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020년 12월 16일 <불교닷컴>에 ‘고 이건희 회장 사십구재와 후손의 몫’이라는 글을 통해 삼성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상감초화문편병(국보172호)’ 등 몇 점의 편병과 문양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삼성가가 수집한 유물의 공개를 제안했다.
옛 문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고구려 고분 등에서 연꽃 문양이 나타나고 있어서 그 연유가 무엇일까 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몇 해 전부터 의혹이 해소되고 있다. 지난번 글에 이어서 같은 번호의 국보인 묘지판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1년 경남 거창군 북상면에 있는 한 사방공사장(토사방지 조림)에서 인부들이 진양군 영인 정씨의 무덤을 개묘했고 여기서 몇 점의 백자가 출토되었다. 자세한 이동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이 유물들은 최종적으로 삼성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석 점이 국보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의 주인공인 진양군 영인 정씨는 1466년(성화2년)에 언양현에서 사망했고 유물이 발견된 곳은 거창군 북상면임을 알 수 있다. 백자상감묘지(白磁象嵌墓誌)는 세로 38.6㎝, 가로 20.4㎝이며, 사찰의 위패 모양으로 아래는 연꽃, 상부는 연엽 또는 구름무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묘지판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사정빙지녀거단성 |
고사(庫使)를 지낸 정빙(鄭憑)의 딸이 단성(丹城)에서 살다가 |
적판사김공효로 |
판사(判事)를 지낸 김효로(金孝老)에게 시집을 갔으며 |
생이남사여 |
2남 4녀를 낳았다. |
기일녀왈겸예문봉교김구처 |
그 1녀는 예문봉교(兼藝文奉敎)를 지낸 김구(金龜)의 아내이다. |
기일남왈부사당 |
그 1남은 부사(副使)를 지낸 김당(金溏)이다. |
기이녀왈통찬이수산처 |
그 2녀는 통찬(通贊)을 지낸 이수산(李壽山)의 아내다. |
기이남왈언양현감윤 |
2남은 언양현감을 지낸 김윤(金潤)이다. |
기삼녀왈신녕현감박윤빈처 |
그 3녀는 신령현감을 지낸 박윤빈(朴允斌)의 아내다. |
기사녀왈대경정수덕처 |
그 4녀는 대경(大卿)을 지낸 정수덕(鄭守德)의 아내다. |
세재성화병술 |
때는 성화(成化) 병술년으로 |
윤위언양재종래 |
김윤(金潤)이 언양의 수령이 되니 같이 와서 |
시년십일월이십일일기축 |
이해 11월 21(기축)일에 |
이병졸우시읍장우차 |
병으로 이 읍에서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사를 지내다. |
김씨즉가락김수로지후예야 |
(남편)김씨는 가락 김수로의 후예이다. |
고 최순우 선생은 그의 전집 중 ‘국보172호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 유물’ 부분에서 묘지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이 묘지판(墓誌板)은 성화(成化)2년 겨울에 당시의 언양 현감 김윤(彦陽 縣監 金潤)이 자기관하(自己管下)의 언양(彦陽) 가마에 주문해서 구워 냈으리라는 것은 그 격조있는 양식이나 당시 묘지(墓誌)로서는 보통 이상의 큰 칫수 등으로 미루어 능히 짐작이 간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그 해 섣달 까지 구원 낼 겨를이 없었다면 늦어도 이듬해 청명(淸明) 사초 때 까지는 이것이 구워 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끝 구절에 ‘김씨즉가락김수로지후예야(金氏則駕洛金首露之後裔也)’ 를 첨가한 것을 보면 이것은 아마도 정씨(鄭氏)의 남편 김효노(金孝老)가 먼저 죽어서 고향에 있는 김효노의 무덤에 부장(附葬)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묘지(墓誌)가 출토된 곳이 거창군(居昌郡)인 것을 보면 거창(居昌)에 그 집안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최순우 전집)
이 묘지명을 보면 아들 딸 구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을 했고, 영인 정씨는 막내 김윤(金潤)이 언양 현감으로 부임하자 부임지에 같이 와서 살다가 병환으로 사망했으며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장남이 아닌 차남이 어머니를 모셨다.
