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존경한 스승 신미 대사 주석처
세조가 존경한 스승 신미 대사 주석처
  • 이창윤 기자
  • 승인 2019.09.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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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5 - 보은 세조길
▲ 신미 스님 사리탑인 수암화상탑(앞)과 학조화상탑.

절대 권력을 가진 이의 삶이라고 해서 늘 영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권력이란 움켜쥘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같아서 지키는 것도, 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겨눈 경쟁자의 칼끝을 늘 걱정해야 하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권력을 쥔 이의 삶도 그러한데, 피를 묻혀가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세조는 조선왕조에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첫 임금이자,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첫 임금입니다. 세조는 즉위 과정에서 상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사사하였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권력이 아무리 영화로운들 스스로 짊어진 업보는 쉽게 벗을 수 없습니다. 점점 삶을 조여 오는 올무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짊어진 업보 ‘피부병’

실록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세조는 생전에 피부병을 심하게 앓았다 합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으며 세조를 저주했는데, 침이 묻은 자리에 종기가 생겼다는 얘기도 전하지요. 세조가 피고름을 흘릴 정도로 극심한 피부병을 얻은 것이나 맏아들인 의경세자와 그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피를 묻혀가며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업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북 보은에는 이런 세조의 이름을 딴 길이 있습니다. 법주사에서 복천암에 이르는 왕복 6.4km의 세조길이 그 길입니다. 2016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정한 ‘국립공원 단풍길 10선’ 중 하나로 뽑힐 정도로 아름다운 이 길은 세조가 복천암에 주석하던 스승 신미 대사를 만나려고 거둥한 길이자, 천형에 걸린 세조가 요양 차 왕래했던 길입니다.

세조길은 ‘보은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비각 앞 삼거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세조길’이라 적힌 입구에 들어서면 복천암 아래 세심정까지 평지 같은 완만한 탐방로가 이어집니다. 특히 세조길 입구부터 저수지를 거쳐 태평휴게소까지 1.2km 구간은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 교통약자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무장애탐방로입니다.

템플스테이 건물 앞을 지나면 세조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집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와 세조가 속리산에 거둥했을 때 머물렀다는 건물터, 주인 모를 사리탑 서너 기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부도전 두 곳이 오가는 길손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 세조길 저수지. 2014년까지 상수도 취수원으로 사용됐다.

길손들의 휴식처 ‘눈썹 바위’

저수지에 다다를 즈음, 길 왼쪽으로 길쭉하고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사람 눈썹처럼 생겼다 하여 ‘눈썹 바위’라 불리는 바위입니다. 속리산에는 세조와 관련 있는 지명이 몇몇 있습니다. ‘문장대’는 꿈속에서 만난 귀공자의 안내로 찾아간 봉우리에서 삼강오륜을 담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 ‘눈썹 바위’ 또한 세조와 인연이 있습니다. 요양 차 속리산에 거둥했을 때 세조가 이 바위 그늘 아래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하지요. 예전에는 속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비바람과 한낮 더위를 피해 쉬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눈썹 바위를 지나면 바로 저수지가 나타납니다. 계곡물을 법주사와 사하촌 식수원으로 사용하려고 1997년 만든 저수지입니다. 다섯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저수지를 상수도 취수원으로 사용했다 합니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저수지는 지금 본래 목적을 잃고 원앙, 노랑턱멧새, 노랑할미새, 물까마귀, 왜가리, 수달, 목납자루, 돌고기, 참갈겨니, 남생이 등 수많은 생명이 깃든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당 태종이 훼손한 수정봉 거북바위

저수지 끝머리 전망대에 서면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뒤 봉우리인 수정봉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수정봉에는 잘린 머리를 이어붙인 거북바위와 폐탑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속리산사실기비문>에 따르면 당 태종이 중국의 기운을 우리나라에 뺏기는 것을 막으려고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고, 등 위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잘린 목을 다시 이어붙이고, 등 위에 있던 탑을 허물었습니다.

전망대에서 잔잔한 수면과 어우러진 수정봉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세조길은 태평휴게소를 지나 차도를 한 차례 건넌 뒤 계곡을 따라 이어집니다.

▲ 세조길.
▲ 세조길 계곡.

세조길 탐방로를 걷다보니 화담 서경덕의 ‘속리산 밑에서 쉬다〔憩俗離山下〕’라는 시를 소개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산빛은 사람의 기쁨을 열어주는 듯하고, 계곡물 소리는 세상의 원망을 호소하는 듯하네. 아득한 오랜 세월의 일을 홀로서서 누굴 향해 이야기할까〔山色開人悅 溪聲訴世寃 悠悠千古事 獨立向誰論〕.”

