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본위화폐] 14.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
[똥본위화폐] 14.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
  • 조재원 울산과학기술원 교수
  • 승인 2021.06.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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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 하나이다. 때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모두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아무리 어려운 현상도 “자연”이 언급되는 순간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 이유로 “자연”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자연은 우주 섭리기도 하다. 찰스다윈의 자연선택 진화론은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자연 법칙이다. 지금 세상은 “자연이 선택했다”. 메타모더니즘으로 이해한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

자연은 인간이 만든 세계이다. 우리는 대개 숲, 공기, 물은 자연이라 받아들이지만 사람은 자연이라 생각지 않는다. 지치고 힘들 때 숲, 강, 바다로 가 심신을 달래고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자연은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곳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엄밀하게 설명하려 하면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질 수 없으나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존재라고 어떤 이는 말하며, 누군가에겐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류가 만든 위대한 발명이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행한 과오를 비난할 때 인간과 대비하여 자연, 환경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이다.

‘자연은 자연스럽다’라는 형용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사인 듯하다. 사물이 어떻게 되는 것이 당연할 때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한다. 강물이 흘러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강물은 자연이라고 믿는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증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래서 수증기, 물은 자연이라 한다. 바람이 불어도 폭풍우가 쳐도 우박이 쏟아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당연한 것이려니 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움’에는 여러 다른 측면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지구온난화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댐을 지어 물을 관리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것, 오래된 연식의 디젤자동차로 출근하는 것, 높은 빌딩을 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것 등도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일 일 수 있다. 누군가 문제라고 믿는 것들이 있어 해결을 위해 자연을 강조하면 설득력 있고 많은 지지자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반대편에 서게 만든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자연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 활동가의 예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유엔에서 연설한 그레타 툰베리도 예외는 아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의심과 반대를 만나 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이 믿는 가치로운 것을 틀 속에서 주장하는 순간, ‘가치롭지 않다’고 믿는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생겨, 양극단이 형성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연도 이러한 틀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인간노동 중심 가치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인간노동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바꾸자는 의도 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미 금이 가 있어 왜곡된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테이프를 붙여가며 계속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금간 거울을 산산조각내어야 새로운 거울을 갖출 수 있다.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 강조하나
“똥을 자연, 환경, 생태 이름으로 포장 말아야”

병들어 아픈 사람은 자연을 찾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자연을 찾는다. 힘 있는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자연을 찾는다. 병든 사람은 치유하기 위해, 마음이 아픈 사람은 위로 받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은 정복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비로소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을 찾는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아프지 않고, 권력을 갖지 못했으며, 사랑을 찾지 못한 또는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은 자연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강조해야 하는가? 의도치 않았지만 많은 선의를 갖는 판단과 행동이, 자연이라는 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양극단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똥을 섣불리 자연, 환경, 생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시도는 의도치 않았지만 극단을 형성하고 양극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똥은 밥이다. 똥은 음식이다. 똥은 배설 직전 배 속에 있었다. 똥을 더럽게 보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예전에는 똥이 집집마다 귀한 자원이었다. 이런 얘기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강조하면서 설득할 수도 있다. 이런 말들이 많은 경우 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조하고 설득할수록, 똥은 똥이지 어떻게 음식일 수 있느냐.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더럽지 않다고 강요하지마라. 똥을 더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신병 아니냐는 등의 강한 반대의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믿으면 그것도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진실이 극단으로 놓이게 되어 의도치 않게 똥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똥을 매개로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만듦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질서에 걸맞게 똥을 새롭게 해석해야지 똥으로 인한 갈등을 제공해서는 곤란하다. 똥의 가치를 똥을 통해 말하기 보단 똥이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바이오에너지가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양질의 퇴비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똥은 바이오에너지, 양질의 퇴비라는 매개를 통해 이제 사회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똥에 대해 자연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학과 과학기술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선한 인간으로서 더 이상의 해를 가하지 말자고 강조하기 보다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빼고 똥은 에너지가 될 수 있고 고품질의 퇴비로 바뀐다고 과학적 근거를 갖고 말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한 것이지만, 자연과 환경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극단을 만드는 것을 피하는 선택한 것이다. 대신 이 선택은 경제성이라는 복병을 만나지만 자연과 인간의 양극 상황만큼 해결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처럼 자연은 많은 경우 자연스럽지 못한 양극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똥을 매개로 새로운 가치 기준 제시”

