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 포스트 LA 합동법회 1991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 포스트 LA 합동법회 1991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05.1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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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류의 설렘을 이루다”

2019년 12월에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이라는 전례 없는 감염병으로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이 바뀌었다. 집과 사무실에서도 마스크 없이 살 수 없고, 악수 대신에 주먹치기와 눈인사 등 비접촉식 인사가 다반사이다. 그래서인지 코로나19 극복 이후라는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 상황을 넘어 이제는 함께 공생할 수밖에 없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과도 비슷하게 ‘포스트 LA 합동법회 1991’은 1950년대에 전후 복구라는 시대적 과제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던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교류와 통일을 위해 남북불교계가 내딛은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의 이전과 그 후를 살펴보는 것은 향후, 불교 교류의 필요성과 지속성에 관한 과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화석화된 냉전 이데올로기의 낡은 틀에서 진행된 첫 번째의 만남과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제1차 남북및해외동포조국통일기원불교도합동법회 회향만찬(1991.11.3. LA 하얏트호텔)에서 종단협 서의현 회장의 인사말.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등이 배석함. 사진=《불교계》(1992년, 국제불교문화원).



첫 만남, 설전하다

1991년 10월 말, 미국 LA 관음사에서 개최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대한 뒷담화는 1990년대 말까지 분분하다가 지금은 잊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기록의 미흡과 개인의 기억으로 비롯한 것이다. 공식적인 기록은 마치 ‘자기검열’이라도 하듯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과 없이 투영된 채로 작성된 바 있다. 1991년 10월 25일 종단협의회 명의로 작성된 ‘연석회의 자료’에서는 종단협의회・통일원・문화부・안기부 등 정부기관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또한 그때 실무를 맡았던 분들은 “내가 다 한 거야.”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때 자료가 거의 사라지고, 보물처럼 부여안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가운데에서의 기록은 단편적이거나 시각차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LA 합동법회와 같이 역사적인 내용은 당시 대표자를 중심으로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을 수 있다. 양측의 입장이 서로 팽팽하고, 또 대표자의 최종 승인으로 결정되는 사안일수록 더욱 축약되어 기록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LA 합동법회도 행사 명칭과 일시, 장소 그리고 한 줄 평가로 기록하고 있다.

1991년 10월 28일 LA에 도착한 조불련 대표단은 남측 대표단 등과 별도의 상견례 없이 하루가 지난 다음, 29일 오전 9시부터 관음사 종무소에서 ‘남북・북남불교 대표자 연석회의’를 가지면서 행사 명칭과 합의 문안에 관한 사항으로 설전(舌戰)을 가졌다. 설전은 다음 날, 연석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 만난 양측은 행사의 명칭 표기에 대한 이견으로 8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다. 북측은 ‘조국통일’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남측에서 ‘기원법회’만으로 하자는 양측의 팽팽한 주장은 결국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로 확정하고, 미리 준비해서 부착한 기존 현수막을 뗀 다음, 당일 오후 5시 반을 넘기고 나서 창호지에 붓글씨를 써 행사 펼침막으로 붙이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이는 불교교류 역사에서의 명장면으로 남게 됐다.

그날 합동법회는 1991년 10월 29일 오후 6시 30분부터 관음사 법당에서 열렸다.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삼귀의례, 반야심경 봉독, 경과보고, 대표단 참관단 소개(북측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남측 이홍파 종단협 사무총장, 해외 신법타 한불협 부회장), 환영사(김도안 한불협 회장), 개회 인사(남측 서의현 종단협 회장, 북측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 선물전달, 조국평화통일 발원문 봉독(환영위원장), 사홍서원, 폐식의 순으로 마쳤다. 양측 대표단은 장시간 이동의 피로감과 첫 만남의 어색함으로 거의 대화 없이 헤어졌지만, 그날 관음사 육화당에서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과 남측의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언론사 ‘특별인터뷰’에서는 박 위원장에게 북측 불교의 현황 등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면서 북한불교의 이모저모가 처음으로 소개됐다.

