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설립·조선불교선종 선포, 한국불교 정체성 회복 노력
재단법인 설립·조선불교선종 선포, 한국불교 정체성 회복 노력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0.12.01 21: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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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제10회 학술상 수상작 ① - 우수상(양현상)
오경후 ‘1935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과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
▲ ‘제10회 한국불교선리연구원 학술상’ 양현상(우수상) 수상자인 오경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가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제10회 학술상 양현상(우수상) 수상작인 ‘1935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과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는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을 분석해 1935년 3월 7일과 8일 이틀 간 선학원(당시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의 성격과 가치를 규명한 논문이다.

선불교 중흥 노력 현대 한국불교 본질 규명 실마리

오경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해방 이후에는 일본불교 잔재 청산과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구가 미진했던 선학원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복원을 시도했다.

오 교수는 이 논문에서 1930년대 선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선학원의 노력에 주목했다. 1931년 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다시 일으킨 후 1934년 재단법인 인가, 1935년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 창종, 1941년 유교법회로 이어지는 1930년대 선학원의 활동이 현대 한국불교의 본질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오 교수는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이하 선종수좌대회)는 선학원 설립이념 뿐만 아니라 실제적 운영을 제시하고 조선불교선종을 탄생시킨 대회였지만, 지금껏 면밀히 검토하고 가치를 규명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 교수는 논문에서 먼저 1935년 3월 7일과 8일 이틀간 개최된 선종수좌대회의 배경을 살폈다. 오 교수는 선종수좌대회가 1921년 선학원 설립과 1922년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 적음 스님의 1931년 선학원 중흥조 이후 개최된 여러 수좌대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선종수좌대회, 선불교 수행과 운영 실제적 체계 갖춰

오 교수는 1934년 12월 5일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이하 선리참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고, 같은 달 23일 열린 이사회에서 “선종 부흥의 기운이 왕성해지는 것을 본받아 수좌대회를 열고, 선종의 근본적 독립 발전을 도모할 것”을 결의한 것에 주목했다. “이른바 ‘선종의 근본적 독립발전’은 선리참구원이 재단법인 인가를 받고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 교수는 “선불교의 독립과 수좌들의 수행 환경 향상을 위한 자립 시도가 1922년 선우공제회를 조직한 이후 이미 본격화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청정비구승들이 먹고 자는 것을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립자활의 도가 아니다. 세태를 원망하기보다는 자립의 활로를 개척해서 대도(大道)를 천명해야 중생을 이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황용음(黃龍吟), 백학명(白鶴鳴), 오성월(吳惺月) 등 선우공제회 발기인 35명〕의 과제였다.”는 것이다.

창립 초기 여러 선원과 선우(禪友)의 적극적인 참여로 재정이 안정되자 선우공제회는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법적 보호를 받고자 했다. 선우공제회는 1923년 설립허가원을 냈지만 선학원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한 조선총독부의 무성의로 번번이 좌절됐다. 재단법인 인가가 난 것은 10여 년 뒤인 1934년 12월 5일의 일이다.

▲ 오경후 교수 발표 모습.

‘선종’ 종명, 한국불교의 독자성과 정통성 계승 표방

1931년 선학원을 인수한 적음 스님은 그해 3월 23일 전선수좌대회(全禪首座大會) 등 세 차례에 열린 수좌대회에서 결집한 수좌들의 의견을 모아 당시 불교계 대표기관인 교무원에 중앙선원을 설치하고, 청정비구승이 수행할 도량을 마련해 줄 것 등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이런 노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종수좌대회는 선불교 중흥을 목적으로 수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즉, 선종수좌대회는 선종의 근본적인 독립을 도모하려고 개최한 대회였고, 수좌들의 수행 환경을 법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재단법인 설립하려 한 것이나 독신비구승 수행도량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은 선종의 독립을 위한 구체적 행보였다는 것이 오 교수의 분석이다.

오 교수는 선학원이 재단법인 인가를 받아 선우공제회를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개칭하고, 1935년 선종수좌대회를 열어 종명(宗名)을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으로 칭한 것에도 주목했다.

당시 불교계는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을 표방했는데, 이것은 1929년 30본산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주지회의원이 채택한 종명이다. 이 종명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暢)가 제안한 안이다. 와타나베의 안은 불교 탄압으로 태종대에 종파가 11종에서 7종으로, 세종대에 다시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통합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조선불교선교양종’은 당시 불교계에서도 종명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조계(曹溪)’나 ‘임제(臨濟)’를 따르지 않아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이름으로 논란되었다.