묘지명의 크기나 그 형식 및 내용이 고위직을 지낸 남성의 것 이상으로 제작했고 작품성이 탁월한 편병까지 부장을 했다. 또 남편에 대해 ‘김씨즉가락김수로지후예야(金氏則駕洛金首露之後裔也)’라 하여 김수로왕의 후손임을 밝혔다.
고 최순우 선생의 의견과 같이 겨울철이고 제작에 15일 이상 걸리는 묘지명이라는 점에서 사후에 제작해서 이듬해 사초 시에 무덤에 넣었고 이후에 언젠가 거창군으로 이장을 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문장 가운데 ‘병으로 이 읍에서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사를 지내다(以病卒于是邑葬于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려인 필자가 굳이 이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묘지판의 상하 장식이 연꽃무늬의 위패 모양으로 되어 있어 망자가 불자이거나 유족이 고인의 극락왕생을 발원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조선 초 민가에서도 불교문양을 사용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소위 복위(伏爲)로서 자녀들에 대한 상세한 나열도 주목의 대상이다. 편병을 재차 살펴보기로 한다.
위 사진 중앙의 백자상감초화문편병(국보172호 / 삼성문화재단소장 / 사진출처 : 문화재청))에 대한 문화재청의 소개를 보면 “흑색 상감으로 모란과 덩굴무늬를 그려 넣었다”라 하고 있으나, 중앙에 겹으로 된 원 안에 있는 무늬가 넝쿨로 보기에는 어딘지 미흡하다.
이 분야를 연구한 소수 학자의 글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을 해 보면 중앙의 겹원은 천문(天門)을 나타내며 그 안쪽의 세 개의 원은 구름이 생성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천문을 뚫고 위쪽을 향해 꼬불꼬불한 모양으로 빠져나간 실선은 마치 식물줄기의 모양과 같다. 그 안에 대기 중인 두 개의 원도 종국에는 천문을 뚫고 나와서 구름 혹은 모란이나 풀잎이 되는데, 이를 일각에서는 영기화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외곽에도 원을 겹으로 그려서 우주(하늘)를 표현했다. 그 천문에서는 큰 기(氣/구름)가 넝쿨모양으로 이미 생성되었다.
리움미술관 소장은 ‘令人’으로 돼 있는데 본 항아리에는 ‘人’자가 ‘大’로 표기되어 있으며,‘適判事金公孝老生’이란 글귀가 본 항아리에는 ‘適判事公金孝老’라 해서 ‘金’자와 ‘公’자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또한 리움미술관 소장본에 있는 마지막 글귀 ‘金氏則駕洛金首露之後裔也’가 없는 것이 상이점이다.
옛 사람들은 세상을 경계가 없는 커다란 하나의 그릇으로 인식했다고 보는데, 도자 그릇에도 그러한 의미에서 문양을 새기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아직은 대대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론이나 편병 자체가 하늘과 땅이라면 이 문양은 구름(비)과 만물의 생성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민족 고유의 원시 세계관과 망자의 극락왕생 등 내세를 발원하는 불교적 세계관이 혼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국보 석 점이 애초의 발굴지 관할인 거창군박물관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모든 유물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이 아니다. 1971년에 발굴된 것으로 불과 50여 년 전 일이고 그 출처가 확실하기에 거창군으로 돌아갈시 고인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적 이야기가 전개되는 등 지역문화의 활성화에도 큰 기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백일 제사를 지낸 고 이건희 회장의 이름으로 거창군에 기증을 한다면 삼성과 리움미술관의 아름다운 기증이 될 것이며 사회적 평가도 긍정적일 것이다.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좋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