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증오하고 원한이 커지고 있어 더 가슴이 아프다”
“서로 증오하고 원한이 커지고 있어 더 가슴이 아프다”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1.06.09 16:4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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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출가한 한국인 디라 스님이 본 미얀마 상황은
9일 미얀마를위한불교행동·프란치스칸 JPIC 공동 주최 토크쇼
2007년 새프란 혁명 때와 다른 스님들, 이유는?
“2007년, 군부에 시민살생 원인 제공했다고 여기는 듯”
“군부가 절 불태우고 스님 살해…정치참여 말자 분위기”
디라 스님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과 ‘프란치스칸 JPIC’가 8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10호에서 연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_신부님이 묻고 스님이 답하다’ 토크쇼에 나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상황과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다른 미얀마 승가, 자신의 출가 이야기를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어려울 때 같이한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말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기억하고 감사해 한다. 기억하고 관심을 계속 가져 달라.”

한국인으로 미얀마에서 출가한 디라 스님은 8일 이렇게 말했다. 디라 스님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과 ‘프란치스칸 JPIC’가 8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10호에서 연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_신부님이 묻고 스님이 답하다’ 토크쇼에 나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상황과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다른 미얀마 승가, 자신의 출가 이야기를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토크쇼는 김종화 신부(작은형제회 JPIC 위원장,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가 질문하고 디라 스님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디라 스님은 1972년 서울 태생으로 2008년 미얀마로 출국해 찬메수행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2009년 미얀마 찬메 사야도의 제자로 비구계 수계 후 5년 동안 여러 수행처들에서 수행했고, 2014년부터 미얀마 양곤의 마나빠다이 교육센터에서 거주하며 미얀마 어린이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 미얀마 흘레구의 마나빠다이 승가언어대학 운영 소임을 맡아 미얀마 스님들의 한국어 교육과 재가자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사양성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발생 후 2달 후인 4월 한국으로 들어와 대구 마나빠다이불교센터에서 거주하며, 미얀마 학생들을 위한 인터넷학교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김종화 신부의 질문에 디라 스님의 답변은 ‘개인 수행 중심’의 발언으로 들린다. 일부 발언에는 더 이상의 살생을 막기 위해 시민불복종 운동을 멈추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개인적 의견도 포함돼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으로 폄하하는 이유로 지적될 수도 있다. ‘계율’을 내세워 대다수의 국민의 열망에 답하지 않는, 사회성이 결여된 미얀마 스님들의 보통 시각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답변은 이날 김종화 신부가 준비한 질문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이유가 됐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샤프론 혁명, 스님들의 집단 시위. 사진=국제 엠네스티



2월 1일 새벽, 미얀마 국민들은 앞날이 캄캄해졌다. 군부가 정권을 강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군부 쿠데타는 미얀마 국민들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주의가 붕괴되고,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최빈국으로 다시 전락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군부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부정선거를 끌어 들였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우윈민 대통령 그리고 국가 고위급 인사들이 구금됐다는 소식도 다급히 전해졌다. 1년 전 선거로 국민들이 뽑은 의원들이 갇힌 것이었다. 부정선거라는 군부의 주장을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군부를 지지하는 이들을 빼고는 국민 모두가 비탄에 잠겼다.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가재도구를 시끄럽게 두드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촛불 시위, 빨간 리본, 그리고 홍콩과 태국을 거쳐 미얀마로 전해진 세 손가락 경례는 군정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의 상징이 되었다. 시민불복종 운동에는 1960년대까지 부유함을 누린 노년층, 군부에 저항했던 88세대로 대변되는 중장년층, 그리고 정치발전의 성장통을 경험 중인 청년층 등 3세대가 어우러지고 있다고 분서한다. 숫자 2가 다섯 개 겹치는 2월 22일,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총파업을 했고, 군정에 반대하는 시위는 혁명이 됐다.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 군정 반대 시위인 ‘사프란 혁명’ 이후 올해 최대 규모의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사프란 혁명’은 당시 군정의 급격한 유가 인상에 항의해 미얀마 스님들이 주축이 돼 거리로 나서면서 일어났다.

미얀마 인구의 90%가량이 불교신자다. 기독교와 무슬림도 있지만 소수이다. 2007년 사프란 혁명 당시 군부가 타협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미얀마 사회에서 불교가 가지는 압도적인 권위 때문이다. 2007년 9월 초, 시위에 참가한 승려 몇몇이 군부에 의해 압송되자 시위양상이 전국으로 퍼졌다. 스님들의 대규모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고 스님을 사회적으로 존중하는 미얀마 국민의 의식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는 일반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군부는 전화와 인터넷을 끊고 국적항공사의 운항을 금지하는 등 통신과 통행의 자유를 억압했고, 실탄을 지급받은 군경은 강경하게 샤프란 혁명 참가자를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당시 군경의 발포로 수 백 명의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의 모습은 2021년의 모습과 비슷하다.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 다른 미얀마 승가

