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고 평화로운 미륵의 세상 언제 열릴까?
차별 없고 평화로운 미륵의 세상 언제 열릴까?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0.04.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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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 11 - 고창 보은길 선운사·도솔암
▲ 고창 선운사.

선운사를 상징하는 꽃 ‘봄동백’

대다수 사람에게 ‘선운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동백꽃일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가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지만, 너무 일러 꽃은 보지 못하고 막걸릿집에서 육자배기만 듣고 왔다.”(<선운사 동구>)고 푸념했고, 가수 송창식이 “바람 불어 설운 날에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느냐?”(<선운사>)고 묻던 그 동백꽃말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과 가수가 선운사 봄동백〔春栢〕을 소재 삼아 작품을 만들었으니, 그 시어와 선율이 뇌리에 남은 대중이 선운사를 이야기할 때 단박 동백꽃을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보은길(소금길)’은 선운사 동백꽃을 만나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은길’은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 길’ 중 제4코스입니다. 풍천에서 시작해 선운사, 도솔암, 소금전시관을 거쳐 좌치나루터까지 이어지는 길이지요.

선운산관광안내소에서 도솔천을 따라 산나물을 내놓은 상인들이 길손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700m가량 거슬러 오르면, 동백나무숲을 등에 업은 선운사가 두 팔을 벌리며 ‘어서 오라.’ 반깁니다. 지금이야 동백꽃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선운사의 진면목은 꽃에 있지 않습니다. 선운사는 민중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사찰이었고, 내로라하는 선지식이 머물며 조선불교의 선맥과 강맥을 잇고 꽃피운 도량이었습니다.

▲ 고창 선운사 진흥굴.

동굴서 미륵삼존 현몽 꾼 진흥왕

대부분 사찰이 그러하듯 선운사를 언제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창건 이후 고려 공민왕 때까지 절 역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전해온 연기설화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지은 사찰로 짐작할 뿐입니다.

처음 선운사를 지은 사람은 신라 진흥왕(534~576)이라는 설과 백제 위덕왕(?~598) 대 검단(檢旦, 黔丹) 스님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진흥왕 창건설은 숙종 33년(1707) 현익(玄益) 스님이 지은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 같은 문헌기록에 근거한 것이고, 검단 스님 창건설은 구전설화에 따른 것입니다.

진흥왕 창건설은 이렇습니다.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해 선운산 좌변굴(左邊窟)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감응한 진흥왕은 왕비와 공주의 이름을 따 각각 도솔사(兜率寺)와 중애사(重愛寺)를 지었는데, 그중 중애사가 선운사의 시초라는 설입니다. 진흥왕이 하룻밤 묵었다는 좌변굴은 도솔암 아래에 있는 진흥굴이라 합니다.

이밖에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의운 화상을 보내 창건했다거나, 의운 화상이 진흥왕의 시주를 받아 창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진흥왕이 대시주였다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흥왕 창건설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이곳이 백제 땅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지요.

▲ 고창 선운사 조사전에 봉안된 검단 선사 진영.

도적 교화하고 소금 제조법 알려준 검단 스님

신라 왕실, 즉 특권층의 후원을 전제로 한 진흥왕 창건설과 달리 검단 스님 창건설은 다분히 민중불교적입니다.

검단 스님은 용이 살던 큰못〔龍湫〕을 메우고 선운사를 지었는데, 당시 선운산에는 도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을 교화한 검단 스님은 양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소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승의 이름을 따 마을 이름을 ‘검단리’라고 짓고,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매년 봄·가을 ‘보은염(報恩鹽)’을 선운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몇 푼 하지 않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소금은 국가가 독점해 파는 물품이었습니다. 검단 스님이 도적을 교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활방편으로 삼을 수 있도록 소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설화를 사실 그대로 믿는다면, 선운사의 창건 정신은 왕실이나 귀족 같은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니라 억눌려 힘들게 살아가던 민중을 향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운사는 조선 성종 3년(1472) 행호 극유(幸浩 克乳) 스님이 크게 중창했습니다. 절 마당에 구층석탑만 쓸쓸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한 스님은 10여 년 간 장륙전, 관음전, 천불대광명전, 지장전, 금당, 능인전 등 전각과 당우 189채를 짓고 53불회탱을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일군 도량은 선조 30년(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어실을 제외하곤 모두 불탔습니다. 선운사는 광해군 5년(1613) 무장현감 송석조와 일관(一寬) 스님이 합심해 대웅보전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숙종 33년(1707)까지 중창을 거듭해 현재 가람의 얼개를 갖추었습니다.

