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귀 옆 날카로운 도끼 자국... 온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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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1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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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영면] 거리의 백발투사... 그의 삶은 격동 현대사 자체였다 ②
통일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2021년 2월 15일 새벽에 영면했다. 향년 89세이다. '불쌈꾼', '거리의 백발 투사'로 불린 고인의 한평생은 격동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고 백기완 소장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이었으며, 오마이북에서 그의 마지막 저서인 <두 어른> <버선발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격동적인 삶과 노나메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독재정권 시절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거리로 나가 통일과 해방을 외쳤던 '불쌈군 백기완'의 삶을 5회에 걸쳐 재조명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편집자말]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
▲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
ⓒ 민족사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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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함석헌, 장준하 선생과 독재 타도 선두에 서다

1960년대는 혁명으로 문을 열었다. 사사오입 논리를 펼치며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으로 통과시킨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를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했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했던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됐고, 결국 이승만은 하야했다.

백기완은 4·19 혁명의 격동기 때 살아남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반독재 민주주의 혁명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했고 시위대를 뒤쫓아 다니면서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이었다. 하지만 백기완은 이후 보수 반동을 경계하기 위한 문화정화운동 단체인 <생활정화연맹>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듬해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백기완은 재야세력을 규합하면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각종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대정부 투쟁의 당위성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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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숱한 가택연금을 당했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백기완이 매번 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까여 끌려간 곳은 감옥의 독방이나 고문실이었다. 팔을 벌리면 차디찬 벽이 양 손끝에 닫는 1평 남짓한 독재의 공간이었다. 갖은 고문을 무릅쓰고 박정희에 맞서기 위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백기완은 이같이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야. 첫째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침략할 때 박정희라는 젊은이가 혈서로 맹세했어. 혈서로써 일본 제국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다는 말이야. 그것은 진짜 민족 반역행위야.

두 번째로는 8·15 해방 직후야. 반역행위를 했으면 가만히 앉아서 농사나 지었으면 나았겠지. 그런데 무슨 공산당 조직(남로당)에 들어갔다가 와서 조직을 몽땅 폭로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도록 한 뒤에 자기만 살아남았어. 이념을 떠나서 인간 반역이지.

세 번째는 4·19 때야. 초등학교 학생까지 나서서 이승만 타도에 앞장섰어. 그때 박정희는 군대 장군이었는데 뭐 하고 있었나?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우리가 다 일구어 놓으니까 총칼을 들고 민주주의를 압살했어. 그러니까 민주 반역이야. 첫째는 민족 반역, 두 번째는 인간 반역, 세 번째는 민주 반역자다, 이 말이야. 독재자 박정희는 반역자야."

1964년 백기완은 굴욕적 한일회담에 맞서려고 함석헌, 계훈제, 변영태 선생과 함께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자 장준하 선생을 만나 광나루 강 한복판에 조각배를 띄워놓고 그 위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시위가 지속되자 6월 3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 간의 협정이 체결됐지만, 일본은 식민지 수탈을 공식 시인하지도, 보상하지도 않았다.

이를 비판하는 민심이 들끓었다. 1965년 6월 서울 흥사단에서 함석헌 선생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연설을 했다가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백기완은 당시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의미와 독립군, 민중 혁명의 의미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고 극본 「어린 엿장수의 꿈」을 쓰기도 했다. 그 뒤 영화감독의 꿈을 꾸며 민중들의 삶과 뜻을 영상언어로 만들려고 몇 권의 영화극본을 썼다.

1966년에는 박정희 군사독재 끝장을 위한 재야 연합전선의 하나로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선생과 함께 야당 통합운동을 성사시켰다. 이듬해 5월에 치러질 제6대 대통령 선거에 대응하려 했지만 박정희가 당선됐다. 통일이라는 말조차 불온시 됐지만 서울 회현동 처갓집 화장실을 허물고 살던 집에 <통일문제연구소 꾸림 모임(발기위원회)> 현판을 내걸었다. 종이로 글을 써서 붙이면 누군가 와서 찢었고, 나무 현판을 달면 쪼개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박정희 긴급조치 1호 때 첫 구속… 문화예술 투쟁 병행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린 서울 대학로에서의 백기완.
▲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린 서울 대학로에서의 백기완.
ⓒ 통일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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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은 그 뒤에도 반세기 동안 '통일'을 짊어지고 다녔다. 백기완에게 통일이란 단순한 남북한의 통합, 그 이상이었다.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다.