자연과 인간이란 양극을 피하려다 경제성이라는 만만찮은 복병을 만났고, 똥은 경제적 가치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함께 가치 기준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성, 가치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 우리의 논리를 지배하는 가치기준 말이다. 우리는 가치의 기준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적인 존재라고 믿는 경향도 있다. 노동의 가치가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의 등장과 거대 자본의 노동화를 고려하면, 노동의 가치에 머무는 것이 인간존엄을 오히려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본과 인간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들로 인공지능 자본주의시대, 인간을 위한 가치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인공지능 두뇌 자본주의 시대에는 인간노동은 더 이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똥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그곳에 이익이 발생하며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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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 하나이다. 때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모두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아무리 어려운 현상도 “자연”이 언급되는 순간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 이유로 “자연”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자연은 우주 섭리기도 하다. 찰스다윈의 자연선택 진화론은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자연 법칙이다. 지금 세상은 “자연이 선택했다”. 메타모더니즘으로 이해한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 하나이다. 때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모두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아무리 어려운 현상도 “자연”이 언급되는 순간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 이유로 “자연”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자연은 우주 섭리기도 하다. 찰스다윈의 자연선택 진화론은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자연 법칙이다. 지금 세상은 “자연이 선택했다”. 메타모더니즘으로 이해한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

자연은 인간이 만든 세계이다. 우리는 대개 숲, 공기, 물은 자연이라 받아들이지만 사람은 자연이라 생각지 않는다. 지치고 힘들 때 숲, 강, 바다로 가 심신을 달래고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자연은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곳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엄밀하게 설명하려 하면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질 수 없으나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존재라고 어떤 이는 말하며, 누군가에겐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류가 만든 위대한 발명이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행한 과오를 비난할 때 인간과 대비하여 자연, 환경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이다.

‘자연은 자연스럽다’라는 형용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사인 듯하다. 사물이 어떻게 되는 것이 당연할 때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한다. 강물이 흘러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강물은 자연이라고 믿는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증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래서 수증기, 물은 자연이라 한다. 바람이 불어도 폭풍우가 쳐도 우박이 쏟아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당연한 것이려니 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움’에는 여러 다른 측면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지구온난화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댐을 지어 물을 관리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것, 오래된 연식의 디젤자동차로 출근하는 것, 높은 빌딩을 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것 등도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일 일 수 있다. 누군가 문제라고 믿는 것들이 있어 해결을 위해 자연을 강조하면 설득력 있고 많은 지지자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반대편에 서게 만든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자연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 활동가의 예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유엔에서 연설한 그레타 툰베리도 예외는 아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의심과 반대를 만나 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이 믿는 가치로운 것을 틀 속에서 주장하는 순간, ‘가치롭지 않다’고 믿는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생겨, 양극단이 형성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연도 이러한 틀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인간노동 중심 가치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인간노동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바꾸자는 의도 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금이 가 있어 왜곡된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테이프를 붙여가며 여전히 사용하는 것과 같다. 금간 거울을 산산조각 내어야 새로운 거울을 갖출 수 있다
인간노동 중심 가치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인간노동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바꾸자는 의도 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미 금이 가 있어 왜곡된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테이프를 붙여가며 계속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금간 거울을 산산조각내어야 새로운 거울을 갖출 수 있다.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 강조하나
“똥을 자연, 환경, 생태 이름으로 포장 말아야”

