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본위화폐] 2. 한 공간 두 개의 세상
[똥본위화폐] 2. 한 공간 두 개의 세상
  • 조재원 울산과기원 교수
  • 승인 2021.04.05 1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 정의를 길거리 아닌 공간에서 전달하기 힘든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80년대 길거리에는 정의를 외치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정부가 있었다면, 지금은 서로 다른 두개의 믿음이 자신들의 진실을 주장하고 있다. 80년대의 경우, 대다수의 대중들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진실을 판단하기에는 예민한 부분이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나야 드러날 듯하다. 80년대 젊은 시절 거리로 나가지 못한 죄책감은 평생 나를 괴롭혔다.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몸부림치며 산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기후위기 시대 자연은 지켜야 하는, 인간과 분리될 수 있는 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상 속에서 찾아야 하는 특성을 갖는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자연 괴롭히는 인간이 인간의 적인 시대”

이데올로기적 정의의 대립 못지않게, 자연과 인간도 양 극단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잦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 약해서 인간에게 늘 당하지만 어머니처럼 여러 생명들을 품어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사실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환경이라는 이름의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전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나약한 존재였다.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위협적이었던 존재는, 이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반전이 일어났다. 위협적인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으로 삼아 싸웠다면 지금은 자연을 괴롭히는 인간이 인간의 적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제 길거리에서 자연을 보호하자는 외침보다는 자연을 괴롭히는 인간을 성토하는 외침이 훨씬 크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움직임에서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거리에서의 정의실현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대한 힘을 가진 기업과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 거리로 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자는 인간을 향한 분노 섞인 목소리도 주로 거리에서 들려온다. 광장이 아닌 거리에서의 목소리는, 그곳을 빠른 속도로 달려야하는 차들을 인위적으로 멈추고 전달하기 위한 외침이다. 거리의 목소리는 가끔 공명되고 큰 파장과 물결을 일으켜 민주주의 투표를 통해 정의라고 믿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 후 거리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기는 하지만 정의에 대한 갈등은 거리의 목소리와 민주주의 투표제도를 오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갈등은 거리의 목소리로는 그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형국이다. 기후변화 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지켜내자는 거리의 목소리는 때론 심금을 울리지만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많다. 일상으로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기후재난, 코로나 팬데믹, 소득 양극화 문제는 양 극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길에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자연 들추어내면 자연을 결코 지켜낼 수 없어”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자는 큰 움직임의 나약함, 일상이 힘든 대중의 무관심, 이를 향한 힘을 가진 자들의 냉소는 이제 다른 길 찾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자연의 삭제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인간으로부터 아예 제거하는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면 자연을 이용하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의 삭제란, 휴식을 주는 자연, 여행을 가기 위해 존재하는 자연,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자연, 야생이 존재하는 자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휴식을 주는 도시 속 숲, 따뜻한 온천물을 즐기는 여행, 전기발전 태양, 풍력, 화력 등의 에너지 시스템, 동물로부터 공격받지 않기 위한 공간,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동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말 자체를 쓰는 순간 구체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다. 자연을 말하지 않고도, 도시, 활동, 일상, 경제를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이때만이 자연은 지켜질 수 있다. 자연을 들추어 내는 순간 자연을 결코 지켜낼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삭제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뭉뚱그려 자연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때 모든 사물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이제 숲은 자연이 아니라 숲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 숲속으로 들어가 미세먼지 없는 신선한 공기를 숨 쉬며 자연이구나 생각하지 말고 신선한 공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해석해야 한다. 남극에서 녹아내리는 빙하는 자연 파괴가 아니라 빙하가 녹는 것이며 화산이 폭발해도 자연의 엄중한 경고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라는 이름,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를 비난하고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경험을 우리는 수없이 해 왔다. 자연이라는 뭉뚱그림에서 벗어나면 마침내 흐름이 보인다. 깨끗한 물 뿐만 아니라 사용한 하수의 흐름도 보이고, 신선한 공기뿐만 아니라 미세먼지 섞인 공기도 보인다. 에너지 흐름, 사람들의 흐름, 힘의 흐름도 보인다. 흐름을 보고 관찰하면 근원을 느끼게 된다. 뿌리가 썩지 않고서야 나뭇잎이 병들리 만무하다. 병든 곳이 있으면 흐름 속에서 아픔을 이해하고 그 병듦 아래 뿌리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은 자연을 삭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그런대로 해결된 듯 보였던 거리에서의 정의 실현을 다시 끄집어 본다.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함으로써 실마리를 풀고자 했듯이 정의라는 이름 뒤에 숨은 갈등의 뿌리가 있다면 이것도 삭제해 버리고 싶은 것이다. 갈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에 자석을 가져가면 쇳가루가 양쪽으로 나누어지듯 양극과 음극, 북극(N)과 남극(S)으로 나누어진다. 이데올로기 뒤에는 자본과 노동이 놓여있다. 자본과 노동 아래에는 가치가 있다. 자본과 노동의 가치는 가장 예민한 두개의 극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훨씬 복잡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얽혀 지금의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당연하다.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수많은 갈등의 요소들을 현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 이 두 가지 갈등만이라도 우선 다루어 보자는 것이다. 많은 것들의 밑바탕에는 자본과 노동의 가치 충돌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 미래 코드는 근대가 가져다 준 자연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생명과 물질 모두가 연결된 복잡성 속에서만 발견된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흐름 속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질서 만들 가치 발견”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본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즉, 가치의 충돌인 것이다. 자본이 번 소득이 노동의 소득을 앞설 때 갈등은 시작되고 소득의 배분을 둘러싼 주장은 양 극으로 나뉜다. 자본의 소득은 자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자본의 소득은 노동이 기여한 바가 크므로 노동에게 많은 부분 되돌려야 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가치의 갈등은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럼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가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가치로 인한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다면 그 해결은 가치의 출처가 아니라 가치라는 개념 자체에 있지 않을까. 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갈등 해결을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하는 노력을 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가치의 기준은 정작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된다. 지금 자본이라는 가치의 기준은 노동과 화폐에 있다고 판단된다. 밥 한 끼, 커피 한잔, 대학등록금 등의 가격을 매기는 가치의 기준은노동과 화폐에 있다. 하지만 조금씩 그리고 쉼 없이 가치의 축이 노동에서 화폐로 건너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래 디지털 사회,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 한다면 이러한 가치기준의 이동은 훨씬 속도를 낼 것이다. 더구나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노동을 담당하는 두뇌자본주의 시대, 가치의 기준은 대부분 자본 그 자체에 있게 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노동이 가치를 상실해 가는 이 시대, 가치를 배분하는 정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기준의 인간 측면에서의 회복을 통해 인간존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 중심에 인간의 똥이 놓이게 될 것이다. 자연의 개념을 삭제하면 똥의 흐름이 보이고, 흐름 속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