미국방문 3일째인 10월 30일 북측 숙소인 LA 월셔타워 호텔과 관음사(10월 29일)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연석회의’는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됐다. 남북대표 기조연설에서 남측의 서의현 종단협 회장은 정치 영역을 떠나서 불교 교류에 남과 북이 모두 동참하자고 주장을 했지만, 북측의 박태호 조불련 중앙위원장은 “남측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단순한 남북한의 불교 교류는 의미가 없으며,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 문제 등을 없애야 한다.”라고 발언하면서 교류 방향과 방식에 있어 시각차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날 연석회의는 첫째, 안건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불교 상호교류(인적·물적 부문), 둘째로 합동법회 개최(초파일 전후의 통일기원 유등법회 개최, 평양 광법사 준공식 때 남한불교계 초청과 대구 팔공산 동화사 통일대불 회향식 때 북한불교계 초청) 사항, 셋째, 불교 교류를 위한 상설기구 설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한강과 대동강 등에서 유등 법회 개최를 위한 8개 항으로 된 의향서를 체결하는 등 남북불교의 교류 물꼬를 여는 첫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남측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특별인터뷰(1991.10.29. LA 관음사), 사진=《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



LA 합동법회, 설렘하다

월간 《해인》(1989년 11월호)에도 개최 소식이 전해졌던 1991년 LA 합동법회는 남북불교계가 서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남측 불교계는 “이제, 우리도 북측과 만날 수 있겠구나.” 또 “남북한의 불교는 똑같다.”라는 자신감과 동질감을 얻었게 됐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같이 교류할 수 있는 남측의 불교조직이나 집단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설렘은 기독교계에 의해서 다가왔다. 1988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던 조계종 승려 신법타는 1987년 2월 27일 미국 LA지역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돼, 북측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공식적으로 관계 맺었던 ‘조국통일북미주협회’(약칭 통협) 선우학원 박사와의 인연으로 조불련과 연결을 부탁했고, 그것을 미국 장로회한인교회협의회(PCA-CKC)가 다시 인연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그의 《북한불교연구》(2000)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미국 장로교한인교회협의회가 1990년 6월 초, 북측의 한시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초청하며 첫 인연으로 연결됐다. 북조선 미국방문단은 단장 한시해를 비롯한 로철수 영접부 참사, 김구식 사회과학원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승덕 주체사상연구소장, 고기준 조선기독교련맹 서기장, 리성봉 평양 봉수교회 목사, 최옥희 평양 신학원 전도사, 김혜옥 통역원 등 8명이 방문을 했다. 이때 김도안 LA 관음사 주지의 초청으로 그해 6월 19일 관음사 육화당에서 ‘북부 조국 미국방문단 환영 간담회’가 열었다. 재미 불교도의 통일 의지와 종교 간의 대화를 제안하면서 북측의 한시해 단장으로부터 “(초청하면) 조불련 대표단이 미국방문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확약을 받은 일과 대화의 창구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은 1993년 9월 10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14차 민족통일 심포지움》의 ‘한국불교계 통일운동과 전망’이란 신법타의 주제발표로 소개됐다.

이처럼 첫 만남의 기별은 1989년 7월 1일~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平壤祝典)’이 도화선이 됐다. ‘통일의 꽃’으로 불린 임수경 전대협 대표의 방북으로 화제가 된 평양축전에는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했다. 조국통일북미주협회에서도 미주대표단과 참관단을 평양축전에 파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 미국 LA 수도사의 신법타는 같은 해 6월 26일~7월 18일까지 평양을 단독 방문하여 조불련과의 교류를 가지는 한편, 평양축전의 개막과 폐막식에 참여했던 유일한 조계종 승려로 기록됐다.

북측 조불련에서도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2001)에 기록한 바와 같이 평양축전에 세계청년불교도 대표 1명과 조선청년불교도 대표 2명을 참가시켜 우의와 친선 연대활동을 가졌다. 축전 기간에는 평양 모란봉 용화사에서 축전에 참여한 청년과 학생 불자들을 위한 환영 의식을 개최하는 등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설렘으로 다가온 LA 합동법회는 46년의 낯섦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 번의 가족 여행처럼 끝났다. ‘사상에서의 오염원’과 ‘자본주의 황색 바람’이라고 북측에서 평가된 종교 부문에서의 교류가 제한되면서 남북불교 교류의 오래된 미래로 남았다.

