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고 풍요로운 미륵 세상 꿈꾼 민초들의 땅
평등하고 풍요로운 미륵 세상 꿈꾼 민초들의 땅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1.03.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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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 안성 칠장사와 봉업사지
▲ 안성 칠장사 전경. 고려 때 유가학승 혜소국사 정현 스님이 일곱 도적을 교화한 설화가 전하는 사찰이다. 때마침 내린 춘설로 도량이 하얗게 뒤덮였다.

봄눈〔春雪〕이 내렸습니다. 순례지를 향해 가는 길가 기슭엔, 헐벗은 가지 사이로 밤새 내려앉은 봄눈이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 흐느적이며 순례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아침햇살을 이기지 못하듯, 대지를 호령하던 삭풍은 따뜻한 봄기운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아침햇살이 깊은 어둠을 헤집고 새날이 밝았음을 선언하듯, 복수초는 차가운 눈 속에서 노란 꽃망울을 피우며 봄이 왔음을 알릴 터입니다. 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세상을 비관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 작은 몸부림도 언젠가는 어두운 대지를 밝히는 햇살이 되고 차가운 세상을 감싸는 온기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삶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은 권력을 앞세운 자들의 핍박과 수탈에도 굴하지 않고 때로는 뒷날을 기약하며 인내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분연히 일어서기도 했습니다. 안성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민중의 꿈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을 수 있는 고장입니다.

소설로 남은 민중의 영웅 임꺽정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연산군 때 활동한 홍길동(洪吉童, ?~1500?), 숙종 때 활동한 장길산(張吉山, ?~?)과 함께 임꺽정(林巨正 또는 林居叱正, ?~1562)을 들었습니다. 양주 출신의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왕실종친인 이량 등의 발호와 관리의 수탈로 민중의 삶이 처참한 지경에 이르자 민란을 일으켜 우두머리가 됩니다. 임꺽정은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 관아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이다 참모 서림(徐林)의 배신으로 3년만인 명종 17년(1562) 붙잡혀 15일 만에 죽임을 당합니다.

임꺽정에 대한 평가는 상반됩니다. 《명종실록》을 비롯한 사서(史書)는 그를 살육을 일삼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했지만,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장편소설 <임꺽정>에서 관곡을 털어 백성에 나눠주는 의적이자 민중의 영웅으로 재평가했습니다.

임꺽정이 스스로 도적의 우두머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일삼는 위정자들이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실록을 편찬한 사관이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니, 굶주리고 헐벗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목숨을 잇고자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평했을까요.

의적의 스승 병해 대사와 꺽정불

안성시 죽산면 칠현산 기슭에 있는 칠장사(七長寺)는 임꺽정의 스승 병해(甁亥) 대사가 주석했다는 사찰입니다.

소설 《임꺽정》에 따르면 스님은 갖바치, 즉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장인이 그나마 우대 받는 세상이 됐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갖바치는 백정과 다름없는 천민 중 천민이었습니다. 대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죽신 만드는 법을 가르쳐 굶주림을 면하게 했다지요. 병해 대사가 입적하자 임꺽정은 스승이 완성하지 못한 불상(꺽정불)을 조성해 칠장사에 모셨다 합니다.

병해 대사가 실존했던 인물이었는지, 실존했다면 임꺽정과 실제 어떤 관련이 있는 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문헌기록 어디에도 칠장사와 병해 대사,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지 않는 것을 보면, 벽초가 소설을 쓰면서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임꺽정이 역적이나 다름없었으니 그와 병해 대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벽초에 의해 되살아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려 초 유가종(瑜伽宗, 법상종)의 고승인 혜소 국사 정현(慧炤 國師 鼎賢, 972~1054) 스님의 탑비. 보물 제488호.

유가학승 혜소국사 정현 주석처 칠장사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창건 이후 고려 초 유가종(瑜伽宗, 법상종)의 고승인 혜소 국사 정현(慧炤 國師 鼎賢, 972~1054) 스님이 중창할 때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습니다.

스님은 이곳 칠장사에서 융철(融哲) 스님에게 유가행(瑜伽行)을 배웠습니다.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성종 15년(996) 미륵사의 오교대선(五敎大選)에 급제한 뒤 칠장사로 돌아왔습니다. 목종 때 대사(大師), 현종 때 수좌(首座), 덕종 때에는 승통(僧統), 문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된 스님은 왕명으로 법천사, 현화사 등 여러 사찰 주지 소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국사가 되던 문종 8년(1054) 칠장사로 돌아와 주석하다 11월 5일 임종게를 남기고 앉은 채 열반에 들었습니다.