#조재원은
"기후위기 시대 자연은 지켜야 하는, 인간과 분리될 수 있는 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상 속에서 찾아야 하는 특성을 갖는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자연 괴롭히는 인간이 인간의 적인 시대”

이데올로기적 정의의 대립 못지않게, 자연과 인간도 양 극단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잦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 약해서 인간에게 늘 당하지만 어머니처럼 여러 생명들을 품어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사실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환경이라는 이름의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전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나약한 존재였다.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위협적이었던 존재는, 이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반전이 일어났다. 위협적인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으로 삼아 싸웠다면 지금은 자연을 괴롭히는 인간이 인간의 적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제 길거리에서 자연을 보호하자는 외침보다는 자연을 괴롭히는 인간을 성토하는 외침이 훨씬 크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움직임에서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거리에서의 정의실현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대한 힘을 가진 기업과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 거리로 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자는 인간을 향한 분노 섞인 목소리도 주로 거리에서 들려온다. 광장이 아닌 거리에서의 목소리는, 그곳을 빠른 속도로 달려야하는 차들을 인위적으로 멈추고 전달하기 위한 외침이다. 거리의 목소리는 가끔 공명되고 큰 파장과 물결을 일으켜 민주주의 투표를 통해 정의라고 믿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 후 거리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기는 하지만 정의에 대한 갈등은 거리의 목소리와 민주주의 투표제도를 오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갈등은 거리의 목소리로는 그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형국이다. 기후변화 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지켜내자는 거리의 목소리는 때론 심금을 울리지만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많다. 일상으로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기후재난, 코로나 팬데믹, 소득 양극화 문제는 양 극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길에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기후재난, 코로나 팬데믹, 소득 양극화 문제는 양 극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길에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자연 들추어내면 자연을 결코 지켜낼 수 없어”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자는 큰 움직임의 나약함, 일상이 힘든 대중의 무관심, 이를 향한 힘을 가진 자들의 냉소는 이제 다른 길 찾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자연의 삭제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인간으로부터 아예 제거하는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면 자연을 이용하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의 삭제란, 휴식을 주는 자연, 여행을 가기 위해 존재하는 자연,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자연, 야생이 존재하는 자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휴식을 주는 도시 속 숲, 따뜻한 온천물을 즐기는 여행, 전기발전 태양, 풍력, 화력 등의 에너지 시스템, 동물로부터 공격받지 않기 위한 공간,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동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말 자체를 쓰는 순간 구체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다. 자연을 말하지 않고도, 도시, 활동, 일상, 경제를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이때만이 자연은 지켜질 수 있다. 자연을 들추어 내는 순간 자연을 결코 지켜낼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삭제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뭉뚱그려 자연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때 모든 사물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이제 숲은 자연이 아니라 숲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 숲속으로 들어가 미세먼지 없는 신선한 공기를 숨 쉬며 자연이구나 생각하지 말고 신선한 공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해석해야 한다. 