# 다음 편은 ‘1994년 일본 동경회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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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남북및해외동포조국통일기원불교도합동법회 회향만찬(1991.11.3. LA 하얏트호텔)에서 종단협 서의현 회장의 인사말.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등이 배석함. 사진=《불교계》(1992년, 국제불교문화원).

첫 만남, 설전하다

1991년 10월 말, 미국 LA 관음사에서 개최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대한 뒷담화는 1990년대 말까지 분분하다가 지금은 잊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기록의 미흡과 개인의 기억으로 비롯한 것이다. 공식적인 기록은 마치 ‘자기검열’이라도 하듯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과 없이 투영된 채로 작성된 바 있다. 1991년 10월 25일 종단협의회 명의로 작성된 ‘연석회의 자료’에서는 종단협의회・통일원・문화부・안기부 등 정부기관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또한 그때 실무를 맡았던 분들은 “내가 다 한 거야.”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때 자료가 거의 사라지고, 보물처럼 부여안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가운데에서의 기록은 단편적이거나 시각차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LA 합동법회와 같이 역사적인 내용은 당시 대표자를 중심으로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을 수 있다. 양측의 입장이 서로 팽팽하고, 또 대표자의 최종 승인으로 결정되는 사안일수록 더욱 축약되어 기록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LA 합동법회도 행사 명칭과 일시, 장소 그리고 한 줄 평가로 기록하고 있다.

1991년 10월 28일 LA에 도착한 조불련 대표단은 남측 대표단 등과 별도의 상견례 없이 하루가 지난 다음, 29일 오전 9시부터 관음사 종무소에서 ‘남북・북남불교 대표자 연석회의’를 가지면서 행사 명칭과 합의 문안에 관한 사항으로 설전(舌戰)을 가졌다. 설전은 다음 날, 연석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 만난 양측은 행사의 명칭 표기에 대한 이견으로 8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다. 북측은 ‘조국통일’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남측에서 ‘기원법회’만으로 하자는 양측의 팽팽한 주장은 결국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로 확정하고, 미리 준비해서 부착한 기존 현수막을 뗀 다음, 당일 오후 5시 반을 넘기고 나서 창호지에 붓글씨를 써 행사 펼침막으로 붙이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이는 불교교류 역사에서의 명장면으로 남게 됐다.

그날 합동법회는 1991년 10월 29일 오후 6시 30분부터 관음사 법당에서 열렸다.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삼귀의례, 반야심경 봉독, 경과보고, 대표단 참관단 소개(북측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남측 이홍파 종단협 사무총장, 해외 신법타 한불협 부회장), 환영사(김도안 한불협 회장), 개회 인사(남측 서의현 종단협 회장, 북측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 선물전달, 조국평화통일 발원문 봉독(환영위원장), 사홍서원, 폐식의 순으로 마쳤다. 양측 대표단은 장시간 이동의 피로감과 첫 만남의 어색함으로 거의 대화 없이 헤어졌지만, 그날 관음사 육화당에서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과 남측의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언론사 ‘특별인터뷰’에서는 박 위원장에게 북측 불교의 현황 등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면서 북한불교의 이모저모가 처음으로 소개됐다.

