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년 전, 도쿄아사히신문 호외의 진실
126년 전, 도쿄아사히신문 호외의 진실
  • 법응 스님
  • 승인 2020.07.16 13: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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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朝日新聞' 号外. 1894년 7월 24일(明治二十七年七月二十四日)자
'東京朝日新聞' 号外. 1894년 7월 24일(明治二十七年七月二十四日)자

 

1894년 7월 24일 일본의 동경 등 주요 도시에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의 호외가 뿌려진다. 아시아에 전운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날조된 기사의 호외였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본의 통치세력과 이에 부화뇌동한 언론이 독자와 역사를 속이고 조선군이 일본군을 선제공격했다는 각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윤전기를 돌렸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조선 국정의 중심을 무력화시킨 일대 사건이다. 당시 일본은 청군이 6월 6일에 아산만에 상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병을 결정하고 선발대를 6월 6일 오후에 출발시켜서 같은 달 12일 오후 인천에 상륙한다. 그리고 도쿄아사히신문은 타 언론사보다 먼저 야마모토 주스케(山本忠輔)를 조선에 특파한다. 이 호외 기사는 사건 당일 아침에 야마모토 주스케 기자가 보낸 특별 전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제1특파원 야마모토 주스케는 1894년 6월 6일 오후 5시에 오사카를 출발하여 10일 오전 1시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는 청일전쟁기 66개 신문사에서 파견한 114명의 종군기자 가운데 가장 빠른 대응이었다. 일본군 선발대가 6월 6일 오후 출발하여 12일 오후 인천에 도착한 것에 비견될 정도로 신속한 것이었다.”(최정훈, 『1880년대 후반 메이지일본의 전쟁 담론 공간 - 야마모토 주스케山本忠輔의「일본군비론日本軍備論」을 중심으로』, 2015년.)

특파원들이 보낸 전보 내용의 주요 골자는 갑자기 도발하는 조선군을 일본군이 정당방위로 응전하여 격퇴하고 대원군이 입궐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韓兵의 포격 我兵의 응전(韓兵の砲擊我兵の應戰)’이라는 제목 아래 호외 기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기사 말미의 다음 구절에 있다.

“포격 장소 등 상이한 부분이 있지만, 韓兵이 포격한 일은 모두 같다. 이미 이에 이르러 이제는 긴말이 필요 없다. 일전으로 韓廷을 교사한 자와 무례한 韓廷 모두 그 죄를 묻고 일대 영단을 내리는 것 외에는 없다.”

여기서 韓兵(한병)은 조선의 병사를, 韓廷(한정)은 조선 조정을 가리킨다. 韓廷, 곧 조선 조정을 “교사한 자”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청나라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일본군에게 도발하는 무례를 저질렀는데 그것을 사주한 것이 청나라이므로 전쟁을 일으켜서 청나라와 조선 모두에게 죄를 묻고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쥐는 일대 영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군의 응전은 정당방위이며 조선군이 도발한 그 이면에는 청나라가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일본이 개전의 명분을 구축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야마모토 주스케 등 아사히신문의 조선 특파원들이 ‘조선군이 먼저 도발했다!’고 그토록 강조한 이유다.

당시 일본에게 있어서 청나라와의 일전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개전(開戰)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일본은 조선의 왕실을 이용했다.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연이어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1894년 7월 23일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중화질서를 붕괴시키고 조선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는 절차를 한발 한발 진행해 갔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정부는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청나라로부터 무려 2억 3천만 냥에 달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다.

당시 일본 언론의 기사 날조 상황은 최정훈님의 논문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도쿄아사히신문』과 『오사카아사히신문』(大坂朝日新聞) 은 청일전쟁기 당시 특파원 보도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미디어 전쟁’에서 다른 매체를 압도하는 취재력을 발휘하는 등 발행부수를 늘리는 성공을 거둔 언론이었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연구할 때 당시의 전쟁 상황뿐 아니라 이 전쟁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는 데도 『아사히신문』은 중요한 참고가 된다. 그중에서도 야마모토 주스케의 특보는 당시 유명한 기자였던 니시무라 덴슈 (西村天囚)의 기사와 더불어, 청일전쟁을 국민에게 체험하게 하고 인식시키는 주요 매개였다. 나카쓰카 아키라의 지적대로, 이러한 창구의 위력은 7월 23일 경복궁 점령이라는, “일본 공사관의 제안에 근거하여 일본군이 작전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 대단히 계획적인 사건”조차 조선 측의 도발에서 비롯된 교전으로 묘사한 『아사히신문』 등의 7월 25일자 보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청일전쟁 시기 일본 언론은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조작한 정보에 휘둘렸으며”, 그로써 “일본 국민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가능성은 차단”되었다고 한다. 야마모토의 왜곡된 보도가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청일전쟁을 잘못 인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카쓰카에 따르면 이러한 유력지의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손아귀 속에서 발휘되었다. 나카쓰카는 청일전쟁 시기 일본 언론은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조작한 정보에 휘둘렸으며, 이것이 “일본 국민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가능성”을 차단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과 관련하여 2002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 인터넷판은 이렇게 쓰고 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사실을 조작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이 왜곡은 이미 1903년 국정교과서에서도 반영됐다. 100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학교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한 ‘조작된 이야기’가 국민적인 상식으로 통용된 것이다.”     

