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2. 진흙소가 건너는 강
제 2부 2. 진흙소가 건너는 강
  • 혜범 스님
  • 승인 2021.04.0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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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미륵

고통스러워하고 서러워하던 소년이 소년의 아버지랑 손으로 서로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걸 보았다. 순간, 지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녹음과 녹화가 되지 않는다 했지만 비밀리에 교신을 나누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기실 변호사접견이라 해도 사상범이나 양심범들의 접견은 정보부에서 감청한다는 말도 돌았다.

구차하고 한스러운 삶이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미세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지명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명은 문제없는 척 그저 부자의 만남을 지켜볼 뿐이었다. 울고 있지만 울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지명은 씩 웃었다.

“무엇보다 고맙다고 인사드립니다.”

“불연(佛緣)입니다.”

사람살이 세상살이라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건 지명도 알고 있었다.

“우리 미륵이를 부탁드립니다. 상좌로 받아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4357이 말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허탈한 모습이었다. 소년이 지명을 건네 보았다. 겁먹고 움츠러들였던 입술 부르터 입술에 붉은 딱지가 앉은 채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고 나자 얼굴이 해맑아졌다. 그때 지명은 환희심에 가득 찬 부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호들갑을 떠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쁜 표정을 감추고 있지는 않았다.

“……미륵이요?”

“아, 예. 미륵이는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어요. 나이 오십에 애를 갖고 태명으로 불렀죠.”

“……저 하나도 제가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지명은 속으로 ‘빌어먹을’ 이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 예. 이놈이 길을 찾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4357은 실망하는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잠시 몸을 왼쪽으로 틀며 태연히 말했다.

“개코나, 길은······. 그런데 왜 여기에 계시는 거요?”

입 꼬리를 살짝 올린 지명이 물었다.

“······우물쭈물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4357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계면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요함과 시비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되요. 괴로움을 떠나 어찌 즐거움을 얻을 것이고 번뇌를 떠나 어찌 보리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뜸을 들이던 4357은 갈수록 차분하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지명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카아’ 하고 들릴락 말락 한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여기가 무덤 같아도 안전해요. 아늑하기도 하고요”

“······뭐요?”

지명은 그만 톡 쏘고 말았다.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도 곰살궂게 대하지 못하던 지명의 습관이었다. 조건 지어진 것들은 외로움이었고 괴로움이었다. 절대고독, 그리고 침묵. 울음을 찢고 들고 일어나는 의문이 하나 일었다.

“밥 주고 재워주고 이젠 국립선원에 적응이 되었습니다.”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두 부자가 울고불고 버둥거리는 동안 웬만해서 울지 않는 성격의 지명도 코가 시큰둥해 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몸으로 오랫동안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어중이떠중이 별의별 중들을 다 만나보았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입산한 거였다. ‘아, 사람이구나.’ 지명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들이 세 살일 때 교도소에 들어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비를 베푸사 아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자비를 베푸사 우리 정우를 상좌로 받아 주십시오.”

지명은 징역 방으로 도로 들어가던 4357의 합장하며 제발, 이라던 단어를 사용하던 소년 정우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한 사람은 갇혀야 하는 문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을 열린 문으로 나왔다. 그 눈빛으로 보아서는 세 사람을 죽일 눈빛은 아니었다. 순간 정말 사람을 죽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소년이나 소년의 아버지에게서 충분히 진정성, 진심은 읽어낼 수 있었다.

기록만 보고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었는데 재판의 모든 정황이 창작된 시나리오라는 것도 지명은 확인할 수 있었다. 변호사도 그렇다고 했다. 돈 없고 백 없어 힘이 없어 아버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징역을 살고 있다고. 억울하다고 했다. 범인이 아니라고 무죄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진짜 범인들은 누구일까. 왜 무엇 때문에 4357은 사바세상이 파놓은 함정과 덫에 걸려있을까. 재수가 없어서? 돈 없고 백이 없어서 항소심 판결이 기각되었다고? 재수가 없다고 다 무기수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건기록 수사기록 재판기록들은 소년의 말대로 허점투성이였다. 몇 군데 소년이 견출지로 붙여 놓은 곳을 조사해 들어가면 금세 판결을 뒤집을 근거가 나오겠다는 심증이 들었다. 그러나 지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과연 4357에게 문을 나오게 할 수 있을까. 4357을 가둔 세력들은 누구일까. 4357이 교도소에 들어 앉아 있는 이유가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의심했지만 조작된 현실 앞에서 지명은 끙 신음을 삼켰다.

“항소는?”

“아무래도 세월이 가야, 여기서 한 십년은 더······.”

4357의 말에 짧은 탄식과 함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여기가 더 안전해요. 정우도 그렇고.”

4357이 몸을 약간 뒤틀더니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는 눈빛이었다. 꿈이라는 건 늘 금이 갔고 부서졌으며 희망이란 건 늘 유리처럼 부딪혀 깨지기 마련이었다.