하지만 쿠데타 발생 128일째(6월 8일 기준), 지금은 2007년 샤프란 혁명과 같이 오렌지 빛 가사를 입은 미얀마 스님들이 혁명에 대규모 동참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몇몇 스님들이 마을공동체 안에서 군부의 유혈진압에 반대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며 거리에 나서고, 성명이 발표됐지만,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달리 조직적이고 대규모 시위 참여는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샤프란 혁명에 나섰던 스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디라 스님은 “2007년(샤프란 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디라 스님은 2008년 미얀마에서 출가했다) 2008년 미얀마에 갔을 때 이동제한 등 많은 제한이 있었다.”면서 “지금 한국 언론에 소개되는 것은 미얀마 스님들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얀마 스님들도 좌·우 보수·진보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언론이 한쪽면만 보여줘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샤프란 혁명은 스님들에게 트라우마로 작동
미얀마 군부, 절 불태우고 스님들 살상해
광주항쟁 때 한국군부와 현재 미얀마 군부는 달라
스님 집단행동 없었다면 희생 없었을 것으로 여겨
개인 참여 막지 않지만 집단행동 위험 우려”

그러면서 “2007년의 경험은 (미얀마 스님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동한다. 한국의 광주민주화 항쟁과 미얀마 사태는 같아 보이지만 다른 점도 있다.”면서 “한국의 군부는 광주항쟁 당시 절을 불태우고 스님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얀마 군인들은 어제까지 보시를 올렸던 스님을 군부에 반대한다고 죽이는 경험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는 스님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수행 등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미얀마 스님들이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디라 스님은 “2007년 스님들이 앞에 나서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스님들의 행렬에 시민들이 무리지어 따라갔다.”면서도 “하지만 (미얀마 스님들은)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부에 살생 당하는 큰 희생이 없었을 것이고, 군부가 대규모 살상을 하게 만든 원인을 스님들이 제공했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스님들이 나서면서 국민이 모이고, 군부는 위협감을 느껴 발포하게 됐다고 느끼는 것 같다.”면서 “때문에 지금 시위에 스님 개인이 참여하는 것은 말리지 않지만, 승가 전체가 모여 나서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시위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했다.



토크쇼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미얀마 불교는 삶…스님들은 마을 사람과 가족관계”

앞서 디라 스님은 미얀마에서 불교가 가진 위상과 역할을 설명했다. 스님은 “수행센터가 아닌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한국에서 알던 수행중심의 미얀마 불교와는 다른 세상, 시민들의 삶에서 살아 있는 불교를 알게 됐다.”면서 “미얀마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생활”이라고 했다.

디라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 스님들은 마을 사람과 가족관계이다. 임신 출산, 백일, 돌, 결혼, 질병, 사망 등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보시하고 법문을 듣는다. 수행센터가 아닌 마을에 사는 스님들은 평생 그 마을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낸다. 스님들은 마을에서 지식 학식이 가장 튀어나다. 이전 보다는 나아졌다지만, 미얀마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 밖으로 여행하는 것이 드물다. 해외여행도 거의 없다.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죽는 삶이다. 스님들은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마을 밖으로 나가고, 해외도 다녀온다. 스님들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아서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서 스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떤 스님이 있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교육과 복지 수준, 마을의 부유함에도 차이를 미친다.

디라 스님은 “욕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미얀마에서 출가해 수행센터에서 수행했다.”면서 “그 수행센터에 있는 한 미얀마 스님의 방에는 인터넷도 됐고, 방에는 침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에 전자제품, 생필품 등 짐으로 가득 차 있어 실망했다.”고 했다.

스님은 “처음에는 이 스님이 출가하고도 욕심이 많나 보다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도시에 온 스님이 물건을 사서 고향마을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물건들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서 “저도 수행센터를 떠나 마을로 내려와서야 알았다.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미얀마 스님들은 재가자의 보시와 공양으로만 살아야 한다. 스님들은 보시를 받고 공양을 받고 법문을 하지만, 보시를 받아 다른 필요한 곳에 분배하기도 한다.”고 했다.

또 “스님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펴보면서 아픈 일 힘든 일을 도와준다. 마을 밖 세상을 경험한 스님들은 마을로 돌아와 학교를 열고, 병원을 만들고, 직업훈련까지 맡는다.”면서 “미얀마 사람들은 스님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보시 보다 더 큰 복밭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스님들은 가족이고 스승이고 지도자이다. 스님이 공평한 분배 시스템이 되기도 한다. 스님에게 보시하면 대부분 필요한 곳에 분배가 된다. 분배를 못하는 스님을 과보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시위 참여했다가 끌려가면, 아이들 동자승들 누가 보살피나”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미얀마 스님들의 마을 공동체에서 역할을 근거로 거리로 나서지 않는 이유를 개인적 추측을 전제로 설명했다.

