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하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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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도겸
  • 승인 2019.09.1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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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뜻으로 보는 입보리행론 31

나와 타인이 같다는 평등심을 먼저 애써 명상하며 닦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고 고통은 싫어한다는 점에서 같기에 일체중생을 마치 나와 한 몸인 것처럼 함께 지켜야 한다. 몸에는 손과 발 이외에도 여러 부분이 있지만 모두가 온전히 지켜야 할 한 몸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중생이라도 자타라는 구별을 떠나 일체 중생 모두를 보호해서 다 행복해지길 원해야 한다. 비록 내가 겪는 고통이 타인을 고통스럽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도 모두 나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와 같이 타인들의 고통이 나를 고통스럽게는 하지 않더라도 그것 역시 집착으로부터 오는 나의 고통과 같은 것이기에 참고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없애야 하니, 타인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과 같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롭게 도와 행복하게 해야 하니,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에 그렇다.

언제든지 나와 타인 모두 다 행복을 원하는 것은 똑같은데 나와 남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고 왜 나(혼자)만 행복해지려고 애쓰는가! 언제든지 나와 타인 모두 다 고통을 원하지 않는 것은 똑같은데 나와 남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고 왜 나만 굳이 고통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가! 만일 남이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나에게 해가 없다고 보살피지 않으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고통들도 [지금은] 전혀 해가 없는데 왜 그것으로부터는 지키려고 하는가!

내가 미래에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똑같다는 전도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으로 죽을 사람도 다시 태어날 사람도 지금의 나와는 똑같지는 않다. 언제 어떠한 고통이 닥쳐도 그것으로부터 자신만을 지키려고 한다. 발의 고통은 손이 겪는 고통이 아닌데도 어째서 발의 고통을 대신 손이 지킬 수가 있는가. 잘못된 이런 모습은 '나'에 대한 잘못된 집착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나와 남의 구별 자체도 불합리한 것인, 이런 분별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깨뜨려야 한다. .

의식[오온]의 서로 연속된다고 하거나 하나의 몸은 부분들이 모여 집합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실체가 없는  가상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군대 행렬과 같이 부분들이 하나로 모이거나 흩어지긴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실체가 아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허망한 것일 따름이다. 이와 같이 고통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는데 정말 이 고통이 누구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통은 고통일 뿐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의 것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통이라서 없애야 한다면 여기서 [자타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왜 모든 이의 고통을 없애야 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만일 없애야 한다면 나와 남을 구별하지 말고 다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남과 같이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에도 많은 고통이 따르는데 왜 굳이 일으켜야 하느냐고 한다. 중생의 고통을 헤아려보면 어찌 자비심의 고통이 더 크고 많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단 하나의 고통만으로 많은 고통을 대신하거나 없앨 수 있다면 자비심과 연민을 품은 이는 기꺼이 감수하여 고통이 나는 물론 남에게도 생기지 않게 한다. 그래서 선화월(善花月)보살은 왕이 해를 끼칠 줄 알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면하게 했다.

이와 같이 서로 이어지는 마음을 바로 관하는 보살은 남이 고통받고 있으면 자신도 똑같이 고통스럽게 여기며, 마치 연꽃 연못에 잠수하는 백조처럼 무간지옥이라도 잠수해 들어간다. 일체 중생이 해탈하면 세상이 무한한 기쁨의 바다가 될텐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는가!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수록 교만해 지거나 잘난척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좋아서 남을 위하는 것일 뿐이니 이외 다른 것들(이숙과異熟果)을 더 바래서는 안된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조금이라도 불쾌하면 자기 자신부터 지키는 것처럼 자비심을 내서 남들을 지켜야 한다.

지금까지 해오던 습으로 인해 내 몸에서 흘린 피 한 방울 조차도 '나'라고 인식한다. 원래 이런 몸의 일부는 실제로는 이미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고 인식한다. 그렇다면 왜 남의 몸도 자기라고 여기지 못하는가? 정작 나의 몸도 내가 아닌 남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에게도 허물이 있고 타인에게는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공덕이 있음을 바로 알고, 아집(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성품)을 모두 버리며, 타인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손과 발은 몸의 일부로 인정하고 아끼면서 같은 몸을 가진 중생들은 왜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이와 같이 '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이 몸에 익숙해져서 '나'라고 하는 의식이 생기듯이,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익숙해지면서도 왜 '나'라고는 전혀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는가. 

남을 위해 일해도 잘난척하거나 자랑하지도 않는다. 나를 위해 밥을 먹듯이, 나 자신을 위해 한 것에 불과하니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사소한 고통에 대한 걱정으로부터로도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듯이 일체중생도 자비심으로 돌보도록 습이 되도록 닦아야 한다. 구원자 관세음보살께서는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윤회하는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당신의 명호에도 가피를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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