교도소를 나와 두 사람은 근 십여 분을 말없이 걸었다. 교도소를 나오니 눈이 그쳐 있었다. 차량들은 무심히 지나갔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은 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걷고 있었다. 간혹 지명과 정우의 걸음에 지나가는 차량 안에 탑승한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눈치였다. 지명은 담배를 뽑아 물었다. 하지만 담배연기를 한 모금 빠는 순간 컥컥거리며 잦은 기침을 쏟아냈다. 목이 부은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

“세상천지 넒은 데 우리 두 사람 해골 눕힐 데 없겠냐? 그래, 너의 아버지가 뭐라 시던?”

“스님이랑 살면 저도 새 인생을 살 수 있답니다. 아빠가 절더러 스님이 되래요. 스님의 상좌가 되라는데요.”

“……인마, 넌 스님이 되기는 너무 아까운 놈이야.”

“…….”

소년이 지명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 희미하게 웃었다. 순간 정우에게서 천진난만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맑고 밝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 당당함일까. 멀리서 보았을 때는 숨이 차 보였는데 같이 있어보니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돈을 왕창 벌거나 권력의 칼자루를 잡겠다는 게 아니라 부처님 제자, 승려. 그것도 지명의 제자가 되겠다고 덤벼드는 소년을 지명은 물끄러미 건네 보았다.

“왜 스님이 되려는 건데?”

“죄 같은 건 없어도 무기수가 되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건 자유하고 싶기 때문에요.”

“뭐? 네놈이 자유를 알아?”

정우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목 놓아 울어보았더니 미친놈이 되지 않으려면 그런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스님이 되려하지 말고 수행자가 되도록 해라.”

“……수행자요?”

“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거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거든. 밤이 오면 낮도 오지. 시간은 기다리는 이에게는 너무 느리게 가고, 걱정거리가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 빨리 가……. 슬픈 이에게는 밤이 너무 길고, 기뻐하는 이에게는 시간이 없지……. 그렇다는 얘기고 넌 스님 되기 좀 아까운 놈이다. 좀 더 살아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건 어떨까?”

“……그러죠 뭐. 급한 건 아니니까요. 다른 걸 찾으려고 애써봐야겠죠. 아직 전 어리니까요.”

용기를 내는 게 흙을 삼키는 것처럼 어렵다는 걸 안다는 양 소년이 어눌하게 말했다.

“그래 지금 네게 가장 급한 게 뭔데?”

“네, 스님과 함께 거처할 곳이요. 스님이나 저나 우리 주거부정이잖아요.”

“…….”

정우의 말에 이번에는 지명의 말문이 막혔다.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색깔이 사라진 사람들. 캄캄한 어둠에 헤매는 건 마찬가지이건만 회색 먹물에 물 들은 인간들이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성격이 당차고 자신감이 넘쳤던 정우는 아버지 아래에선 그래도 아이일 뿐이었다. 지명은 입을 실룩이며 웃었다. 정우의 가슴에 들어 있던 불씨가 어디서 생겨 나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분명했다. 한숨과 절망 눈물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정우의 아버지에게서 천년 사원과 같은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대의 삶이 아무리 남루하다 해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가라. 그것을 피하거나 욕하지 말라. 부족한 것을 들추는 이는 천국에서도 그것을 들춰낸다. 가난하더라도 그대의 생활을 사랑하라. 그러면 가난한 집에서도 즐겁고 마을 설레는 빛나는 시간을 누리게 되리라. 햇빛은 부자의 저택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집의 창가에도 비친다. 봄이 오면 그 문턱 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인가요? 스님. 우리 오두막집을 지으러 가요. 스님, 우리도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러 가자고요.”

“…….”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게 원통하고 분하고 억울하게 사는 게 어디 너 뿐이냐는 눈빛으로 지명이 소년의 눈을 바라볼 때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스님, 절터 앞으로 바로 강이 흐른대요.”

“……강?”

순간 지명은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안에서 갇혀 있는 사람, 그리고 우리는 밖에서 갇혀있는 사람이로구나’하는 마음에 피식 웃었다. 탐진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만 그래도 있는 그대로 살기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생활 때문에 상(相)이 생기고 생활 때문에 다 업장(業障)이 발생하는 거였다.

혜범 스님

1976년 입산, 199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바다, 뭍, 바람」당선. 1992년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영화화되었으며, 1993년 대전일보에 장편소설 『불꽃바람』을 연재했고, 1996년 대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장편소설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흙출판사),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청림출판사), 『천기를 누설한 여자』(흙출판사) 『반야심경』(밀알출판사), 『업보』(밀알출판사), 『남사당패』(태일출판사), 『시절인연』(밀알출판사), 『플랫폼에 서다』(북인) 등을 출간했으며,

산문집으로는 『행복할 권리』(도서출판 북인), 『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밀알출판사), 『달을 삼킨 개구리』(북갤럽), 『숟가락은 밥맛을 모른다』(북갤럽)를 펴냈다.

현재 강원도 원주 송정암에서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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