스님은 “(한국에서는) 애 미얀마 승단(종단)이 성명서도 발표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영어는 아니지만 미얀마어로 된 여러 성명을 발표했다.”면서 “제 있던 절에서는 보육원을 운영한다. 평소 50명 정도였던 아이들이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이 달에는 100명이 됐다. 이런 절들이 곳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들이 시위를 하면 절을 불태우고 주지 끌고 간다. 그렇게 되면 동자승 수백 명을 누가 책임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미얀마 스님들도 시민을 위해 시위하고 싶지만,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도 있고, 안 보이는 곳에서 분배하고,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맡아 수식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방청석에서 질문이 나왔다. 미얀마 시민군이 로힝야 족에게 함께하자고 했는데, 이것이 도움이 되겠냐는 것이다.

2016~2017년에 발생한 로힝야족 학살 사태는 미얀마 내부의 여러 문제를 세계에 알렸다.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아웅산 수치에 대한 시선도 일부 변했다. 평화의 종교로 알던 불교, 이를 믿는 미얀마 불교도들이 행한 폭력성에 세계가 치를 떨었다. 로힝야 족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로힝야족 학살의 원인 제공은 불교도들이 대부분인 버마족을 살상한 로힝야족에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학살의 책임을 면할 길은 없었다.

미얀마의 ‘불교민족주의’는 해악으로 여겨진다. 미얀마에는 종교 제일주의와 민족주의를 아우르는 ‘마바타’라는 조직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불교 수호를 목적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2016년 SNS을 통해 로힝야족 반대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 조직의 간판 격인 스님 아신 위라투는 로힝야 학살 과정에서 이를 선동했다. 인구의 90%가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 이들은 미얀마가 곧 이슬람화될 것이며 불교도는 탄압받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대중에게 먹혔다.

마바타는 2021년 쿠데타를 벌인 군부를 지지한다. 이들에게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를 마바타는 믿지 않는다. 아웅산 수치 등이 불교민족주의에 반하는 세력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NLD는 지난해 총선 때 무슬림 인사 출마를 금지시켰다. 마바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샤프란 혁명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카툰. 출처=Irrawaddy News.



“스님들 전쟁 이야기 피해…민족갈등 해결되지 않을 것”

디라 스님은 “테라와다 불교에서 스님들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 때문에 이 에 대한) 답을 피한다.”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역사적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한 나라가 어디에도 없다고 하더라. 전 개인적으로 민주주의 이전에 민족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희망은 본다. 미얀마 젊은 사람들, Z세대들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면서 “미얀마 청년들이 인류 세계사에서 해결 못한 민족갈등을 해결하는 선례를 만들면 기쁠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떨까. 최근 우기로 접어들면서 양곤 지역에 홍수가 나면서 피해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시민불복종 운동으로
가난한 사람들 더 피해 입어
시위 방향도 수정되어야 할 것”

디라 스님은 “지금 내전 상황이다. 사태를 빨리 정상화 시켜야 한다고 본다. 파업 등으로 의료 시설이나 물류 등 모든 게 엉망이고, 국가시설을 포함해 도난도 발생하고 있다.”면서 “최근 양곤에 비가 많이 내렸다. 기후변화 위기로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가 증가했고, (쿠데타 이후) 쓰레기를 치우지 못해 하수구가 막혀 홍수 피해가 더 큰 게 아닌가 싶다. 지난해면 없을 홍수 피해가 발생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학생의 90%가 학교에 가지 않는 상황이며, 의료와 교육 등 기본적인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 기본적인 사회구조가 돌아가도록 파업을 철회하고 안정화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고통 받고 있다. ( 때문에) 시위 방향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시위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디라 스님의 말에 김정화 신부는 이날 준비한 다른 질문들을 할 수 없었다.

김 신부는 “모든 질문이 무용지물이 됐다.”고 하자 디라 스님은 “이전과는 다르다. 지금 상태로는 답이 없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상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 신부는 “무정부 상태에서 시민불복종 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미얀마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인지”를 물었다.

디라 스님은 “아마 한국이면 사회가 붕괴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미얀마는 산업화가 된 사회가 아닌 소가 쟁기로 논밭을 가는 농경사회이자,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다.”면서 “내가 있던 마을도 마찬가지다. 미얀마는 전기가 보급되는 곳이 전국에 50%가 넘지 않을 것이다. 또 쇄국인 나라여서 먹고 사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난민들이나 고아, 갑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우기 시작돼 홍수로 재난민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쿠데타 군부 수장 보시 받고 축원한 스님에
상처 받은 불교신자들 불교 떠난다지만…
정치 관여 않고 사람들 돕고 절에 있으면 좋겠다”

청중의 질문이 다시 나왔다.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의 수장에게 어떤 스님이 후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는 것이다.

디라 스님은 “미얀마에 유명한 큰스님이 있다. 의료시설과 학교를 많이 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국민들에게 추앙받는 스님”이라며 “그런데 이 스님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사령관에게 보시를 받고 축원을 해 준 일이 있다.”고 했다.

