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을 읽는 불편함
구약성경을 읽는 불편함
  • 허정 스님/전 천장사 주지
  • 승인 2020.12.31 12:22
  •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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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스님/전 천장사 주지
허정 스님
허정 스님

인터넷 속에는 각 종교의 경전(經典)들이 소개되고 있다. 문서로서만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경전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해놓아 운전하면서도 산책하면서도 경전을 듣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성경은 PC용이나 스마트폰용으로 사용하도록 다양한 앱(app)과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 있는데 불교 경전을 읽거나 들을 수 있는 사이트는 초라하다.

예를 들어 숫따센트럴(https://suttacentral.net)이라는 웹 사이트에는 빠알리 경전과 그 경전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과 스리랑카어 미얀마어 태국어 베트남어 일본어 인도어 등의 번역을 올려놓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아직 없다.

검색을 하다가 유튜브(YOUTUBE)에 올라온 <성경>을 듣게 되었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닌 적은 있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본 적은 없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접하게 되는 성경은 많은 감정들을 일으킨다. 여기에 오랜만에 읽게 된 구약성경에 대한 나의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창세기의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창1:1)로 시작한다. 내가 어릴 적에 교회에 다닌 적은 있지만 끝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신의 창조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은 불합리했다. 다행스럽게 불교는 믿음을 첫 관문에 두지 않았다. 부처님은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깔라마> 경(A3:65)에서 부처님은 어떤 종교나 교리를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분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따르지는 말라. 그러나 깔라마인들이여, ‘이러한 가르침은 유익한 것이고, 이런 가르침은 지자(知者)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면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것들을 받아들여라.”

나는 십대후반에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 때문에 교회와 성당을 찾았다. 믿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 후 방황하다가 사찰을 찾게 되었고 부처를 만나게 되었는데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태초를 말하지도 않았다.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다.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윤회하는 동안 마신 어머니의 젖이 사대양(四大洋)의 바다의 물 보다 더 많다”(S15:4)며 우주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말한다.

태초라는 지점을 설정하는 성경은 태초를 설명해야 하는 책임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지구의 나이는 육천년~만이천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고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이라고 하니 성경은 처음부터 과학적 사실과 부딪치게 된다. 만약 태초가 만이천년 전이라면 지구에서 발견되는 화석과 운석 등의 고고학적인 사실과 맞지 않고, 태초가 138억년이라 하면 우주와 생명(인간)이 탄생하는 시간 차이가 너무 크다. 불교는 태초를 말하는 대신 “우주가 지속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D2)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그들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7~28)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생명보다 우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내가 창조한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버렸다”(창6:5~7)라는 구절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온갖 동물들이 몰살당한 사실이 있음을 말한다. 이유도 모르고 죽어야하는 동물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요 동물의 목숨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것 같아 불편하다.

전지전능하여 우주와 사람을 창조했다는 신이 자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을 한탄했다는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한다. 노아에게 방주 만들기를 명령하며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창7:2~3)는 구절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의 종류가 백오십만종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는 일만 사천 여종, 거미는 삼만 여종, 새는 일만 이백 여종, 지네는 팔천 여종, 개구리는 오천 칠십 여종, 뱀은 이천 구백 여종 등인데 노아가 그 많은 생물들을 하나의 방주에 암수대로 모은 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숫따센트럴의 검색 화면.
숫따센트럴의 검색 화면.

<법구경>에서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신에게 견주어 남을 해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된다.”(<법구경>129번)라고 말하듯 불교는 모든 생명들의 가치를 동등하게 본다. ‘전생담’에 부처님이 사냥꾼에 쫓기는 비둘기를 살리려고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내는 장면에 불자들은 감동하고 그런 평등한 자비심을 발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이 사람들과 동물들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죽인다.