미국방문 3일째인 10월 30일 북측 숙소인 LA 월셔타워 호텔과 관음사(10월 29일)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연석회의’는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됐다. 남북대표 기조연설에서 남측의 서의현 종단협 회장은 정치 영역을 떠나서 불교 교류에 남과 북이 모두 동참하자고 주장을 했지만, 북측의 박태호 조불련 중앙위원장은 “남측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단순한 남북한의 불교 교류는 의미가 없으며,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 문제 등을 없애야 한다.”라고 발언하면서 교류 방향과 방식에 있어 시각차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날 연석회의는 첫째, 안건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불교 상호교류(인적·물적 부문), 둘째로 합동법회 개최(초파일 전후의 통일기원 유등법회 개최, 평양 광법사 준공식 때 남한불교계 초청과 대구 팔공산 동화사 통일대불 회향식 때 북한불교계 초청) 사항, 셋째, 불교 교류를 위한 상설기구 설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한강과 대동강 등에서 유등 법회 개최를 위한 8개 항으로 된 의향서를 체결하는 등 남북불교의 교류 물꼬를 여는 첫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남측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특별인터뷰(1991.10.29. LA 관음사), 사진=《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
그 당시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남측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특별인터뷰(1991.10.29. LA 관음사), 사진=《평불협 창립 20돌 자료집》(2012).

LA 합동법회, 설렘하다

월간 《해인》(1989년 11월호)에도 개최 소식이 전해졌던 1991년 LA 합동법회는 남북불교계가 서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남측 불교계는 “이제, 우리도 북측과 만날 수 있겠구나.” 또 “남북한의 불교는 똑같다.”라는 자신감과 동질감을 얻었게 됐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같이 교류할 수 있는 남측의 불교조직이나 집단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설렘은 기독교계에 의해서 다가왔다. 1988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던 조계종 승려 신법타는 1987년 2월 27일 미국 LA지역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돼, 북측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공식적으로 관계 맺었던 ‘조국통일북미주협회’(약칭 통협) 선우학원 박사와의 인연으로 조불련과 연결을 부탁했고, 그것을 미국 장로회한인교회협의회(PCA-CKC)가 다시 인연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그의 《북한불교연구》(2000)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미국 장로교한인교회협의회가 1990년 6월 초, 북측의 한시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초청하며 첫 인연으로 연결됐다. 북조선 미국방문단은 단장 한시해를 비롯한 로철수 영접부 참사, 김구식 사회과학원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승덕 주체사상연구소장, 고기준 조선기독교련맹 서기장, 리성봉 평양 봉수교회 목사, 최옥희 평양 신학원 전도사, 김혜옥 통역원 등 8명이 방문을 했다. 이때 김도안 LA 관음사 주지의 초청으로 그해 6월 19일 관음사 육화당에서 ‘북부 조국 미국방문단 환영 간담회’가 열었다. 재미 불교도의 통일 의지와 종교 간의 대화를 제안하면서 북측의 한시해 단장으로부터 “(초청하면) 조불련 대표단이 미국방문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확약을 받은 일과 대화의 창구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은 1993년 9월 10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14차 민족통일 심포지움》의 ‘한국불교계 통일운동과 전망’이란 신법타의 주제발표로 소개됐다.

이처럼 첫 만남의 기별은 1989년 7월 1일~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平壤祝典)’이 도화선이 됐다. ‘통일의 꽃’으로 불린 임수경 전대협 대표의 방북으로 화제가 된 평양축전에는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했다. 조국통일북미주협회에서도 미주대표단과 참관단을 평양축전에 파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 미국 LA 수도사의 신법타는 같은 해 6월 26일~7월 18일까지 평양을 단독 방문하여 조불련과의 교류를 가지는 한편, 평양축전의 개막과 폐막식에 참여했던 유일한 조계종 승려로 기록됐다.

북측 조불련에서도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2001)에 기록한 바와 같이 평양축전에 세계청년불교도 대표 1명과 조선청년불교도 대표 2명을 참가시켜 우의와 친선 연대활동을 가졌다. 축전 기간에는 평양 모란봉 용화사에서 축전에 참여한 청년과 학생 불자들을 위한 환영 의식을 개최하는 등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설렘으로 다가온 LA 합동법회는 46년의 낯섦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 번의 가족 여행처럼 끝났다. ‘사상에서의 오염원’과 ‘자본주의 황색 바람’이라고 북측에서 평가된 종교 부문에서의 교류가 제한되면서 남북불교 교류의 오래된 미래로 남았다.

# 다음 편은 ‘1994년 일본 동경회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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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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