현재 칠장사에는 문종 14년(1060)에 조성된 혜소국사비가 남아있습니다. 스님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弘濟館)이라는 수행처를 세우고 절을 크게 중수했다고 합니다.

《안성군지》에는 이 비와 관련된 일화가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칠장사에 들이닥쳐 절을 뒤지는 등 무례하게 굴자 한 노승이 나타나 “신성한 사찰을 더럽히지 말라.”고 나무랐습니다.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 노승을 베었는데, 노승은 홀연히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합니다. 이 모습을 본 가토는 혼비백산에 달아났다고 하지요. 혜소국사비는 이수와 비신, 귀부가 분리된 채 보존돼 있는데, 비신은 일화처럼 앞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나한이 된 일곱 도둑과 칠현산

칠장사가 자리한 산은 ‘칠현산(七賢山)’으로 불립니다. 산 이름 또한 혜소 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혜소 국사가 칠장사에 주석할 당시 아랫마을에 일곱 명의 도적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도적 중 한 명이 물을 마시러 샘터에 왔다가 순금바가지를 훔쳤습니다. 나중에 보니 다른 여섯 도둑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곱 도둑이 훔쳐온 순금바가지가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일곱 도둑은 그제야 혜소 국사가 신통을 부려 자신들을 일깨운 것임을 깨닫고 제자가 되었다 합니다. 일곱 도적은 오래지 않아 깨달음을 이루었고, 이때부터 칠장사를 품은 산을 ‘일곱 성현이 출현한 산’이라는 뜻에서 ‘칠현산’으로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경내 나한전에 모셔진 일곱 나한상이 혜소 국사가 교화한 일곱 도적이라 합니다. 칠장사 나한은 과거를 보러 가다 나한전에서 하룻밤 머문 박문수에게 시제를 알려주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나한이 된 일곱 도적 이야기는 혜소 스님의 수행의 깊이와 교화력을 짐작케 하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살이의 험난한 파고를 넘어야 했던 민중에게 칠장사가 언제든 찾아와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휴식처이자,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처, 희망을 꿈꾸는 의지처였음을 보여주는 설화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혜소 국사와 일곱 도적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뜩 부처님과 살인마 앙굴리말라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불교에서는 악인도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완성하겠다며 사람을 죽여 목걸이를 만들던 앙굴리말라나 재물을 탐하며 폭력을 일삼던 일곱 도둑이나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혜소 국사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깨달음을 이루어 성자가 되었습니다. 참다운 스승은 위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선한 영향력은 주변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꾸기 마련입니다. 세상은 재물과 권력, 자기 이익만을 향한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에게는 살인마와 포악한 도둑을 교화한 석가모니 부처님과 혜소 국사처럼 세상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꿈과 희망을 주는 스승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창대군 명복 빈 인목대비 원찰

혜소 국사가 입적한 이후 칠장사의 역사는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할 때 충주 개천사에 있던 사서(史書)를 이곳으로 옮겨 화를 피했다거나, 충렬왕 34년(1308)과 중종 1년(1506) 중수됐다는 것 외엔 별반 전하는 게 없습니다.

칠장사는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인조 1년(1623) 절을 중창하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광해군 즉위 후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자마자 칠장사를 원찰로 삼아 광해군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당시 인목대비가 쓴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과 친필 족자가 지금도 전합니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원찰로 영화로웠던 시절도 잠시, 이후 칠장사의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않습니다. 현종 30년(1674) 한 세도가가 장지(葬地)로 쓴다며 절을 불태워 사역을 서쪽으로 옮겨 중창했으나, 숙종 20년(1704) 또 한 번의 방화로 다시 옛터로 옮겨지었습니다. 이후 영·정조 대에 이르러 원통전, 미타전, 명부전, 천왕문을 짓고 대웅전을 보수했지만, 고종 24년(1887) 대화재로 다시 불탔습니다. 이후 중창불사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 안성 봉업사지. 고려 태조의 어진을 모신 사찰이었다. 당간지주 뒤로 오층석탑이 보인다.

태조 어진 봉안한 진전사찰 봉업사

칠장사에서 나와 봉업사(奉業寺)의 옛터로 향합니다. 칠장로를 따라 큰길까지 나온 뒤 용인 방면으로 걸미로(17번 국도 옛길)를 7km쯤 가다보면 죽산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길 왼쪽, 죽주산성이 있는 비봉산 아래가 봉업사지입니다.

