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매 법상
대매 법상
  • 강호진
  • 승인 2020.09.2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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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매실의 맛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갈증과 피로로 지친 병사를 북돋우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얘들아, 조금만 더 가면 매실나무 밭이야. 거기서 마음껏 매실을 따먹으렴.’ 이 이야기는 망매지갈(望梅止渴)이란 고사성어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주인공은 조조가 아닌 사마의의 손자이자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연의》보다 훨씬 앞선 《세설신어》에 사마염이 오나라를 치러가던 중 지친 병사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연의》의 편집자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걸까? 아마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사가 사마염보다는 조조의 캐릭터에 더 잘 어울리고, 대중이 그렇게 믿더라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 또한 대개 이런 작동방식을 통해 기록되고 전파된다.

선불교에도 매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이가 있다. 법호부터가 ‘큰 매실’인 대매 법상(大梅 法常, 752~839) 선사이다. 속가의 성(姓)이 정(鄭) 씨이니 자꾸만 ‘매실 정’이라 부르고 싶어지는 인물이다. 그가 선종사에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는 마조가 그를 두고 평한 한마디, ‘매실이 잘 익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조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을까? 나는 법상의 탁월한 선기(禪機)나 사상을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만의 것이라고 특정할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매 법상의 일화는 선불교가 어떻게 심심한 이야기와 평범한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들고 특별하게 부각시켜 전파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예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매실과는 관련이 없던 한 선사가 어떻게 잘 익은 매실(깨달음)의 맛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는지 추적해보는 데 의의가 있다. 남아있는 대매 법상의 일화와 행장 가운데 가장 이른 기록은 《송고승전》이다.

796년 법상 선사는 천태산에서 명주(明州) 남쪽 70여 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매복(梅福, 梅子眞)이 은거하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호를 매산(梅山)이라 짓고, 허름한 초막을 지어 40년 간 은거하였다. 836년에 사원을 세우자 깨달음에 대한 의심을 풀려고 갑자기 몰려든 승려의 수가 600~700명이 되었다. 839년에는 법상이 병을 얻어 9월 19일 대중과 이별하였다. (중략) 일찍이 법상이 매령(梅嶺)에 은거해 있을 때 한 승려가 지팡이를 구하려고 산에 들어왔다가 그를 본 후, 염관 제안(鹽官 齊安) 선사에게 그 일을 아뢰자 염관은 “매실이 익었구나. 너희는 그에게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이 글은 연월일(年月日)이 명기된 비교적 신뢰할만한 기록이란 것, 둘째 법상이 스스로 지은 매산(梅山)이란 호는 전한(前漢) 시대에 그곳에 은거하던 한 유학자의 성(姓)에서 유래했다는 것, 셋째는 초막을 짓고 숨어살던 법상이 말년에 갑자기 사원을 세우고 제자를 받은 데는 법상의 사형(師兄)인 염관 선사의 평가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용이 소략하다보니 법상의 인물됨이나 법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법상과 지팡이를 구하러 온 승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도 알 길이 없다. 《조당집》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창작해서 그 만남의 공백을 메꾸었다.

승려가 법상에게 물었다.

“스님께선 마조 스님으로부터 어떤 법을 얻었습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이네.”

승려는 이 말을 염관에게 가서 일렀고, 염관은 “요즘 마조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고 가르치신다고 그에게 전하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법상은 “그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곧 부처라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염관은 “서산에 매실이 익었구나. 그대들은 마음껏 따먹어도 좋다.”고 했다.

《조당집》은 《송고승전》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조의 권위를 빌려서 법상을 시험하는 대목이 있지만, 시험을 내고 ‘매실이 익었다.’고 평가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염관이다. 그리고 대화를 가공하는 데 있어서도 법상이란 법명을 적극 활용했다. 흔히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법상(法常)은 선(禪)의 정신으로 보자면 마음이 곧 부처인 상태이자, 늘 여여(如如)한 진리의 자리를 표방한다. 법상이야말로 ‘비심비불(非心非佛)’이란 바람에 흔들릴 이유도 없고, 흔들려서도 안 되는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전등록》의 편찬자는 다소 헷갈리는 이야기를 매끄럽고 직선적인 구조로 변형시켰다. 문제 제출과 평가의 주체를 염관에서 마조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전등록》은 마조가 승려를 통해 ‘비심비불’이란 말로 법상을 시험하고, 법상의 답변을 듣고선 ‘매실이 익었구나〔梅子熟也〕.’라고 평한 것으로 기록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788년에 입적한 마조가 796년부터 매령(梅嶺)에 숨어산 법상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등록》의 편찬자는 이 사실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알았다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후대의 선사 가운데 누가 이런 디테일을 따져가며 선서(禪書)를 읽겠는가. 받아들이는 대중 입장에서도 남종선의 보스인 마조가 등장해서 제자를 시험하는 이야기가 훨씬 즉각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대매 법상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면 《전등록》 버전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딱 두 가지만 짚고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이 일화는 법상의 이름을 빌려 남종선의 정신을 드러낸 우화라는 것, 그리고 그 맛에 관해서라면 ‘매실 정’의 이야기가 매실청만큼이나 맛깔스럽다는 것.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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