▲ 고창 선운사 대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

조선불교 선(禪)과 교(敎) 꽃피운 도량

선운사 입구에는 부도전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 백파 긍선(白坡 亘璇, 1767~1852), 영호 정호(映湖 鼎鎬, 1870~1948) 스님 등 조선불교의 선(禪)과 교(敎)를 꽃피운 스님들의 사리탑과 탑비가 모셔져 있습니다.

설파 스님은 ‘화엄의 충신’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중국 화엄종 제4조 청량 징관((淸凉 澄觀, 738~839) 스님이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의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해 정본을 만드는 등 조선 후기 화엄학 연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백파 스님은 ‘선문(禪門)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운문암, 구암사 등에서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어 후학을 지도하였고,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스님과 선문의 요지를 주제로 토론했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교유한 스님은 그로부터 ‘해동 달마’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부도전에 있는 스님의 탑비는 추사가 비명을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금봉·진응 스님과 함께 근대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한 명으로 추앙 받는 영호 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분입니다.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유교경전은 물론 역사, 철학, 문집, 서법 등 다방면에 능통했습니다. 스님은 조선불교 수호와 교단 혁신에도 깊이 참여했습니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병합시키려고 획책한 이회광의 원종에 대항해 만해, 금봉, 진응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벌여 좌절시킨 것이지요. 스님은 또 고등불교강숙과 불교중앙학림 강사 등을 거쳐 1931년 중앙불교전문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마애불 비결 탈취한 동학 대접주 손화중

천왕문을 지나 도솔천을 따라 계곡을 오릅니다. 두 팔 벌린 인왕상처럼 냇가에 일렬로 늘어선 나무는 새싹이 오르지 않아 여전히 말랐습니다. 하지만 봄기운은 마른 가지를 헤집으며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1km 가량 걷다보니 템플스테이체험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에서 큰길을 버리고 냇물을 건너 보행로에 들어섭니다. 길가엔 노루귀, 제비꽃, 현호색 등 봄꽃이 기지개를 켜며 반갑게 미소짓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2.3km 가량 가니 진흥굴과 장사송이 모습을 드러내고 곧이어 도솔암이 순례객을 맞이합니다.

도솔암은 원래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의 세 암자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상도솔암은 내원궁, 하도솔암은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북도솔암은 도솔암 대웅전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가 되었습니다.

도솔암은 동학농민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3대 지도자로 꼽히는 손화중이 도솔암 서쪽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 감춰둔 비결(秘訣)을 꺼낸 뒤 동학교단 내 최대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은 검단 스님이 위덕왕의 부탁을 받고 조성한 불상이라 합니다. 스님은 이곳에 공중누각을 짓고 동불암(東佛庵)이라 이름 지었지요.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로 여깁니다. 마애불 배에는 돌로 막은 사각 구멍이 있습니다. 아마도 복장을 봉납한 구멍이지 않을까 싶은데, 전설의 내용은 사뭇 다릅니다. 이 구멍에 검단(또는 미륵) 스님이 감춰둔 비결이 들어있는데, ‘비결을 꺼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개혁하려고 동학교도와 농민이 함께 일으킨 정치혁명이자,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무장현의 대접주 손화중은 ‘비결을 꺼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이태 전인 고종 29년(1892), 손화중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비결을 탈취합니다. 이 일로 무장현 관아에 잡혀간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등 3명은 반역죄와 강도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문을 들은 손화중의 접포(接包, 여러 접소를 묶은 동학의 교단 조직)에는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가 몰려들어 동학의 최대 조직이 성장했습니다. 송화중이 이끈 접포(接包)는 이태 뒤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손화중이 꺼낸 비결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손화중 무리가 비결을 탈취한 사건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 당시 민중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고창 선운사 도솔암 전경.

용화정토 꿈꾼 민중의 삶과 한 깃든 터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용문굴과 낙조대를 거쳐 천마봉에 올랐습니다. 이곳에 서면 도솔암과 멀리 선운사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천마봉 바위에 앉아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봤습니다. 진흥왕이 꾼 꿈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그리던 세상은 미륵이 출현해 일군 용화정토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염없이 미륵이 출현하길 기다리기엔 민중의 삶은 너무 힘들고 고됩니다. 온갖 차별과 다툼, 부의 편중이 없는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미륵의 세상을 현실세계에 일구어 내는 것이 민중의 바람이었겠지요. 그런 민중의 바람은 도적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알려준 검단 스님의 일화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마애불 복장에 감춰둔 비결을 꺼낸 동학교도의 행동으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선운사와 도솔암은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희망을 가슴에 품었던, 이 나라 민중의 삶과 한, 꿈이 깃든 현장이었습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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