봉업사는 한동안 ‘죽산리 절터’로만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다 1966년 경지정리 작업을 하다가 명문이 적힌 기와가 발견되면서 이 절터가 봉업사지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8세기 중엽 창건된 봉업사의 원래 이름은 화차사(華次寺)였습니다. 발굴조사 당시 이곳에서 ‘화차사’와 ‘대중팔년(大中八年)’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가 출토돼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화차사라는 절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지요. ‘대중 8년’은 신라 문성왕 16년(854)입니다.

봉업사는 고려 태조와 광종 때 크게 중창됩니다. 절터에서 발견된 ‘능달명(能達銘)’ 기와의 명문에 따르면 태조는 청주 출신 호족 능달에게 명해 봉업사를 중창하도록 했습니다. 능달은 죽주(竹州, 안성시 죽산면의 옛 지명) 지역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근거지인 청주 출신 장인을 동원해 절을 중창했습니다. 광종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목적으로 서원경(西原京, 청주)과 중원경(中原京, 충주)으로 향하는 길목인 죽주의 봉업사를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삼았습니다.

《고려사》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몽진(蒙塵)했다가 청주를 거쳐 돌아가는 길에 봉업사에 들러 태조의 어진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봉업사는 진전사원으로 고려 말까지 융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발굴조사 때 조선시대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탑만 남아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입니다.

▲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죽산중학교로 옮겨졌다가 1980년 경 칠장사로 이전 봉안됐습니다. 보물 제983호.

절터에는 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가 남아 있을 뿐 별다른 유물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절터에 있던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3호)은 죽산중학교로 옮겨졌다가 1980년 경 칠장사로 이전 봉안됐고, 이곳에서 출토된 ‘봉업사명 청동 향로’(보물 제1414호)는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습니다.

광종 때 중창된 죽산리 절터

봉업사지 오층석탑 옆으로 난 작은 길(봉업사로)을 따라 비봉산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300m쯤 거슬러 오르다 ‘봉업사’란 이정표를 따라 미륵당길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석탑 기단 아래에서 ‘태화 6년(太和六年)’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통일신라 때 경영되던 절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봉업사지 오층석탑에서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곳 또한 봉업사지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삼층석탑 주변을 발굴할 당시 광종 때 기와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능달은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봉업사를 중창했고, 광종 때는 이곳 죽산리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봉업사를 중창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봉업사(옛 용화사) 법당 왼쪽엔 석불입상이 서 있는데, 원래 죽주산성 아래에 쓰러져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다 합니다.

▲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골군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살한 송문주, 김윤주 두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불상으로 전한다.

‘태평미륵’과 미륵의 고장 안성

절터를 나와 다시 미륵당로를 따라 동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300m쯤 가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200m쯤 올라가면 ‘매산리 석불입상’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높이가 5.6m에 이르는 큰 불상이지요. 석불입상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미륵당으로 부릅니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고종 18년(1231) 비봉산 정상에 있는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宋文胄, ?~?) 장군과 이듬해 용인 처인성에서 몽고장수 사르타이〔撒禮塔〕을 활로 쏘아죽인 승려 출신 김윤후(金允侯, ?~?)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불상이라고도 하고, 조선 영조 때 최태평이라는 사람이 조성한 불상이라고도 합니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데, 관리가 출장 다닐 때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 중 하나인 태평원(太平院)이 주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안성 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서 부산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한성에서 출발한 영남대로는 이곳 죽주(죽산)를 거쳐 충청도와 경상도로 이어졌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개성에서 영남지방으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지요. 그만큼 죽주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몽골군을 물리친 송문주, 김윤후 두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석불을 조성했다거나 역원의 이름을 따 ‘태평미륵’으로 부른다는 이야기가 쉽게 수긍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죽산면을 비롯한 안성 일대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군가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못지않다.”고 했습니다.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이 지역에 남아있는 절과 절터, 불교문화재를 보면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안성은 미륵불이 많이 남아 있어 ‘미륵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태평미륵과 가솔리 미륵, 아양동 미륵, 대농리 미륵 등 안성지역에만 모두 16분의 미륵불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사람과 물산이 끊임없이 오가던 이 지역 사람들이 미륵불에게 마음을 의지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죽주산성에 올라 이천과 진천, 안성으로 쭉쭉 뻗은 도로와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매산리 석불입상’을 ‘태평미륵’이라 부르는 것도, 안성 땅 곳곳에 미륵불을 모시고 치성을 올린 것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 다툼 없고 풍요로운 시대를 그리는 민중의 염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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