병들어 아픈 사람은 자연을 찾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자연을 찾는다. 힘 있는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자연을 찾는다. 병든 사람은 치유하기 위해, 마음이 아픈 사람은 위로 받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은 정복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비로소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을 찾는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아프지 않고, 권력을 갖지 못했으며, 사랑을 찾지 못한 또는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은 자연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강조해야 하는가? 의도치 않았지만 많은 선의를 갖는 판단과 행동이, 자연이라는 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양극단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똥을 섣불리 자연, 환경, 생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시도는 의도치 않았지만 극단을 형성하고 양극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똥은 밥이다. 똥은 음식이다. 똥은 배설 직전 배 속에 있었다. 똥을 더럽게 보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예전에는 똥이 집집마다 귀한 자원이었다. 이런 얘기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강조하면서 설득할 수도 있다. 이런 말들이 많은 경우 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조하고 설득할수록, 똥은 똥이지 어떻게 음식일 수 있느냐.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더럽지 않다고 강요하지마라. 똥을 더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신병 아니냐는 등의 강한 반대의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믿으면 그것도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진실이 극단으로 놓이게 되어 의도치 않게 똥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똥을 매개로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만듦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질서에 걸맞게 똥을 새롭게 해석해야지 똥으로 인한 갈등을 제공해서는 곤란하다. 똥의 가치를 똥을 통해 말하기 보단 똥이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바이오에너지가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양질의 퇴비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똥은 바이오에너지, 양질의 퇴비라는 매개를 통해 이제 사회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똥에 대해 자연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학과 과학기술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선한 인간으로서 더 이상의 해를 가하지 말자고 강조하기 보다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빼고 똥은 에너지가 될 수 있고 고품질의 퇴비로 바뀐다고 과학적 근거를 갖고 말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한 것이지만, 자연과 환경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극단을 만드는 것을 피하는 선택한 것이다. 대신 이 선택은 경제성이라는 복병을 만나지만 자연과 인간의 양극 상황만큼 해결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처럼 자연은 많은 경우 자연스럽지 못한 양극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똥을 매개로 새로운 가치 기준 제시”

자연과 인간이란 양극을 피하려다 경제성이라는 만만찮은 복병을 만났고, 똥은 경제적 가치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함께 가치 기준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성, 가치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 우리의 논리를 지배하는 가치기준 말이다. 우리는 가치의 기준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적인 존재라고 믿는 경향도 있다. 노동의 가치가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의 등장과 거대 자본의 노동화를 고려하면, 노동의 가치에 머무는 것이 인간존엄을 오히려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본과 인간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들로 인공지능 자본주의시대, 인간을 위한 가치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인공지능 두뇌 자본주의 시대에는 인간노동은 더 이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똥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그곳에 이익이 발생하며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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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 하나이다. 때론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모두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아무리 어려운 현상도 “자연”이 언급되는 순간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 이유로 “자연”은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자연은 우주 섭리기도 하다. 찰스다윈의 자연선택 진화론은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자연 법칙이다. 지금 세상은 “자연이 선택했다”. 메타모더니즘으로 이해한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

자연은 인간이 만든 세계이다. 우리는 대개 숲, 공기, 물은 자연이라 받아들이지만 사람은 자연이라 생각지 않는다. 지치고 힘들 때 숲, 강, 바다로 가 심신을 달래고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자연은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곳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엄밀하게 설명하려 하면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모든 곳에 있으나 그 어떤 곳에도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질 수 없으나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존재라고 어떤 이는 말하며, 누군가에겐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연은 인류가 만든 위대한 발명이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행한 과오를 비난할 때 인간과 대비하여 자연, 환경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이다.

‘자연은 자연스럽다’라는 형용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사인 듯하다. 사물이 어떻게 되는 것이 당연할 때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한다. 강물이 흘러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강물은 자연이라고 믿는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증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래서 수증기, 물은 자연이라 한다. 바람이 불어도 폭풍우가 쳐도 우박이 쏟아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당연한 것이려니 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움’에는 여러 다른 측면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지구온난화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댐을 지어 물을 관리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것, 오래된 연식의 디젤자동차로 출근하는 것, 높은 빌딩을 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것 등도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일 일 수 있다. 누군가 문제라고 믿는 것들이 있어 해결을 위해 자연을 강조하면 설득력 있고 많은 지지자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반대편에 서게 만든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자연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 활동가의 예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유엔에서 연설한 그레타 툰베리도 예외는 아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의심과 반대를 만나 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이 믿는 가치로운 것을 틀 속에서 주장하는 순간, ‘가치롭지 않다’고 믿는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생겨, 양극단이 형성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연도 이러한 틀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인간노동 중심 가치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인간노동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바꾸자는 의도 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미 금이 가 있어 왜곡된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테이프를 붙여가며 계속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금간 거울을 산산조각내어야 새로운 거울을 갖출 수 있다.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 강조하나
“똥을 자연, 환경, 생태 이름으로 포장 말아야”