반면 1910년 10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던 조동종맹약(曹洞宗盟約)을 반대해 임제종운동을 전개한 핵심인사들이 설립한 선학원은 그 정신을 계승했다.

이런 당대 현실에서 선종수좌대회가 ‘선종’이란 종명을 표방한 것은 조선불교의 연원이 선불교에 있음을 밝히고, 총독부와 결탁한 30본산연합사무소와 성격을 달리해 조선불교계의 독자성을 천명하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앙선원 청규, 왜색불교 척결․선종 정체성 확립 노력

오 교수는 선종수좌대회에서 재단법인 인가에 따른 후속 조치와 조선불교 선종 선포를 통해 선불교의 자주적인 발전을 천명하고 수행과 운영을 위한 실제적인 체계를 갖추었다고 보았다.

선종수좌대회는 종헌인 ‘조선불교선종종규(朝鮮佛敎禪宗宗規)’와 승려법규, 포교법규, 신도법규 등 각종 법안을 제정하고, 중앙선원 청규와 의제·의식 제정, 기관지 발행 등을 결의했다. 또 종단의 크고 작은 현안을 다루는 종회 격인 선회(禪會)와 선회를 대표하는 선의원회(禪議員會), 종무원(宗務院)을 두도록 했는데, 이들 기관은 수좌들의 수행을 외호하는 사판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근간이 됐다. 특히 선종의 종무와 제반 사업을 관장하는 전국 선원의 단일 기관으로 설치된 중앙종무원은 재단법인 운영과 관리까지도 담당했다.

오 교수는 “선종수좌대회에서 제정한 여러 법규와 선회, 선의원회 구성 등은 근대불교계에서 선학원의 이념과 수행체계가 지닌 독자성을 살필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선수행 대중화 노력, 부인선원 설립운영으로 이어져

그렇다면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는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오 교수는 “선학원의 재단법인 설립과 조선불교선종 선포는 한국근대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평가했다.

조선불교선종은 창종 이후 불교계 변화를 주도했다.

우선 조선불교선종은 선포 이후 선리 참구를 통한 건전한 신앙을 확립하고 선방 증설과 수좌 대우 개선 등을 독려해 선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중교화를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결과 선학원이 재건된 1931년 4개 사찰에 불과하던 선원 수는 1935년 선종수좌대회 직후 45개 사찰로 늘어났다. 안거 대중 역시 1932년 212명에서, 1935년 329명에 증가했다. 오 교수는 “안거 대중 수가 늘어난 것은 수행환경을 향상시키려는 선학원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선리참구원은 또 법인의 재정과 선원 수 안정화를 위해 진력하는 한편, 선원 수행지침을 제정해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천명하고 수행의 대중화를 노력했다. 그 사실은 중앙선원 청규 제정과 양로선원(養老禪院) 창설, 부인선원(婦人禪院) 운영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로 승려 위해 창설 양로선원, 수행자 노후복지 선구

오 교수는 “중앙선원 청규는 일개 선원의 청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식육 금지와 남녀 좌석 구별, 좌선이나 공양에 응할 때 법복을 입도록 한 청규 5, 6, 7조는 대처식육으로 대표되는 왜색불교를 엄격히 금지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재확인하려는 노력이자 선원이 선종의 정체성 확립과 선종 부흥을 구현하는 실천의 장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원로 승려를 위한 양로선원을 창설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양로선원은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독자성을 굳건히 유지하려는 의도 외에도 수행자 노후복지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지적이다.

선리참구원이 선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오 교수는 그 실례로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 결성과 부인선우회(婦人禪友會)를 주목했다.

선학원 연구, 일제하 불교의 다양성과 위상․가치 평가하는 기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자력수행으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고자 한 부인선우회는 중앙선원 일부 공간에서 시작해 가옥을 마련한 후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으로 독립했다. 중앙선원 부인선원은 지방까지 확산돼 표훈사에 부인선원이 개설되기도 했다.

오 교수는 “부인선원 개설은 일제하 불교계에서는 유례가 드문 사례”라며, “부인선원 개원은 기복불교만을 강조했던 불교 이해와 신앙 양상이 선불교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끝으로 논문의 결론 삼아 “선학원 연구는 단순히 선학원 차원에서 머무를 수 없는 근대불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설립이념과 참여했던 인물들은 시세를 거슬렀고, 동시대에도 주목받지 못했었다. 때문에 선학원 연구는 일제하 불교사의 다양성을 살피고 그 위상과 가치를 평가하는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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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학자십니다 2020-12-02 12:17:37
기복범계 불교종단 띄워주는 어용학자들과 비교되는
양심적인 큰교수님의 큰행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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