이어 “이 일로 불교신도 중에 상처를 받고 불교를 떠나겠다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이 불교를 떠나게 될지) 모른다. 스님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가족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받도록 할지, 숨겨줘야 할까요. 승려 입장에서는 차별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행위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고 했다.

또 “250계가 넘는 불교 계율은 신도(재가자)들이 사회에 맞지 않는 부분을 말하면서 늘어난 것”이라며 “타당한 이야기라도 스님들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이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 가족 내 친구가 죽어가고 끌려가고 있는데, 조금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할 것 같고, 행동도 거절해야 할 부분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미얀마 스님들은 지금처럼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람들을 돕고 절에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이제는 스님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청년들(Z세대)의 인식과 사고가 바뀌었다. 시위를 하는 청년들에게는 엄청난 신념이 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스님들 나서지 않아도, 청년 세대 죽을 각오 되어 있다”

미얀마 청년들은 어떤 마음으로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할까.

디라 스님은 “지난해 12월 (주 미얀마)한국대사관에서 교민들에게 두 차례나 쿠데타 위험을 공지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경로를 했지만, 믿지 않았고, (쿠데타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고, 어찌 보면 자만일 수도 있었다.”면서 인터넷과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쿠데타가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했고, 절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미얀마 인들은 세 번 참고 세 번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3일을 기다리고 시위에 나선 것”이라며 “청년 5명이 찾아와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가겠다고 해서 학기를 마치고 가라고 했다. 그 청년들은 소풍가는 분위기 같았다.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춤추고 흥겹게 대통령을 바꾸는 경험을 그동안 미얀마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Z세대는 시위에 나가면서 먹을 것을 싸서 나간다. 응집하며, 힘을 느끼고 들떠 있다. 저는 계엄령이 떨어지면 법이 아닌 군부가 우선이 될 것이기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시위가 소강상태가 되자, 사람들이 내게 와서 울면서 왜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느냐고 했다. 제자에게 계엄령에 대해, 프랑스 혁명부터 한국의 4.19혁명까지 이야기했다.”면서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가면서 저에게 싸우다 죽겠다고 하더라. 그 학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가족을 보호하고 생계를 이끄는 청년들의 참여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들도 마음만은 같다고 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끼리 증오와 원한이 커지고 있다”

아픈 사연도 소개했다. 증오가 커지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게 디라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은 “제가 있던 마을은 한국으로 치면 면단위 정도”라며 “이 마을에 딸 셋을 둔 경찰 집한이 있다. (쿠데타) 전에는 마을 남자들이 그 집 앞에서 대기했었다. 쿠데타 발생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 밤에 총소리가 들리고, 탁발을 가면 붕대를 멘 사람들이 보였다. 곳곳에 벽보가 붙었다. 경찰 가족들과 어울리면서 밀고하면 밀고자와 그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시민운동 참여자들의) 경고가 붙었다.”고 했다.

이어 “(경고를 보면서) 서로 증오하고 원한들이 커지는 것을 보게 돼 가슴이 아팠다. 승려로서 마을 사람들의 증오가 커지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외국인으로 한계가 느껴진다. 한국의 부모님들은 쿠데타로 인해 걱정하면서 돌아오라고 했다. 40여 곳을 탁발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을 주민들이 잘 생각했다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도 다시 돌아오라고도 했다.”면서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곳에서 내가 학교를 운영하고 그들과 같이 해야 하는데, 외국인이고 위험하니까 일을 중단하고 안정된 곳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무슬림 소수민족으로, 전 세계적으로 220만 명이 살고 있다. 출처-코이카
디라 스님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과 ‘프란치스칸 JPIC’가 8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10호에서 연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_신부님이 묻고 스님이 답하다’ 토크쇼에 나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상황과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다른 미얀마 승가, 자신의 출가 이야기를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어려울 때 같이한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말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기억하고 감사해 한다. 기억하고 관심을 계속 가져 달라.”

한국인으로 미얀마에서 출가한 디라 스님은 8일 이렇게 말했다. 디라 스님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불교행동’과 ‘프란치스칸 JPIC’가 8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10호에서 연 ‘미얀마로 출가한 한국 스님이 본 미얀마_신부님이 묻고 스님이 답하다’ 토크쇼에 나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상황과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다른 미얀마 승가, 자신의 출가 이야기를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토크쇼는 김종화 신부(작은형제회 JPIC 위원장,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가 질문하고 디라 스님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디라 스님은 1972년 서울 태생으로 2008년 미얀마로 출국해 찬메수행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2009년 미얀마 찬메 사야도의 제자로 비구계 수계 후 5년 동안 여러 수행처들에서 수행했고, 2014년부터 미얀마 양곤의 마나빠다이 교육센터에서 거주하며 미얀마 어린이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 미얀마 흘레구의 마나빠다이 승가언어대학 운영 소임을 맡아 미얀마 스님들의 한국어 교육과 재가자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사양성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발생 후 2달 후인 4월 한국으로 들어와 대구 마나빠다이불교센터에서 거주하며, 미얀마 학생들을 위한 인터넷학교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김종화 신부의 질문에 디라 스님의 답변은 ‘개인 수행 중심’의 발언으로 들린다. 일부 발언에는 더 이상의 살생을 막기 위해 시민불복종 운동을 멈추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개인적 의견도 포함돼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으로 폄하하는 이유로 지적될 수도 있다. ‘계율’을 내세워 대다수의 국민의 열망에 답하지 않는, 사회성이 결여된 미얀마 스님들의 보통 시각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답변은 이날 김종화 신부가 준비한 질문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이유가 됐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샤프론 혁명, 스님들의 집단 시위. 사진=국제 엠네스티
샤프론 혁명, 스님들의 집단 시위. 사진=국제 엠네스티