병들어 아픈 사람은 자연을 찾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자연을 찾는다. 힘 있는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자연을 찾는다. 병든 사람은 치유하기 위해, 마음이 아픈 사람은 위로 받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은 정복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비로소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을 찾는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아프지 않고, 권력을 갖지 못했으며, 사랑을 찾지 못한 또는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은 자연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강조해야 하는가? 의도치 않았지만 많은 선의를 갖는 판단과 행동이, 자연이라는 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양극단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똥을 섣불리 자연, 환경, 생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시도는 의도치 않았지만 극단을 형성하고 양극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똥은 밥이다. 똥은 음식이다. 똥은 배설 직전 배 속에 있었다. 똥을 더럽게 보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예전에는 똥이 집집마다 귀한 자원이었다. 이런 얘기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강조하면서 설득할 수도 있다. 이런 말들이 많은 경우 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조하고 설득할수록, 똥은 똥이지 어떻게 음식일 수 있느냐.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더럽지 않다고 강요하지마라. 똥을 더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신병 아니냐는 등의 강한 반대의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믿으면 그것도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진실이 극단으로 놓이게 되어 의도치 않게 똥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똥을 매개로 가치의 기준과 척도를 만듦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질서에 걸맞게 똥을 새롭게 해석해야지 똥으로 인한 갈등을 제공해서는 곤란하다. 똥의 가치를 똥을 통해 말하기 보단 똥이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바이오에너지가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양질의 퇴비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똥은 바이오에너지, 양질의 퇴비라는 매개를 통해 이제 사회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똥에 대해 자연을 강조하기 보다는 과학과 과학기술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선한 인간으로서 더 이상의 해를 가하지 말자고 강조하기 보다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빼고 똥은 에너지가 될 수 있고 고품질의 퇴비로 바뀐다고 과학적 근거를 갖고 말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한 것이지만, 자연과 환경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극단을 만드는 것을 피하는 선택한 것이다. 대신 이 선택은 경제성이라는 복병을 만나지만 자연과 인간의 양극 상황만큼 해결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처럼 자연은 많은 경우 자연스럽지 못한 양극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똥을 매개로 새로운 가치 기준 제시”

자연과 인간이란 양극을 피하려다 경제성이라는 만만찮은 복병을 만났고, 똥은 경제적 가치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함께 가치 기준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성, 가치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 우리의 논리를 지배하는 가치기준 말이다. 우리는 가치의 기준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적인 존재라고 믿는 경향도 있다. 노동의 가치가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의 등장과 거대 자본의 노동화를 고려하면, 노동의 가치에 머무는 것이 인간존엄을 오히려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본과 인간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들로 인공지능 자본주의시대, 인간을 위한 가치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인공지능 두뇌 자본주의 시대에는 인간노동은 더 이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똥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그곳에 이익이 발생하며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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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원
울산과학기술원(UNIST) 도시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법명은 원광(圓光).
과학예술융합 연구센터 사이언스월든 센터장을 2015년 이후 맡고 있다. 2016년, 2017년 씽크탱크 Edge 재단에 ‘똥본위화폐’, ‘중용의 비움’ 에세이를 발표했다.
통일부 (사)북한물문제연구회 창립멤버로서 북한주민이 겪고 있는 물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쁜 작은 마을에 전기없이도 안전한 물을 생산할 수 있는 ‘옹달샘’ 정수기 공급프로젝트를 2006년 이후 진행하고 있다.
저술로는 <이것은 변기가 아닙니다>(2021년, 개마고원)과 <금간 거울 산산조각 내기>(2020년, 파티)가 있다. 사이언스월든 센터 웹: ScienceWalde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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