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천도·용화세계 구현 꿈꾼 백제 무왕 원찰
익산 천도·용화세계 구현 꿈꾼 백제 무왕 원찰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0.05.05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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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12 - 익산 무왕길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 익산 미륵사지 전경. 왼쪽에 보이는 석탑이 사택 왕후가 조성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흔히 백제의 수도로 한성과 공주, 부여를 꼽지만 최근에는 익산도 그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백제 제30대 무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하였고, 이곳으로 천도(遷都)하려 했다거나 천도했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익산 천도설’이 그것입니다. 익산시에는 금마면을 중심으로 백제 유적이 여럿 곳 남아있습니다. 미륵사지, 사자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익산 토성, 미륵산성 등인데, 모두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합니다.

익산의 무왕길은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더듬을 수 있는 둘레길입니다. 무왕길은 모두 3갈래인데, 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을 출발해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등을 들러 되돌아오거나, 왕궁리 유적에서 출발해 쌍릉에서 마무리하는 길입니다.

미륵사지는 건마국(乾馬國)의 도읍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금마면 용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마국은 마한의 54개 소국 중 하나입니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발원한 왕실원찰 미륵사

미륵사는 무왕과 비 선화 공주가 발원해 창건한 사찰입니다.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연기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날 무왕은 선화 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師子寺)에 주석하던 지명 스님을 만나러 길을 나섰습니다. 무왕 일행이 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합니다. 이에 선화 공주가 “이 못에 큰 절을 짓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고, 받아들인 무왕이 지명 스님의 신통력을 빌려 하룻밤 만에 못을 메운 뒤 미륵삼존상을 조성하고 삼원(三院)에 각각 회전(會殿)과 탑(塔), 낭무(廊廡, 회랑)를 세웠다고 합니다.

불교사학자들은 이 연기설화를 근거로 미륵사를 미륵하생신앙에 바탕해 창건된 사찰, 즉 무왕이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백제 땅에 실현하려고 창건한 사찰이라고 평가합니다. 연기설화에서 미륵삼존이 연못에서 출현한 것은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생한 것을 상징하고, 삼원은 미륵부처님이 용화회상에서 세 번 설법한다는 ‘용화삼회(龍華三會)’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발굴조사 결과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실제 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 확인됐고, 가람배치 또한 중원(中院)과 동원(東院), 서원(西院)을 갖춘 삼원가람(三院伽藍)으로 밝혀졌습니다.

미륵사 창건을 정치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를 즈음 백제는 왕권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무왕은 자신의 세력근거지였던 금마저(金馬渚, 익산시 금마면 일대)로 왕도를 옮김으로써 부여의 토착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무왕이 사비궁 중수, 왕흥사와 미륵사, 제석사 창건 등 부여와 익산 일원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일으킨 것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왕은 즉위 31년(630)에 사비궁을 중수하고 4년 뒤 왕궁 남쪽에 인공호수와 섬을 만들었습니다. 또 부여에 부왕인 법왕이 착공한 왕흥사를 30여 년 만에 완공했고, 천도를 계획한 익산에 내불당 성격의 제석사를 창건했습니다. 미륵사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진행한 대규모 역사의 일환이었다는 것이지요.

무왕-선화공주, 적대국 왕족 간 결혼

미륵사 창건의 두 주역인 무왕과 선화 공주의 인연도 흥미롭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선화 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을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응해 맺은 제2 나제동맹을 신라 진흥왕이 깨면서 두 나라는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백제 비유왕(毗有王, 427∼455)과 신라 눌지왕(訥祗王, 417∼458)은 433년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응해 필요할 때 서로 원군을 파견하는 제2차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나제동맹은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 진흥왕이 즉위 14년(553) 점령하면서 깨집니다. 격분한 백제 성왕은 신라 정벌에 나섰지만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목숨까지 잃고 맙니다. 이후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 백제는 적대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무왕과 선화 공주의 만남은 적대국 왕실 간 혼인이었습니다. 원수지간이었던 두 나라 왕실이 혼인을 맺었다면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했을 터인데, 사위가 장인의 나라를 상대로 재위 기간 내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서동(薯童, 무왕)이,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와 자신이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노래를 퍼트려 부부가 됐다는 ‘서동설화’도 문학적 상상력으로 가득합니다.

또 다른 무왕의 비 사택 왕후

이렇듯 무왕 대의 역사적 배경과 부부를 둘러싼 이야기를 살펴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선화 공주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일부 학자는 백제 동성왕이 신라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은 사실을 들어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동성왕과 비지의 딸이라거나, 즉위 전 지방행정조직인 담로(擔魯)의 장으로서 익산 지역을 다스린 무령왕에게서 비롯된 설화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2009년 1월 문화재청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중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의 신빙성을 무너뜨리는 유물이 발견됩니다. 석탑 심주석 중앙 사리공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가 그것입니다. 가로 15.3cm, 세로 10.3cm, 두께 1.3mm 크기의 사리봉영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으셨기에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寶〕를 받아 태어나셨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사택 왕후임을 기록한 당대의 명문이 나왔으니, 설화에 불과한 고려시대 기록, 즉 《삼국유사》 속 연기설화에 등장하는 선화 공주가 빛을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리봉영기의 내용대로라면 미륵사 창건 설화의 주인공은 무왕과 사택 왕후가 되어야 합니다.