화담의 한시처럼 속리산의 푸르름은 세간의 영욕을 잊게 하고, 계곡물 소리는 세상살이의 근심 걱정과 시름을 흘려보냅니다. 세조길을 걸으며 흔들리는 나뭇잎과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면 세간의 시시비비가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세조 또한 신미 스님을 찾아 나선 길에서 왕위를 찬탈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벌인 피바람이 부질없는 일임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 세조가 목욕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월광 태자가 알려준 ‘목욕소’

발걸음은 어느덧 목욕소(沐浴沼) 앞에 다다릅니다. 오대산과 속리산은 모두 세조가 목욕 후 피부병을 완치한 곳이라는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대산은 문수동자가 목욕하는 세조의 등을 밀어주어서, 속리산은 “계곡에서 목욕하면 완쾌될 것”이라는 월광태자의 게시를 받고 목욕한 뒤 피부병이 나았다 합니다. 이 목욕소가 세조가 목욕하고 피부병을 다스린 곳입니다.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세조가 피부병을 다스렸다는 오대산과 속리산의 치병(治病) 설화는 모두 신미 스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신미 스님이 주석했고, 세조가 스님을 만나러 친히 거둥한 곳이지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거둥한 것이 즉위 10년(1464)입니다. 그해 12월 스님은 상원사로 주석처를 옮겨 왕비 정의왕후의 후원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이태 뒤 윤 3월 세조는 직접 상원사로 거둥해 낙성식에 참석했습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치병했다는 설화는 의숙공주 부부가 피고름이 묻은 어의를 그해 12월 조성한 문수동자상 복장유물로 납입한 사실로 미루어 낙성식에 즈음한 때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계곡물에 흘러내려온 흙에 묻혀 검푸른 소를 확인할 수 없지만 목욕소 설화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기대 병을 치료하려는 세조의 간절함이 빚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왕사로 대우…왕실 불사 도맡아

목욕소를 지나면 이내 세심정(洗心亭)에 다다릅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곳은 속리산의 비범한 기운을 알고 전국에서 찾아온 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곳이라 합니다. 어쩌면 세조는 이곳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씻듯 영욕에 찌든 마음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스승인 신미 스님을 만나러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 신미 스님 주석추 복천암. 세조는 이 곳에 거둥해 3일간 기도했다.

복천암은 세심정 위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천암은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절입니다. 이 암자에는 공민왕이 다녀가기도 했는데, 극락보전에 걸린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이라 합니다.

세조는 복천암에서 신미,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스님 등과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습니다. 목욕소에서 피부병을 치료한 뒤 절을 중수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옥판(四角玉板)을 하사했다고도 합니다.

세조와 신미 스님은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스님은 세조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50부 인경할 때 작업을 감독했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자 불경언해 작업을 주관하는 등 세조가 일으킨 많은 불사를 거들었습니다. 세조는 그런 스님을 왕사처럼 모셨습니다.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에서 “나를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준 것은 스승(신미)의 공덕”이라고 고백할 정도였지요. 세조는 신미 스님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맑고 따뜻한 사리탑지

복천암 경내 화장실 옆으로 난 사잇길로 5분가량 오르면 신미, 학조 두 스님의 부도가 있습니다. 입구에 가까운 탑이 제자인 학조 스님의 사리탑이고, 안쪽 탑이 스승인 신미 스님의 탑입니다. 신미 스님의 사리탑에는 ‘수암화상탑 성화 십육년 팔월 입(秀庵和尙塔 成化 十六年 八月 立)’이라는 명문이, 학조 스님 사리탑에는 ‘학조 등곡 화상탑 정덕 구년 갑술 오월 일 입(學祖 燈谷 和尙塔 正德 九年 甲戌 五月 日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각각 성종 11년(1480)과 중종 9년(1514)에 조성한 신미 스님과 학조 스님의 사리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 숲 사이에 방형으로 다진 사리탑지는 맑고 따뜻합니다. 사리탑지 한 구석에서 두 스님의 사리탑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진리를 멀리 하려 한다. 산은 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고 노래한 최치원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세조가 병든 몸을 쉬려고 스승이 머무는 이 깊은 산속으로 찾아든 것도 어쩌면 권력욕에 휩싸여 인과(因果)의 도리를 외면한 채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회한에 사무쳐 스승을 찾은 임금과 그런 제자를 품어 3일간 함께 기도하며 정성껏 돌본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budjn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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