2월 1일 새벽, 미얀마 국민들은 앞날이 캄캄해졌다. 군부가 정권을 강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군부 쿠데타는 미얀마 국민들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주의가 붕괴되고,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최빈국으로 다시 전락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군부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부정선거를 끌어 들였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우윈민 대통령 그리고 국가 고위급 인사들이 구금됐다는 소식도 다급히 전해졌다. 1년 전 선거로 국민들이 뽑은 의원들이 갇힌 것이었다. 부정선거라는 군부의 주장을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군부를 지지하는 이들을 빼고는 국민 모두가 비탄에 잠겼다.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가재도구를 시끄럽게 두드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촛불 시위, 빨간 리본, 그리고 홍콩과 태국을 거쳐 미얀마로 전해진 세 손가락 경례는 군정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의 상징이 되었다. 시민불복종 운동에는 1960년대까지 부유함을 누린 노년층, 군부에 저항했던 88세대로 대변되는 중장년층, 그리고 정치발전의 성장통을 경험 중인 청년층 등 3세대가 어우러지고 있다고 분서한다. 숫자 2가 다섯 개 겹치는 2월 22일,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총파업을 했고, 군정에 반대하는 시위는 혁명이 됐다.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 군정 반대 시위인 ‘사프란 혁명’ 이후 올해 최대 규모의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사프란 혁명’은 당시 군정의 급격한 유가 인상에 항의해 미얀마 스님들이 주축이 돼 거리로 나서면서 일어났다.

미얀마 인구의 90%가량이 불교신자다. 기독교와 무슬림도 있지만 소수이다. 2007년 사프란 혁명 당시 군부가 타협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미얀마 사회에서 불교가 가지는 압도적인 권위 때문이다. 2007년 9월 초, 시위에 참가한 승려 몇몇이 군부에 의해 압송되자 시위양상이 전국으로 퍼졌다. 스님들의 대규모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고 스님을 사회적으로 존중하는 미얀마 국민의 의식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는 일반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군부는 전화와 인터넷을 끊고 국적항공사의 운항을 금지하는 등 통신과 통행의 자유를 억압했고, 실탄을 지급받은 군경은 강경하게 샤프란 혁명 참가자를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당시 군경의 발포로 수 백 명의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의 모습은 2021년의 모습과 비슷하다.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와 다른 미얀마 승가

하지만 쿠데타 발생 128일째(6월 8일 기준), 지금은 2007년 샤프란 혁명과 같이 오렌지 빛 가사를 입은 미얀마 스님들이 혁명에 대규모 동참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몇몇 스님들이 마을공동체 안에서 군부의 유혈진압에 반대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며 거리에 나서고, 성명이 발표됐지만, 샤프란 혁명 때와는 달리 조직적이고 대규모 시위 참여는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샤프란 혁명에 나섰던 스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디라 스님은 “2007년(샤프란 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디라 스님은 2008년 미얀마에서 출가했다) 2008년 미얀마에 갔을 때 이동제한 등 많은 제한이 있었다.”면서 “지금 한국 언론에 소개되는 것은 미얀마 스님들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얀마 스님들도 좌·우 보수·진보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언론이 한쪽면만 보여줘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샤프란 혁명은 스님들에게 트라우마로 작동
미얀마 군부, 절 불태우고 스님들 살상해
광주항쟁 때 한국군부와 현재 미얀마 군부는 달라
스님 집단행동 없었다면 희생 없었을 것으로 여겨
개인 참여 막지 않지만 집단행동 위험 우려”

그러면서 “2007년의 경험은 (미얀마 스님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동한다. 한국의 광주민주화 항쟁과 미얀마 사태는 같아 보이지만 다른 점도 있다.”면서 “한국의 군부는 광주항쟁 당시 절을 불태우고 스님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얀마 군인들은 어제까지 보시를 올렸던 스님을 군부에 반대한다고 죽이는 경험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는 스님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수행 등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미얀마 스님들이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디라 스님은 “2007년 스님들이 앞에 나서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스님들의 행렬에 시민들이 무리지어 따라갔다.”면서도 “하지만 (미얀마 스님들은)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부에 살생 당하는 큰 희생이 없었을 것이고, 군부가 대규모 살상을 하게 만든 원인을 스님들이 제공했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스님들이 나서면서 국민이 모이고, 군부는 위협감을 느껴 발포하게 됐다고 느끼는 것 같다.”면서 “때문에 지금 시위에 스님 개인이 참여하는 것은 말리지 않지만, 승가 전체가 모여 나서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 시위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했다.

