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백장야호(百丈野狐)
신무문관: 백장야호(百丈野狐)
  • 박영재
  • 승인 2021.03.26 16: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45.

성찰배경: 앞글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동시대를 풍미했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와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에 대해 다루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먼저 마조 선사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법맥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의 초짜 시절 무렵 스승인 마조 선사로부터 크게 낭패를 당했던 일화가 담긴 <벽암록(碧巖錄)> 제51칙 ‘백장야압자(百丈野鴨子)’를 다룬 다음,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무문관(無門關)> 제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및 선농일치(禪農一致) 가풍, 즉 농사일인 생업(生業)과 수행(修行)이 둘이 아닌 ‘생수불이(生修不二)’에 대해 살피고자 합니다.

백장의 야생오리 문답

“마조 선사께서 백장과 함께 길을 가다가 야생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것이 무엇이냐?[是什麽]”하고 물으셨다. 백장이 “야생오리[野鴨子]입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선사께서 “어디로 날아갔느냐?”하고 물으시자 백장이 “(저쪽으로) 날아 가버렸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이에 선사께서 마침내 백장의 코를 손으로 쥐고 비틀자, 백장 스님은 아픔의 고통을 참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 “뭐야! 이미 날아 가버렸다고! (그럼 지금 여기에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이놈은 뭐냐?)”라고 일갈하셨다.”

사실 이처럼 ‘바른 스승[正師]’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때와 장소 및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다그치셨으며,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제자들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스승의 뒤를 이어 선가를 이끌어갔기에 선종(禪宗)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군더더기: 이 일화를 통해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행해지던 당 시대의 조사선풍을 잘 엿볼 수 있었다면, 간화선풍으로 전개된 남송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승께 입실해 점검받는 총참(總參)과 제자가 참구하는 화두에 견해가 서게 되면 아무 때나 점검받을 수 있는 독참(獨參)이라는 입실점검(入室點檢) 방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종달 선사 문하에서 1주일마다 개최되는 정기 참선법회에서 입실점검을 받곤 했는데, 선사께서 1983년 무렵 종로의 시민선방 지도법사로도 활동하시던 시절, 그곳 참선법회에 한 번 참석했다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간화선 수행의 핵심인 입실점검이 생소하던 당시 주최 측에서 선방 시설은 잘 갖추었으나 입실점검을 위한 방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사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일깨워주시기 위해 깨끗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분별없이 기지(機智)를 발취해, 거침없이 활용 가능한 좌식 화장실에 걸터앉으시고는 한 사람씩 화장실로 불러들여 점검을 해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신무문관: 백장야호(百丈野狐)

본칙(本則): 백장회해 선사께서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있어 늘 대중들과 함께 앉아서 설법을 듣다가, 대중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더니, 어느날은 물러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백장 선사께서 이를 이상히 여겨 “여기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라고 물었다.

노인이 “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먼 옛날 가섭불(迦葉佛)이 계실 때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어느 날 한 승려가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不落因果]’라고 잘못 응답하였기 때문에 오백생(五百生) 동안 들여우가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화상께서 저를 위하여 부디 일전어(一轉語)로 여우의 몸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요.”라고 대답하고는, 드디어 노인이 백장 선사께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스승이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不昧因果]”라고 답했다. 그 말끝에 노인은 크게 깨닫고 절하며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벗어나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 바라건대 부디 ‘죽은 승려’의 사례처럼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곧 백장 선사께서 유나(維那)로 하여금 대중에게 점심 식사후 장례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했다. 그러자 대중이 “일중(一衆)이 모두 건강하고 열반당(涅槃堂)에도 병든 분들이 한 분도 없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라고 수군거리며 괴이하게 생각했다. 식사 후 선사께서 대중들을 이끌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주장자로 죽은 여우를 밖으로 끌어내서, 즉시 화장(火葬)했다.

평창(評唱): 무문 선사께서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했을 때 왜 여우가 되었으며 불매인과(不昧因果)!라고 했을 때 어째서 여우 몸을 벗어났을까?”라고 제자들을 다그쳤다. 그리고는 “만약 이를 ‘지혜의 눈’[一隻眼]으로 꿰뚫어볼 수 있다면 곧 전백장(前百丈)이 살았던 오백생(五百生) 세월은 도리어 풍류적(風流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라고 첨언하셨다.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불락(不落)’이 앞면이고 ‘불매(不昧)’가 뒷면이 나오건/ 이는 모두 동전 앞뒷면 가운데 한 면일 뿐!/ 반대로 ‘불매’가 앞면이고 ‘불락’이 뒷면이 나오건/ 이는 도박판을 벌린 것처럼 모두 그릇된 짓이네. [不落不昧 兩采一賽. 不昧不落 千錯萬錯.]

