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사(歸信寺)는 규모는 작으나 천년고찰로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의상대사가 676년 모악산에 창건한 사찰이며 화엄십찰이다. 그 당시 국신사(國信寺)로 불렸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중건한 후 귀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적광전 뒤 언덕위에 3층 석탑과 석수가 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화엄십찰에 대한 풍수적 접근은 이견이 있다. 그 당시에 풍수가 있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의상대사가 풍수서인 <청구비결>을 지었다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책은 실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다고 그 책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바탕으로 한다면 도선국사 보다 약170년 앞서서 풍수를 현실에 응용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주불을 모시는 전각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짓는 것이 관례이다. 능선은 천기와 지기가 통하는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천지의 기로 인한 정신적 감응을 통해서 인재의 양성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귀신사의 입지와 지형을 보면, 능선을 피하여 옆구리에 대웅보전을 지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을 지을 때는 풍수지형과 풍수요소를 감안하여 풍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찰의 전각을 일반 가옥을 짓는 곳에 지었다는 것은 의아할 따름이다.
능선이 아닌 곳에 대적광전을 지었다는 것은 자체에서 인재양성을 하지 못하게 한 풍수적인 처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였으므로 신라의 왕이 승려를 파견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복영토에 믿을 수 있는 승려를 파견하겠다는 신라왕실의 정치적 고려를 확인할 수 있는 풍수요소이다. 이런 요소가 발견된 보원사지와 청담사지가 폐사지이며, 귀신사도 임진왜란이후 1873년에 중창하였으니 280년간 폐사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풍수지형에 따라 생장소멸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화엄사찰의 대적광전 앞에 석탑을 세우지 않지만,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적광전 뒤에 삼층석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석탑의 영험함이 국신사가 중창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