토크쇼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토크쇼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미얀마 불교는 삶…스님들은 마을 사람과 가족관계”

앞서 디라 스님은 미얀마에서 불교가 가진 위상과 역할을 설명했다. 스님은 “수행센터가 아닌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한국에서 알던 수행중심의 미얀마 불교와는 다른 세상, 시민들의 삶에서 살아 있는 불교를 알게 됐다.”면서 “미얀마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생활”이라고 했다.

디라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 스님들은 마을 사람과 가족관계이다. 임신 출산, 백일, 돌, 결혼, 질병, 사망 등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보시하고 법문을 듣는다. 수행센터가 아닌 마을에 사는 스님들은 평생 그 마을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낸다. 스님들은 마을에서 지식 학식이 가장 튀어나다. 이전 보다는 나아졌다지만, 미얀마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 밖으로 여행하는 것이 드물다. 해외여행도 거의 없다.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죽는 삶이다. 스님들은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마을 밖으로 나가고, 해외도 다녀온다. 스님들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아서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서 스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떤 스님이 있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교육과 복지 수준, 마을의 부유함에도 차이를 미친다.

디라 스님은 “욕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미얀마에서 출가해 수행센터에서 수행했다.”면서 “그 수행센터에 있는 한 미얀마 스님의 방에는 인터넷도 됐고, 방에는 침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에 전자제품, 생필품 등 짐으로 가득 차 있어 실망했다.”고 했다.

스님은 “처음에는 이 스님이 출가하고도 욕심이 많나 보다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도시에 온 스님이 물건을 사서 고향마을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물건들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서 “저도 수행센터를 떠나 마을로 내려와서야 알았다.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미얀마 스님들은 재가자의 보시와 공양으로만 살아야 한다. 스님들은 보시를 받고 공양을 받고 법문을 하지만, 보시를 받아 다른 필요한 곳에 분배하기도 한다.”고 했다.

또 “스님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펴보면서 아픈 일 힘든 일을 도와준다. 마을 밖 세상을 경험한 스님들은 마을로 돌아와 학교를 열고, 병원을 만들고, 직업훈련까지 맡는다.”면서 “미얀마 사람들은 스님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보시 보다 더 큰 복밭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스님들은 가족이고 스승이고 지도자이다. 스님이 공평한 분배 시스템이 되기도 한다. 스님에게 보시하면 대부분 필요한 곳에 분배가 된다. 분배를 못하는 스님을 과보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시위 참여했다가 끌려가면, 아이들 동자승들 누가 보살피나”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미얀마 스님들의 마을 공동체에서 역할을 근거로 거리로 나서지 않는 이유를 개인적 추측을 전제로 설명했다.

스님은 “(한국에서는) 애 미얀마 승단(종단)이 성명서도 발표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영어는 아니지만 미얀마어로 된 여러 성명을 발표했다.”면서 “제 있던 절에서는 보육원을 운영한다. 평소 50명 정도였던 아이들이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이 달에는 100명이 됐다. 이런 절들이 곳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들이 시위를 하면 절을 불태우고 주지 끌고 간다. 그렇게 되면 동자승 수백 명을 누가 책임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미얀마 스님들도 시민을 위해 시위하고 싶지만,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도 있고, 안 보이는 곳에서 분배하고,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맡아 수식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방청석에서 질문이 나왔다. 미얀마 시민군이 로힝야 족에게 함께하자고 했는데, 이것이 도움이 되겠냐는 것이다.

2016~2017년에 발생한 로힝야족 학살 사태는 미얀마 내부의 여러 문제를 세계에 알렸다.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아웅산 수치에 대한 시선도 일부 변했다. 평화의 종교로 알던 불교, 이를 믿는 미얀마 불교도들이 행한 폭력성에 세계가 치를 떨었다. 로힝야 족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로힝야족 학살의 원인 제공은 불교도들이 대부분인 버마족을 살상한 로힝야족에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학살의 책임을 면할 길은 없었다.

미얀마의 ‘불교민족주의’는 해악으로 여겨진다. 미얀마에는 종교 제일주의와 민족주의를 아우르는 ‘마바타’라는 조직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불교 수호를 목적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2016년 SNS을 통해 로힝야족 반대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 조직의 간판 격인 스님 아신 위라투는 로힝야 학살 과정에서 이를 선동했다. 인구의 90%가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 이들은 미얀마가 곧 이슬람화될 것이며 불교도는 탄압받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대중에게 먹혔다.