제창(提唱): 이 공안은 <무문관>뿐만이 아니라 <종용록(從容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에도 들어있는데, 선가에서는 매우 투과하기 어려운 난투(難透)의 공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추측하건데 백장 선사께서 어느날 뒷산을 산책하다 바위 밑 굴속에 여우가 한 마리 죽은 것을 목격하고 제자를 하나라도 더 깨우쳐주기 위해 대중을 모아놓고 일장 연극을 한바탕 벌렸으리라 사료됩니다. 아무튼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수행자들을 ‘불락인과’와 ‘불매인과’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하면서 철저히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멋진 공안을 만들어냈으니 두고두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오백생 동안 여우 몸을 계속 받고 있어 이를 벗어던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위해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여우 노인에게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우와 사람이라는 이원적(二元的) 분별심(分別心)을 어떻게 놓아 버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 여러분이 여우 노인이었다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찬찬히 잘 참구해‘일전어’를 온몸으로 체득해 보시기를 간절히 염원 드려 봅니다.

한편 이런 상황은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주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같은 대부분의 중생들은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여우 짓을 하며 늘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사실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갑질을 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기사들도 일종의 여우 짓에 관한 좋은 사례들이겠지요.

끝으로 출가이건 재가이건 선 수행자의 경우, ‘생수불이(生修不二)’, 즉 수행과 함께 각자 모두 현재 맡고 있는 전문직에 철저히 충실하는 삶이 선행(先行)되지 않으면 이 화두를 들고 수십 년 씨름한다 하더라도 이 화두를 결코 제대로 투과할 수 없다라는 점을 함께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군더더기: 사실 필자가 <무문관> 제2칙 ‘백장야호’의 본칙에서 비록 참구할 화두를 명료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생략했지만 원전의 본칙 말미에 부칙(附則)에 해당하는, 수제자인 황벽 스님과의 문답이 다음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저녁때 백장 선사께서 법석(法席)에 올라 여우 노인에 관한 인연 이야기를 대중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제자인 황벽희운(黃檗希運, 790?-?) 스님이 벌떡 일어나 “고인(古人)이 그릇되이 대답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다는데 만일 그가 당시 그릇되이 대답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이 되어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이에 선사께서 “법석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그대를 위해 가르쳐 주겠노라.” 그러자 황벽 스님이 즉시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 스승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스승께서는 ‘달마의 수염은 붉다더니, 과연 붉은 수염의 달마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하면서 박수치며 웃으셨다.” 사실 본칙의 앞부분에 대해 견해가 명료하게 섰다면 부칙 역시 자명하겠지요.

한편 선가에서 ‘일전어’는 중생을 부처로 탈바꿈시켜주는 한마디라는 뜻인데,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성심편(省心篇)을 보면 일반인들에게도 인생을 전과 확연히 다르게 살게하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의 말을 듣는 것이 천금을 얻는 것보다 낫네.[得人一語勝千金]’

생수불이(生修不二)의 원조(元祖)

이제 건강한 100세를 살기 위한 본보기로서 자립형 선수행 공동체의 원조(元祖)인 백장 선사의 다른 면모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선사께서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즉 ‘선수행과 농사짓는 일이 하나다!’라는 가풍을 널리 선양하며 95세까지 장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바야흐로 당(唐) 나라가 성(盛)하던 때인 동시에 선(禪)도 가장 왕성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자 이에 발맞추어 선원의 규율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자, 백장 선사께서 최초로 선원규칙(禪院規則)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하게 된 것인데, 이는 선원 역사상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가장 극적인 일은 그가 70세가 될 무렵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늙은 스승께서 계속 밭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 하루는 몰래 그의 농기구들을 감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날 이후부터 공양 때가 되어도 식당에 오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 스승 거처를 찾아뵈며 “몇일 동안 식사도 거르시고 어디 편찮으십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단지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다시 농기구를 내드렸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선사께서는 입적할 때까지 일상 속에서 시주 없이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짓는 생업(生業)과 수행(修行)이 둘이 아닌 ‘생수불이(生修不二)’의 삶을 한결 같이 이어가며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행공동체를 일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로는 백장 선사의 이런 ‘생수불이’ 가풍이 그의 문하에서 선종의 오종칠가(五宗七家) 가운데 이종사가(二宗四家), 즉 백장-위산-앙산으로 이어진 위앙종(潙仰宗)과 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진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훗날 임제종에서 자명-양기로 이어진 양기파(楊岐派)와 자명-황룡으로 이어진 황룡파(黃龍派)로 여러 갈래로 분파되며 선종의 주류가 되었다고 사료됩니다. 

끝으로 백장 선사의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란 선어(禪語)는 오늘날까지도 두루 요긴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필자도 지난 2021년 2월 정년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늘 전공을 불문하고 학기 초 강의 시간에 한 번은 꼭 대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독려하곤 하였습니다. 
“대개 ‘작(作)’은 ‘일하다’를 뜻하지만 공부가 본업(本業)인 자네들의 경우에는 ‘공부하다’로 새겨 오늘 이후 ‘하루를 계획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라는 각오로 학기를 시작하면 학기말에 반드시 좋은 결과[실력 향상(向上)]를 얻을 것이네.”

 

박영재 교수(사진)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 차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