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승려공동체인 승가는 밀림의 사자에 비유하기도 하며 법문하는 큰 스님의 가르침을 사자후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승가공동체를 과연 사자의 무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전 입법기구에 해당하는 중앙종회의원 정운 비구니 스님은 불교신문에 기고한 ‘전국비구니회를 보는 비구스님들의 인식’ 이라는 칼럼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을 임의단체”라고 했는데 총무원은 “종단을 폄훼한 심각한 해종행위”라며 중앙 종회에징계동의안을 제출하여 논란이 되었는데도 함께 의원활동을 하는 아홉 명의 비구니 스님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 동료의원을 지켜주지 않았다.
이번 해인사 세미나에서 선원장 효담스님은 발제문에서 방장이나 조실스님의 법문을 대신할 소참 시간을 가져야 하고, 독참을 대신해 하루에 한번 조사어록을 강독하는 별도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운영하고, 대중이 서로 공부한 것을 들려주고 공부한 것을 물어보는 ‘안목교환’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하고, 하루 8시간 이상 좌선하는 집단 수행으로서의 좌선문화를 줄이고 개인의 자율 수행으로 수행공동체의 정체성을 되찾아 올바르게 수행하자며 네 가지를 제안했는데 해인사는 용맹정진 가풍과 다르다며 선원장직책을 내놓으라고 해서 결제가 임박한 상황에서 효담스님은 내쫒겨났다.
그런데도 세미나를 주최한 수좌회는 선원장 스님을 지켜주지 않았고 아직도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부당하게 징계를 당하면 문중의 어른스님이나 사형사제라도 모여 징계가 적법한지 논의라도 하자며 지켜주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사자의 무리라고 할수 있는데 역시 침묵으로 일관 지켜주지 않는다
늑대나 승냥이들은 외부의 침입으로 위협을 느끼면 떼를 지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서로를 지켜주려고 사투를 벌이는데 지금의 승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마치 초원에서 동료가 맹수에게 잡혀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가도 그져 그 옆에서 풀이나 뜯고 있는 보기 좋은 두 개의 뿔을 가진 방긋방긋 콧김이나 내뿜는 점박이 사슴떼와 같다고나 할까!
부모형제를 떠나 자유인이 되겠다고 출가한 승려가 젊었을 때는 세속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산중에서 30여년을 수행하여 지혜를 계발하고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사자후를 토해낸다고 하지만 60이 넘어 지나온 세월보다 죽음을 향해가는 세월이 적은 줄도 모르고 자기검열에 빠져 앞뒤를 재며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눈을 힐끔 힐끔 옆을 살피며 자신이 토해내는 소리가 사자후가 아닌 사슴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산중에 사자후가 사라진 후
멀리서 사슴의 곡소리 난무한데
사자 가죽을 둘러쓴 늑대가
사슴의 뿔을 아름답다 하네
조선 500년 왕조는 망했어도
머리깍은 궁녀는 아직 남아
박상궁 김상궁 갑질로 일삼는데
내시가 옷자락 끌며 눈짓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