무려 100여 년 동안 경복궁 점령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해 온 일본의 주장이 물적 증거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난 것은 근자의 일이다. <한겨레 21> ‘1894년  일본, 조선전쟁 계획했다’(2005. 8. 18자)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일본 역사학자 나카쓰카 아키라는 후쿠시마 현립도서관에서 발견한 ‘조선 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중략). 이 문서에는 “연대 2대대와 공병 1소대가 불시에 왕궁으로 침입해 조선 군사를 몰아내고 국왕을 옹위해 수호하라”는 등의 치밀한 작전계획이 드러나 있다. 그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라는 책에서 <일청전사> 초안 정리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이 빠졌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은 사전에 경복궁 점령을 계획했고 전후 사료의 정리과정에서 이를 배제했다는 주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널리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진실추구와 사실 확인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들의 모임인 CCJ(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가 제시한 언론의 아홉 가지 과제 중에서 첫 번째로 거론하는 것 또한 진실을 전달할 의무에 관한 것이다.

국가든, 자본이든, 이념이든, 언론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본 사료가 전하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성찰이 없으면 악업을 단절하지 못하여 유사한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언론이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 게으르고, 약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며,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 기능을 상실한다면, 그 사회 성원들의 존엄과 가치, 사회질서의 안녕은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더 나은 세상으로의 기대나 개선에 대한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 불교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언론자유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또 그 신뢰도는 얼마만큼이나 탄탄한 두께를 가졌을까?

<도쿄아사히신문> 호외 번역본

메이지 25년 3월 11일 체신성 인가.
 
도쿄아사히신문 호외 메이지 27년 7월 24일
 
●한병의 포격, 우리 병사의 응전. (그를 즉시 격퇴하다)
7월 23일 오전 10시 경성 야마모토 주스케 특발.
 
오늘 아침 한병이 돌연히 북한산 중턱 성벽에서 발포하다.
우리 병사가 응전하여 즉시 한병을 격퇴하다.
우리 병사가 대원군 저택을 경호하다.
대원군이 왕궁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하다.

오른쪽은 우리 특파원에게서 온 급전이다. 어젯밤 그것을 접수하였다. 별도로 관계 기관에 들어온 소식은 왼쪽과 같다.
 
7월 23일 오전 8시 경성 발신. 같은 날 오후 1시 40분 착신.
왕성 부근에 있던 한병의 도발로 그에 응전 중.
 
7월 23일 오전 8시 20분 발신. 같은 날 오후 1시 40분 착신.
한병은 도주하였고 병기를 들고 왕성을 방어하였다.

또한, 모처에 들어온 다른 소식을 들으니 그것은 약간 차이가 있어 참고를 위해 여기에 부기한다.
 
오오시마 공사의 두 번째 요구에 대하여 한정(조선조정)은 무례한 답을 하고 화를 내는, 왠지 모르게 불온한 기색이 있어 공사가 호위병을 대동하고 왕궁에 들어 임금께 아뢰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한병이 돌연 공사를 향해 발포하여 우리병사가 응전하였다. 대략 20분의 전투가 끝나고 공사는 마침내 조정에 들었다.
 
또한, 1보에 금일(23일) 오전 8시 우리 병사가 왕궁을 둘러쌌다. 한병이 성 밖에서 전투를 걸어와 20분간 교전하였다. 한병이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병사가 총기 50정을 획득하였다.

2보와 우리 특별 전보 모두 포격 장소 등 상이한 부분이 있지만, 한병이 포격한 일은 모두 같다. 이미 이에 이르러 이제는 긴말이 필요 없다. 일전으로 한정을 교사한 자와 무례한 한정 모두 그 죄를 묻고 일대 영단을 내리는 것 외에는 없다.
 
또한, 우리 특별 전보에 있는 대원군이 왕궁에 들어간다는 내용은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집행한다는 뜻으로 그 승낙이 과연 사실이 된다면 조선의 국정상 일대의 변동을 발생시킬 것이다. 또한, 후속보도가 나오는 대로 추가로 속보할 것이다.

발행 겸 인쇄인 고바야시 다마키 편집인 나가사카 마고이치로
발행처 도쿄 교바시 다키야마마치 4번지 도쿄아사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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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2020-07-26 20:48:29
대구 침산동에 있는 도심 법당(포교당) 운영해보실 스님을 찾습니다.
법당 시설 후 점안불사만 올리고, 개원불사도 올리지 못한 채,
급한 사정으로 본찰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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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선원...현장 합장> 010-9592-9288
* 기도중에는 전화를 못받을 수가 있습니다. 문자 남기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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