마바타는 2021년 쿠데타를 벌인 군부를 지지한다. 이들에게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를 마바타는 믿지 않는다. 아웅산 수치 등이 불교민족주의에 반하는 세력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NLD는 지난해 총선 때 무슬림 인사 출마를 금지시켰다. 마바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샤프란 혁명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카툰. 출처=Irrawaddy News.
샤프란 혁명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카툰. 출처=Irrawaddy News.

“스님들 전쟁 이야기 피해…민족갈등 해결되지 않을 것”

디라 스님은 “테라와다 불교에서 스님들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 때문에 이 에 대한) 답을 피한다.”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역사적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한 나라가 어디에도 없다고 하더라. 전 개인적으로 민주주의 이전에 민족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희망은 본다. 미얀마 젊은 사람들, Z세대들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면서 “미얀마 청년들이 인류 세계사에서 해결 못한 민족갈등을 해결하는 선례를 만들면 기쁠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떨까. 최근 우기로 접어들면서 양곤 지역에 홍수가 나면서 피해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시민불복종 운동으로
가난한 사람들 더 피해 입어
시위 방향도 수정되어야 할 것”

디라 스님은 “지금 내전 상황이다. 사태를 빨리 정상화 시켜야 한다고 본다. 파업 등으로 의료 시설이나 물류 등 모든 게 엉망이고, 국가시설을 포함해 도난도 발생하고 있다.”면서 “최근 양곤에 비가 많이 내렸다. 기후변화 위기로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가 증가했고, (쿠데타 이후) 쓰레기를 치우지 못해 하수구가 막혀 홍수 피해가 더 큰 게 아닌가 싶다. 지난해면 없을 홍수 피해가 발생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학생의 90%가 학교에 가지 않는 상황이며, 의료와 교육 등 기본적인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 기본적인 사회구조가 돌아가도록 파업을 철회하고 안정화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고통 받고 있다. ( 때문에) 시위 방향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시위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디라 스님의 말에 김정화 신부는 이날 준비한 다른 질문들을 할 수 없었다.

김 신부는 “모든 질문이 무용지물이 됐다.”고 하자 디라 스님은 “이전과는 다르다. 지금 상태로는 답이 없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상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 신부는 “무정부 상태에서 시민불복종 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미얀마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인지”를 물었다.

디라 스님은 “아마 한국이면 사회가 붕괴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미얀마는 산업화가 된 사회가 아닌 소가 쟁기로 논밭을 가는 농경사회이자,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다.”면서 “내가 있던 마을도 마찬가지다. 미얀마는 전기가 보급되는 곳이 전국에 50%가 넘지 않을 것이다. 또 쇄국인 나라여서 먹고 사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난민들이나 고아, 갑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우기 시작돼 홍수로 재난민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쿠데타 군부 수장 보시 받고 축원한 스님에
상처 받은 불교신자들 불교 떠난다지만…
정치 관여 않고 사람들 돕고 절에 있으면 좋겠다”

청중의 질문이 다시 나왔다.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의 수장에게 어떤 스님이 후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는 것이다.

디라 스님은 “미얀마에 유명한 큰스님이 있다. 의료시설과 학교를 많이 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국민들에게 추앙받는 스님”이라며 “그런데 이 스님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사령관에게 보시를 받고 축원을 해 준 일이 있다.”고 했다.

이어 “이 일로 불교신도 중에 상처를 받고 불교를 떠나겠다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이 불교를 떠나게 될지) 모른다. 스님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가족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받도록 할지, 숨겨줘야 할까요. 승려 입장에서는 차별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행위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고 했다.

또 “250계가 넘는 불교 계율은 신도(재가자)들이 사회에 맞지 않는 부분을 말하면서 늘어난 것”이라며 “타당한 이야기라도 스님들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이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 가족 내 친구가 죽어가고 끌려가고 있는데, 조금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할 것 같고, 행동도 거절해야 할 부분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미얀마 스님들은 지금처럼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람들을 돕고 절에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라 스님은 “이제는 스님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청년들(Z세대)의 인식과 사고가 바뀌었다. 시위를 하는 청년들에게는 엄청난 신념이 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스님들 나서지 않아도, 청년 세대 죽을 각오 되어 있다”

미얀마 청년들은 어떤 마음으로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할까.

디라 스님은 “지난해 12월 (주 미얀마)한국대사관에서 교민들에게 두 차례나 쿠데타 위험을 공지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경로를 했지만, 믿지 않았고, (쿠데타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고, 어찌 보면 자만일 수도 있었다.”면서 인터넷과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쿠데타가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했고, 절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미얀마 인들은 세 번 참고 세 번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3일을 기다리고 시위에 나선 것”이라며 “청년 5명이 찾아와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가겠다고 해서 학기를 마치고 가라고 했다. 그 청년들은 소풍가는 분위기 같았다.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춤추고 흥겹게 대통령을 바꾸는 경험을 그동안 미얀마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Z세대는 시위에 나가면서 먹을 것을 싸서 나간다. 응집하며, 힘을 느끼고 들떠 있다. 저는 계엄령이 떨어지면 법이 아닌 군부가 우선이 될 것이기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시위가 소강상태가 되자, 사람들이 내게 와서 울면서 왜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느냐고 했다. 제자에게 계엄령에 대해, 프랑스 혁명부터 한국의 4.19혁명까지 이야기했다.”면서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가면서 저에게 싸우다 죽겠다고 하더라. 그 학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가족을 보호하고 생계를 이끄는 청년들의 참여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들도 마음만은 같다고 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끼리 증오와 원한이 커지고 있다”