"해방이라는 말이 있지. 우리말로 '날래'야. 다시 말해 해방이란 자유야. 사람의 자유, 목숨의 자유, 자연의 자유야. 이런 자유를 온 사회, 온 지구적으로 누리는 게 통일이야. 남쪽과 북쪽이 하나가 되는 것은 일 단계 통일이야. 있는 놈과 없는 놈이 하나가 되면 그건 진짜로는 분열이지. 돈이 우리를 억압하잖아. 돈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의 매개가 아니라 거꾸로 사람의 주인이 됐어. 우릴 억압하고 있어.

또 돈은 가만있으면 눈처럼 녹아버려. 끊임없이 굴러야 재생산이 되는 구조야. 그 욕구로부터도 해방이 되어야 통일을 할 수 있어. 절집에서 중들은 다 버리자고 하는데 자기 혼자만 버렸지 세상의 온갖 것을 버린 건 아냐. 자기 혼자만 버리지 말고 빼앗은 것도 내 거라는 거짓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그게 참통일이요, 살티(참목숨)의 통일이지.

통일이란 게 뭐야. 죽일 놈들 나쁜 놈들 이놈들 청산하는 것이 통일 아니겠어? 나는 민족통일이란 말은 안 쓰잖아. 민족적인 비극 속에 살았으면서도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 통일이라고 하잖아. 죽일 놈들을 청산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길이지. 통일은 분단 억압착취체제로부터 착취 받은 민중의 해방이야. 그것을 완결하는 게 한반도의 통일이고 전 세계로 완결하는 게 인류의 통일이야. 통일을 이렇게 봐야지."

결국 통일문제연구소 간판을 걸지 못하고 1967년 <사상계> 사장이었던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했다. 1968년에는 '다시 쳐들어온 일본,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 등을 다니면서 강연을 통해 대학생들을 일깨웠다

1969년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추진했다. 그해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인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첫 직장이었던 대한일보 객원 논설 위원직에서 쫓겨났다. 이때 삼선개헌반투쟁위원회 위원이었던 백기완은 박정희 고향인 경북 선산 장마당에까지 가서 정권을 몰아내자고 연설했다.

백기완은 이 연설로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10만원의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5년 뒤인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지인들이 모두 풀려날 때 군사정권은 이 벌금을 내야 한다면서 백기완만은 제외시켰지만 아내와, 박경리 소설가, 박한상 변호사가 대신 내서 풀려났다.

1970년 11월에는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했다. 봉제공장 노동자로 착취를 당하다가 독재정권 아래서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온몸으로 고발하며 산화한 것이다.

그 이전인 4월에는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가 터져 7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독재정권에 잘 보이려고 무리한 공사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부실공사를 눈감아준 것이 드러났다.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였다. 3월에는 교통사고로 위장한 희대의 정치스캔들인 정인숙 피살사건이 터졌다.

이 세 개의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서 금기어였다. 언론통제도 심했기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백기완은 그해 생중계되는 TBC방송(동양방송)에 출연해서 "대망의 70년대라는 박정희의 구호는 거짓이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그것이라, 와르르 와우아파트 사건, 탕탕탕 정인숙 살인사건"이라고 박정희 정권을 정면 비판했다가 방송출연 금지를 당하고 쫓겨났다

1971년에는 <항일민족론> <항일민족시집>을 펴냈다. 4월 대선에서 박정희가 당선되자 백기완은 "돈과 폭력으로 거짓부린 뽑기(선거)이니 다시 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백기완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때 유신을 깨뜨리기 위한 취지문을 신발 깔창 밑에 감추고 찾아가서 읽어보라고 한 뒤 비밀리에 서명을 받았다. 함석헌,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안병무, 지학순, 백낙준, 김찬국, 계훈제 등 서른 명의 명단을 직접 모았다.

1973년 12월 24일에는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선언문을 낭독했고 이틀 뒤에 서명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항일민족문학의 밤'도 조직했다. 이 자리에는 장준하,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신경림, 염무웅, 이호철, 강민, 이문구, 박태순, 신기선, 김민기, 김영동 등과 일
반 시민도 많이 참석했다. 마이크를 잡았을 때 갑자기 전기 불이 꺼지자, 백기완은 이렇게 외쳤다.

"아마도 청와대도 불이 나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다 성냥과 손가락을 갖고 있지요? 손가락이 없으면 염통(심장)을 꺼냅시다. 거기다가 불을 대고선 청와대로 우리 불 밝히러 갑시다."

이 행사를 계기로 현재 한국작가회의의 태동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됐고 '민족문학의 밤'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문화운동은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투쟁의 하나로 정착 돼갔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다. 독재정권의 악랄한 폭압 정치가 본격화됐다. 백기완은 이 조치를 비판하면서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박정희 유신 타도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됐다. 함께 감옥에 갇혔지만 이때에도 장준하 선생은 백기완을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당시 수사 검사가 백기완에게 전해줬다는 장준하 선생의 말이다.