불자들이 볼 때는 여호와라는 신은 인간의 호기심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놓은 동시에 여자를 유혹할 줄 아는 뱀도 창조해 놓고는 오로지 선악과를 먹은 책임을 인간에게 묻는다. 또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7)라는 생각으로 도시를 만들고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하나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인간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의 호기심과 인간의 이성은 수많은 발명을 이루어 냈고 과학문명을 발전시켜왔다. 부모의 마음으로 인간의 호기심을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고 한 번의 행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단죄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시는 자신의 친척들을 칼로 삼천 명이나 죽이고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으니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32:29)라고 말하는 대목도 소름 끼친다. 나와 다른 신앙을 가졌다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상대방을 죽이고 그 행위를 칭찬하고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대목을 현재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들, 간음과 배교에 대한 영적 세력들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있는 죄악들에 대해 심판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해석을 보니 기독교인들에 의해 사찰이 불타고 불상의 목이 절단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실제로 1993년부터 2017년까지 기독교인에 의한 훼불사건이 407회나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불교신자가 교회나 성당에 가서 성물을 부수고 방화를 했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불자들의 인욕과 자비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역을 지나갈 때 출가수행자인 나에게 다가와서 ‘예수 믿으라!’ 고 끊임없이 강요하는 무례를 저지르면서도 너무도 당당해 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러한 성경구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오랜만에 읽은 구약성경인데 창세기를 읽는 시간은 불편하였다. 우주를 창조하고 지구의 모든 동물과 식물 등 생명들을 창조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신(神)이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그렇게 참을 수 없어하고, 자신만을 위해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자신을 섬기지 않으면 저주하고 죽이는 행위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약속하여 지금까지 분쟁의 땅이 되게 한 것이 과연 축복일까? 전지전능하여 우주를 창조한 신이 유독 아브라함 자손들에게만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예언하고 질투하는 것을 보아내기가 힘들다. 인간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신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 신에게는 인간의 입장, 생명들의 입장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독선(獨善)이 보일뿐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구약과는 달리 신약성경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이 발견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2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27~31)

이렇게 자비롭고 지혜로운 예수님의 사상과 구약에서 나타나는 신의 포악하고 냉정함이 어떻게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이 그런 창조주를 인정하고 스스로 아들이라고 자처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불교 안에도 시대차이를 두고 나타난 초기불경과 대승경전이 존재하고 그 차이 때문에 교리적인 논쟁이 일어나곤 한다. 대개는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는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은 너무 다르다. 구약은 상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경을 해석하는 목사들의 설명을 보면 기독교 내부에서조차도 상징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읽는 시간은 결코 ‘나를 따르라’ ‘나를 믿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신선하고 매력적인가를 다시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불교는 날카로운 이성(理性)의 자유를 허락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을 장려한다. 의심과 질문이 진리를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지만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에서는 불교의 모습은 초라하다. 종단은 시급히 초기경전 판권을 구입하여 인터넷에 올리고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을 위한 드라마 경전, 청소년을 위한 오디오 경전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느낀 나의 답답함을 두고 이미 불교에 빠져버린 사람의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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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스님 2021-01-08 12:02:56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스님 늘 건강하시고. 위기에 처한불교 온몸으로
지켜내시느라 힘드시죠
사악한 댓글에 절대 상처 받지 마시고 꿋꿋 이
스님 은 조계종을 지켜 내리라고 붑니다
스님 힘내십시요
불교가 다시 힘 을내어 일어서는 그날까지 ㆍㆍ

선각 2021-01-05 09:05:11
우리나라는 이제 무종교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제는 스님이던 목사던 신부던 아무리 좋은말로 떠들어 봐야 관심없다~~ 속으로 너나 잘 사세요 한다~~^^

기독교 종립방송 2021-01-06 23:49:01
입양아 학대 살해사건 가해자 양부모가 기독교 종립방송 종무원이었다니 놀랍다.

큰별이 진다고 한디 2021-01-08 11:55:10
댓글 이 왜 이래?
왜? 지멋대로 삭제돼야?
이기적인 인간들이 현학적인 말장난은 잘 늘어 놓제
소록도에 평생 을 나병환자 간호한 외국인 간호사들 그분들은 살아 있는 천사야
그분들은 자신 이 가장행복했던 때가 바로 소록도에서 봉사할때였다고 한다
그런분들은 살아있는 천사야
우리 인간은 그런분들 의 행동 을 잘 지켜 보야해
말장난만 일삼는 인간들은 그분들의 발뒤꿈치
때만도 못한 ㆍㆍ
문제인 대통령님 힘내시고요 끝까지 임무완성하시고 절대 나쁜 마음 가지지 마세요
꿋꿋하게 살아 서 이나라 이강산 지켜내는걸
보십시요

그림자 2020-12-31 17:44:34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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