아픈 사연도 소개했다. 증오가 커지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게 디라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은 “제가 있던 마을은 한국으로 치면 면단위 정도”라며 “이 마을에 딸 셋을 둔 경찰 집한이 있다. (쿠데타) 전에는 마을 남자들이 그 집 앞에서 대기했었다. 쿠데타 발생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 밤에 총소리가 들리고, 탁발을 가면 붕대를 멘 사람들이 보였다. 곳곳에 벽보가 붙었다. 경찰 가족들과 어울리면서 밀고하면 밀고자와 그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시민운동 참여자들의) 경고가 붙었다.”고 했다.

이어 “(경고를 보면서) 서로 증오하고 원한들이 커지는 것을 보게 돼 가슴이 아팠다. 승려로서 마을 사람들의 증오가 커지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외국인으로 한계가 느껴진다. 한국의 부모님들은 쿠데타로 인해 걱정하면서 돌아오라고 했다. 40여 곳을 탁발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을 주민들이 잘 생각했다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도 다시 돌아오라고도 했다.”면서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곳에서 내가 학교를 운영하고 그들과 같이 해야 하는데, 외국인이고 위험하니까 일을 중단하고 안정된 곳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무슬림 소수민족으로, 전 세계적으로 220만 명이 살고 있다. 출처-코이카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무슬림 소수민족으로, 전 세계적으로 220만 명이 살고 있다. 출처-코이카

“미얀마 힘으로, 살아남아 도우면서 사태 해결하길 기도”

디라 스님은 “4월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3주 정도는 적응이 안 되더라. (한국에 와서도) 총소리가 들리고 환자들이 보였다. 봄날이 왔는데 벚꽃이 피는데 적응이 안 돼 3주 멍하니 있다가 뭐라도 해야 할지 찾는 중”면서 “인터넷에서 (미얀마의) 수없는 죽음들이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는 사진은 순화된 것들이다. 현지에서는 아주 잔인한 것(사진)들도 본다. 스승으로, 스님으로, 외국인 이방인으로서, 어떻든 죄책감이 있다. 미얀마의 힘으로, 살아남아서 도우면서 사태를 해결하길 빌고 있다.”고 했다.

또 “대구의 미얀마 유학생과 노동자들 보면 작년보다 사람들이 모여 화합하고 단합하고, 뭐라도 하자는 모습을 보인다. 칭찬할 만하다.”며 “죽음에 두려움 없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에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많이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제 한국의 시민사회, 종교인들은 무엇을 도와야 할까.

“어린이·청년들이 웃으면서 문제 해결하게 끔 주시해 달라”

디라 스님은 관심과 기억을 주문했다.

디라 스님은 “우리는 세상의 많은 일과 많은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미얀마의 소수민족은 아무도 몰라줘서 더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하더라.”면서 “미얀마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대단한 분들로 기억한다. 미얀마 국민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보내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어려울 때 같이 한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 기억해 주고 관심을 줄이지 말고 그들을 이야기해 달라.”면서 “노래 그림 사진 영화 무엇이든지 좋다. 그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디라 스님은 “한국 언론은 고통만 보여준다. 하지만 (그곳의) 어린이들은 웃을 수 있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한 세대 먼저 사는 세대 같다. 어린이들의 가치(미래 가치)가 어른의 가치보다 크다.”면서 “어린이와 청년 세대가 웃을 수 있는 힘,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가져 계속 나아가 민족 갈등 문제도 해결하게끔 주시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스님은 “양곤 산속에서도 인터넷이 되고 있다. 군부가 완전히 인터넷을 차단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저는 미얀마 현지 청년들과 일주일에 한번 씩 ‘어린왕자 책일기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웃음을 잃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기억과 관심, 희망으로 미얀마 사람들을 돕는 자리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미얀마 상황을 ‘미얀마의 국가정체성이 재정의’되는 과정이라고 분석한다. 미얀마 국민들은 민주화를 위한 생명을 건 운동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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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2021-06-10 21:42:17
여기나 저기나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면 생각이 참 편해지는군요

2021-06-09 17:00:04
왜 불교국가 미얀마스님이 불교사찰이나 불교단체 사무실이 아닌 가톨릭단체 사무실에서 가톨릭 성직자 수행자들 앞에서 증언대회를 해야 하나요?
주최단체에 불교단체도 있는데요.
교계신문 방송 보면 미얀마 후원하자고 모금운동 지지연대 법회행사는 많이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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