"백기완이 계속 때리면 나 조사 안 받겠다. 백기완이는 고집이 세서 맞아 죽을지언정 하던 일 절대로 안 분다. 그러니 그만 때려라. 왜냐, 백기완은 민족문화, 민중문화의 보고다. 그 사람 때려죽이면 우리 민중문화, 민족문화가 없어지는 거다."

평생 동지를 잃다… "날카로운 도끼 자국에 온몸 떨었다"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명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1918-1975)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
▲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명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1918-1975)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
ⓒ 통일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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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은 1년 남짓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을 받고 다음 해인 1975년 2월에 2·15 석방 조치로 풀려났다. 이로부터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4월 초 또다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인혁당 관련자 여덟 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 뒤 풀려났다. 백범사상연구소는 그해 강제 폐쇄를 당했다.

백기완은 평생 동지였던 장준하 선생과 함께 월남전 패전을 국내 반공 선풍으로 악용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음모를 폭로했다. 1953년 당대 지식인 사회의 등불이었던 월간지 <사상계>를 창간했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도 곧은 소리를 내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했던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인물이었다.

항상 독재정권으로부터의 테러 위협을 느꼈던 장준하 선생은 평소 백기완에게 "만약 내가 죽거들랑 무덤일랑 쓰지 말고, 통일이 소원이니 북쪽을 향한 논밭에 한 줌 거름으로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해 백기완은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의 큰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백기완은 곧바로 약사봉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권은 실족사라고 밝혔지만 명백한 타살이었다.

"선생의 머리를 들다가 오른쪽 귀 옆에 날카로운 도끼 자국을 보고 나는 온몸을 떨었어. 네놈이 끝내 멱빼기(암살)를 했구나. 그것도 끔찍한 마구 죽이기(학살)로. 그때 장 선생의 나이 오매 쉰일곱. 나는 여섯 달 동안을 내리 울었어."

백기완에게는 장준하 선생과 함께 추진했던 일이 많았다. 당시 장례를 주관하다가 문상을 온 문익환 목사에게 장준하 선생과 준비하던 일 중의 하나를 부탁했다. "장 선생이 일을 추진하다 원통하게 돌아가셨으니 문 목사가 대신 앞장을 서보시라"고 권유해서 이듬해까지 준비해 결국 3·1 구국선언을 성사시켰다.

"문익환 목사가 처음으로 감옥 가기 며칠 전에 나하고 약속을 했어. 내가 하던 일을 문 목사가 대신하기로 했어. 술 한 잔을 샀지. 명동 들머리 맥주집이야. 내가 신발 뒤꿈치에 붙어있던 문건을 줬어. 민어 고기 뱃속에 있는 거를 끓이면 끈끈이 '가풀'이 되는 데 그걸로 붙인 게 3·1 구국선언문 초안이야.

'영감, 이거 읽어보고 낱말이 무서우면 영감 투로 고쳐'라고 했지. 그것 때문에 문 목사가 처음으로 감옥 갔어. 장준하 선생과 내가 그걸 준비했는데, 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거야. 암살당한 거지. 문 목사는 그 사건을 계기로 그 뒤 싸움에 나섰다 한가위를 여덟 번이나 감옥에서 지냈지."
 

 1992년 12월의 마지막 날. 대통령선거의 아픔을 딛고 <장산곶매 이야기> 글을 쓰고자 강원도 오대산을 찾았다
▲  1992년 12월의 마지막 날. 대통령선거의 아픔을 딛고 <장산곶매 이야기> 글을 쓰고자 강원도 오대산을 찾았다
ⓒ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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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에 대한 원칙을 천명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신민당과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 전복 선동 혐의로 대량 구속했다. 그 뒤에도 백기완은 장준하 선생 추도식 준비위 대표를 맡아 25년간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해 강제 폐쇄됐던 '백범사상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77년에도 통일문제에 관한 발언을 하다가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했다. 백기완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 싸우면서도 노동운동에 주목했다. 그해 백범사상연구소 이름으로 노동운동에 관한 번역서 <원저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미국 노동운동 비사>(전5권. 74~79년까지)를 출간했다. 또 <씨알의 소리> 잡지에 딸에게 주는 공개 편지 형식의 글을 써서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뒷날 이 글을 모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수필집을 냈다.

1978년에는 민주주의청년협의회를 결성해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선생 등과 함께 고문을 맡았다. 당시 백범사상연구소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공동으로 민족문학의 밤을 주도했다가 또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보름 동안 엄청난 시달림과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이 글은 제휴매체인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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