남극에서 녹아내리는 빙하는 자연 파괴가 아니라 빙하가 녹는 것이며 화산이 폭발해도 자연의 엄중한 경고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라는 이름,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를 비난하고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경험을 우리는 수없이 해 왔다. 자연이라는 뭉뚱그림에서 벗어나면 마침내 흐름이 보인다. 깨끗한 물 뿐만 아니라 사용한 하수의 흐름도 보이고, 신선한 공기뿐만 아니라 미세먼지 섞인 공기도 보인다. 에너지 흐름, 사람들의 흐름, 힘의 흐름도 보인다. 흐름을 보고 관찰하면 근원을 느끼게 된다. 뿌리가 썩지 않고서야 나뭇잎이 병들리 만무하다. 병든 곳이 있으면 흐름 속에서 아픔을 이해하고 그 병듦 아래 뿌리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은 자연을 삭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그런대로 해결된 듯 보였던 거리에서의 정의 실현을 다시 끄집어 본다.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함으로써 실마리를 풀고자 했듯이 정의라는 이름 뒤에 숨은 갈등의 뿌리가 있다면 이것도 삭제해 버리고 싶은 것이다. 갈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에 자석을 가져가면 쇳가루가 양쪽으로 나누어지듯 양극과 음극, 북극(N)과 남극(S)으로 나누어진다. 이데올로기 뒤에는 자본과 노동이 놓여있다. 자본과 노동 아래에는 가치가 있다. 자본과 노동의 가치는 가장 예민한 두개의 극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훨씬 복잡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얽혀 지금의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당연하다.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수많은 갈등의 요소들을 현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 이 두 가지 갈등만이라도 우선 다루어 보자는 것이다. 많은 것들의 밑바탕에는 자본과 노동의 가치 충돌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 미래 코드는 근대가 가져다 준 자연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생명과 물질 모두가 연결된 복잡성 속에서만 발견된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디지털시대 미래 코드는 근대가 가져다 준 자연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생명과 물질 모두가 연결된 복잡성 속에서만 발견된다" 글, 카툰=조재원 교수 제공

“흐름 속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질서 만들 가치 발견”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본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즉, 가치의 충돌인 것이다. 자본이 번 소득이 노동의 소득을 앞설 때 갈등은 시작되고 소득의 배분을 둘러싼 주장은 양 극으로 나뉜다. 자본의 소득은 자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자본의 소득은 노동이 기여한 바가 크므로 노동에게 많은 부분 되돌려야 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가치의 갈등은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럼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가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가치로 인한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다면 그 해결은 가치의 출처가 아니라 가치라는 개념 자체에 있지 않을까. 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갈등 해결을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하는 노력을 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가치의 기준은 정작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된다. 지금 자본이라는 가치의 기준은 노동과 화폐에 있다고 판단된다. 밥 한 끼, 커피 한잔, 대학등록금 등의 가격을 매기는 가치의 기준은노동과 화폐에 있다. 하지만 조금씩 그리고 쉼 없이 가치의 축이 노동에서 화폐로 건너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래 디지털 사회,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 한다면 이러한 가치기준의 이동은 훨씬 속도를 낼 것이다. 더구나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노동을 담당하는 두뇌자본주의 시대, 가치의 기준은 대부분 자본 그 자체에 있게 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노동이 가치를 상실해 가는 이 시대, 가치를 배분하는 정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기준의 인간 측면에서의 회복을 통해 인간존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 중심에 인간의 똥이 놓이게 될 것이다. 자연의 개념을 삭제하면 똥의 흐름이 보이고, 흐름 속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

#조재원

울산과학기술원(UNIST) 도시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법명은 원광(圓光).
과학예술융합 연구센터 사이언스월든 센터장을 2015년 이후 맡고 있다. 2016년, 2017년 씽크탱크 Edge 재단에 ‘똥본위화폐’, ‘중용의 비움’ 에세이를 발표했다.
통일부 (사)북한물문제연구회 창립멤버로서 북한주민이 겪고 있는 물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쁜 작은 마을에 전기없이도 안전한 물을 생산할 수 있는 ‘옹달샘’ 정수기 공급프로젝트를 2006년 이후 진행하고 있다.
저술로는 <이것은 변기가 아닙니다>(2021년, 개마고원)과 <금간 거울 산산조각 내기>(2020년, 파티)가 있다.사이언스월든 센터 웹: ScienceWalden.org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