석탑 시주자는 사택 왕후, 목탑 시주는 선화공주?

그러나 선화 공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계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반론의 논리적 근거는 무왕에게 비가 한 명 뿐이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륵사가 삼원가람이었으니 각 원마다 세운 탑의 시주가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원 목탑은 선화공주가 시주했고, 사리봉영기가 발견된 서원 석탑은 사택 왕후가 시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2018년, 일본인이 발굴한 지 100년 만에 익산 쌍릉을 재발굴할 때 발견된 인골이 무왕으로 밝혀진 것도 비가 여럿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익산 쌍릉은 대왕묘과 소왕묘로 이루어졌는데, 출토 유물을 분석한 결과 소왕묘가 무왕의 유해가 발견된 대왕묘보다 먼저 축조됐다는 것입니다. 사택 왕후는 무왕 사후에 돌아갔으니 쌍릉 소왕묘에 묻힌 이는 선화 공주이거나 또 다른 비라는 것이지요.

미륵사 창건주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미륵사지 석탑, 즉 서원 석탑은 20년간의 전면 해체·수리를 마치고 지난해 다시 세상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 최대 규모이자 백제 목조건축 기법이 반영된 석탑입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평가되지요.

▲ 익산 제석사지 목탑지. 제석사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뒤 창건한 사찰이다.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 왕궁 유적으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 내에 있다.

무왕이 창건한 제석사, 번개로 전소

미륵사지 석탑을 뒤로하고 절터 앞을 지나 금마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궁성로를 따라 길을 나섭니다. 금마면 소재지와 금마네거리를 지나면 이내 왼쪽으로 뻗어가는 제석사지로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2km쯤 들어가면 제석사지(帝釋寺址)입니다.

제석사지는 왕궁면 궁평마을에 있습니다. 제석사는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증명하는 사찰입니다. 중국 육조시대 육고(陸杲) 등이 지은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책에 “백제 무광왕(武廣王, 무왕)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해 새로운 정사(사찰, 제석사)를 지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기 때문이지요.

지모밀지는 노산주(魯山州)에 속한 지모현(枳牟縣) 지마마지(支馬馬只)라는 의미라 합니다. 노산주는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 설치한 9주 중 하나인데, 지금의 금마지역입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993년부터 2년 간 제석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중문과 탑, 불전,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한 1탑 1금당식 가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석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제석사는 무왕 40년(639) 11월 벼락을 맞아 모두 불탔습니다. 다만 목탑 심초석 아래에 봉안한 사리장엄 중 불사리병과 동판 금강반야경은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는데, 꺼내 보니 정작 사리는 없었다고 합니다. 무왕이 법사를 청해 참회하고 병을 열어보니 사라진 불사리 6과가 모두 병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요. 사리의 신이함에 감동한 무왕은 다시 탑을 쌓아 봉안토록 했습니다.

제석사지에서 북동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폐기장 유적이 있습니다. 불탄 제석사에서 나온 불상 조각과 기와, 벽체 등 건축 부재를 버린 곳입니다. 제석사가 불탔다는 《관세음영험기》의 기록이 정확함을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백제 내원당 터에 세운 왕궁리 오층석탑

제석사지는 백제 왕성이 있던 왕궁리 유적에서 멀지 않습니다. 직선거리로 1.3km에 불과합니다. 이곳에선 왕궁리 오층석탑이 손에 잡힐 듯 보입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대관사(大官寺) 터에 세워진 탑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대관사는 무왕 40년(639) 궁궐 안 법당, 즉 내원당(內願堂)으로 창건됐습니다. 그런데 대관사를 창건한 시기와 제석사가 불탄 시기가 일치합니다. 1965년 오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기단 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도 《관세음응험기》에 소개된 제석사 목탑 사리장엄과 비슷합니다. 오층석탑에서는 순금으로 조성한 금강경판(金剛經板)과 유리로 만든 사리병, 청동여래입상 등 사리장엄이 발견됐는데, 금강경판이 동판이 아니라 금판인 점, 사리병에 든 사리가 6과가 아니라 16과인 점, 금강경판을 넣은 함이 목칠함이 아니라 금제함이라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불사리의 신이함에 감동한 무왕이 다시 세우도록 한 불탑이 왕궁리 오층석탑이었을까요? 왕궁리 석탑의 건립 시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니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미륵사지, 제석사지, 쌍릉, 왕궁리 유적 등 익산시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에 산재한 백제유적들은 익산 천도설, 선화공주를 둘러싼 논란 등 어느 것 하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백제사의 미스터리를 간직한 채 오늘도 변함없이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budjn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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