여러 사람 종류 있는데 그중에 제일은 완벽하진 않지만 부족한 자신을 알고 노자.공자. 석가
예수 의 사상을 나침반으로 삼아 부단히 갈고 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사람 의 참인간이 나타나면 그 주변은 그 선한 영향력으로 밝은 빛 이 나고
한사람 의 사기꾼이 나타나면 그주변은 그 악한 영향력으로 탁 한 어두움으로 세상은 불안정하고 혼란이 야기되요
고정된 인간 없음니다

글 감사합니다 2021-08-25 13:56:39
세상 을 바라볼 나름의 창을 가져야 한다
놀 랍군요
불교에서는 공사상으로 늘 텅빈 창 을 가지길 강요하는데요
은근히 박교수님 의 견해가 깊이가 깊고
천천히 되씹어 가면서 이 기사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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